시골에서 출산하고 서울 가는 길
[어머니 이야기-7]아이 업고, 광주리 지고, 장사길 나서
    2013년 01월 29일 03: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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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늦여름 큰형 은종하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기를 낳으려고 다시 경북 군위군 소보면 화실로 내려갔다. 배가 남산만하게 불렀지만 서울 청량리역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의성에 내려 군위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그곳에서 화실까진 걸어서 6시간쯤 걸렸다. 밤늦게 시댁에 다다르니 모두들 놀랐다. 어머니는 차비를 아끼려고 걸어왔고 아기 낳을 돈이 없어 시골로 내려왔다.

화실에 며칠 머물고 있는데 동네 사람이 어머니 보고 “저기 너희 친정 아버지 가신다” 했다. 어머니는 서둘러 그리로 갔다. 외할아버지는 화실에 왔으면서도 들르지도 않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옛날에는 그렇게 사돈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이 아니라 했다. 친정아버지는 한 번도 사돈집에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친정아버지를 불렀다. 며칠 뒤 친정인 새기터로 가서 아기를 낳았다. 걸어서 1시간 반쯤 걸린다. 산을 두 개나 넘어갔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어머니 나이 서른 살이 되어도 아기를 못 낳으면 다른 여자를 만나라고. 어머니는 19살에 혼례를 치러 5년 뒤인 24살에 첫아기를 낳았다. 어머니는 아기를 낳을 자신이 있었기에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서울에 있고 어머니는 친정에 간지 얼마 안 있어 아기를 낳았다. 근데 젖이 잘 안 나왔다. 서울에서 워낙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해서 몸도 말랐고 젖도 말랐다. 다행히 어머니 혼례를 중매했던 새키터 고모가 한 해 앞서 아기를 낳았는데 젖이 잘 나와서 밤에 호롱불을 들고 와서 대여섯 번 젖을 물려주었다.

어머니는 밥을 할 때 밥솥에 그릇을 넣었다. 밥이 다 되고 나면 그 그릇에 밥물이 고였다. 그 밥물에 헝겊을 담갔다가 아기 입에 넣어주며 빨아 먹였다. 그렇게 밥물을 먹으며 큰형은 컸다. 어머니는 아기 낳고 호박국만 먹다가 3일이 지나서야 미역국을 먹었다. 아기를 낳고 나서 먹는 미역국은 시댁에서 주는 돈으로 먹어야 잘 산다고 했다. 친정아버지가 화실에 가서 돈을 받아와서 3일 뒤에 열리는 7일장에 가서 미역을 살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기 낳고 일주일도 안 되서 냇가에 가서 기저귀를 빨았다. 가을이지만 제법 쌀쌀한 날이라 물이 차가왔다. 어머니는 기저귀를 빨 때면 서울에서 판잣집 한 칸이지만 전세로 얻은 보금자리가 떠올랐다. 어머니는 서울살이가 싫어 내려 왔고 다음 해 설에 아버지가 화실에 내려 왔는데 화실에 내려오기 앞서 그 판잣집에 불이 나서 홀라당 다 타버렸다.

그때 아버지는 집 안에 있는 살림살이는 밖으로 꺼내 놓지 않고 지붕 위로 올라가 루핑을 벗기려고 했다. 루핑은 기름칠을 한 헝겊이어서 불이 더 잘 붙었다. 아버지는 다른 집으로 옮겨 붙을까봐 위험한데도 지붕에서 그것을 벗겼다. 사람들은 내려오라고 죽는다고 소리쳐서야 아버지는 내려왔다. 그 사이에 어머니가 아기를 낳으면 기저귀로 쓰려고 했던 고운 천들이 불길 속으로 타들어갔다.

그 얘기를 아버지에게 듣고는 어머니는 한숨만 쉬었다. 없는 돈에 기저귀 천을 사서 잘 챙겨두었는데 하루아침에 재가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와서 판잣집을 보니 더욱 마음만 아팠다. 그 집 주인은 다른 사람들에겐 아무 것도 주지 않았는데 어머니 아버지에겐 젊은 사람들이 알뜰하게 산다고 전셋돈을 일부라도 돌려주고 살 집도 다시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는 큰형을 낳고 백일 되는 날 시댁으로 왔다. 없는 살림에 백일잔치는 꿈도 꾸지 않았다. 큰형 머리 위쪽으로 탁구공만한 혹이 잡혔다. 손으로 만지면 뽀글뽀글거렸다. 어머니는 무척 걱정했다. 이것을 안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야야, 정지(부엌) 들어가는 머리맡에 소금을 주먹만큼 매달아 놓아라. 물 길러 오다가 물동이에 소금이 다 녹으면 낫는다” 하셨다.

