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급투쟁과 개인들의 '숭고함'
    노동자 개인들의 결단이 아니라 조직된 노동자운동으로 돌파해야
        2013년 01월 29일 01: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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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종석의 이 칼럼은 대단히 불편하다. 필자 스스로 현재의 상황에 대한 ‘미학적 분석’이라고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편하다. 출구가 막힌 상황 그 자체에 대한 불편함일 수도 있고, 희망버스와 같은 절망을 극복하려는 작은 시도들에 대한 불편한 언급이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의 제기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미학적 분석’이 아니라 ‘실천적 권고와 제언’이라는 점, 그 제언은 조직된 노동자운동의 기풍과 대오가 다시 복원되고 힘을 가질 때 개인적 결단이라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공유했으면 한다.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동지들의 농성 투쟁의 의미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 투사들의 문제제기와 바람은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노동자운동 투쟁의 대오를 다시 세워내는 것에 있다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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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외상적 경험들!

    박근혜가 당선이 되었든, 4대 강이 썩어 가든, 흡정대법으로 