물동이와 어머니들의 모습(자료사진)

어머니는 그 말을 믿고 물을 열심히 길러다 큰항아리에 부었다. 어머니 머리에 인 항아리 물이 부엌을 지날 때 소금 든 주머니가 닿았다. 한 달 쯤 지났을까. 부엌에 매단 소금주머니가 비었다. 아기 머리에 있던 물혹도 사라졌다.

어머니는 설 먹을거리를 만드느라 바빴다. 어느 날은 저녁 해가 떨어져서도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집안 큰어머니가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큰형을 보았다. “새댁, 저기 아기 좀 보그라. 어찌 이상하다. 고개를 외로 푹 떨구고 많이 아픈갑다. 일 놔두고 퍼뜩 가보그라.” 어머니는 눈물만 줄줄 흘렸다. “새댁, 니는 벌써 알고 있었나. 그라몬 어서 아기를 봐야지. 저러나 큰일 나는 거 아이가.”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누군가 업고 있는 아기를 받았다.

아기는 자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시어머니는 초롱불을 들고 어두운 밤길을 달려서 침을 놓는 할머니를 데리고 왔다. 아기 몸 이곳저곳에 침을 놓았다. 코와 입술 사이 인중 자리에도 침을 놓았다. 침을 맞아도 아기가 울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기를 폭 안고 있으니 아기 몸이 서서히 따뜻해졌다. 시어머니 말을 듣고 아기를 가만히 방바닥에 누였다. 그래도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남편은 한 번도 아기를 못 봤는데 죽으면 어쩌나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 모습을 본 시아버지는 호통을 쳤다. “아니, 얼라가 죽기라도 했나. 왜 이렇게 울고불고 난리냐!”

설을 쇠러 남편이 왔다. 서울 살림살이를 모두 태워 먹었지만 아들 종하가 태어났으니 괜찮다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경상도 사람이라 그런지 첫아기를 보고도 무척 무뚝뚝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이제 아기가 아버지를 만났으니 할 도리를 다했다고 마음을 놓았다. 오히려 할아버지가 큰형을 애지중지했다. 누군가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떨어뜨리면 소리를 크게 질렀다. “아기 간 떨어진다. 다신 아기 있는 자리에선 밥 먹지 마라.”

설 쇠고 음력 1월 12일에 서울로 떠났다.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어느 할머니가 아기를 보더니 아기가 많이 아파 보인다고 어서 내려서 병원에 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내리자고 했지만 어머니는 밤에 내려서 언제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나 싶어 그냥 눈물만 흘렸다.

서울 청량리역에 내리자마자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 다음 날부터 날마다 병원에 다녔다. 어머니가 워낙 먹은 게 없고 아기 젖도 제대로 못 먹여서 아기는 약골이었다.

어머니는 큰형을 업고 장사를 했다. 아기 있다고 어디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하루는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골목을 돌아다니며 참외를 팔았다. 등에 아이는 업었지, 광주리에 가득 참외는 들었지, 앉지도 서지도 못했다. 겨우 바위에 참외 바구니를 놔두고 쉬고 있는데 어느 건물 경비하는 아저씨가 광주리를 발로 차서 참외가 찻길로 뒹굴뒹굴 굴러갔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등에 업은 아기를 생각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지 다짐을 했다. 참외장사는 그날로 그만두었지만 오이와 호박을 이고 골목장사를 이어갔다.

이승만이 물러나고 박정희가 총을 들고 정권을 잡았다. 어머니 아버지는 이런 혼란 속에서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길에 나서서 군사쿠데타를 반대하며 싸우기도 했지만 당신들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총을 들고서라도 나라를 안정되게 했다고 손뼉을 쳤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박정희 시절에 통장 일을 27년 동안 했다. 아버지가 통장이었지만 어머니가 대신 모임도 나가고 마을 일도 봤다. 어머니는 새마을운동 교육도 일주일을 받았다고 말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만드세 ~” 1961년 총과 탱크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8년 동안 대통령 자리를 지키며 경제개발, 새마을운동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그 틈바구니에서 용케 버티며 살았다.

2013년 1월 28일 날은 조금 풀렸지만 마음은 여전히 차가운 날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필자소개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 93년부터 일하고 있다. 두가지 꿈을 꾸며 산다.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날과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날을 맞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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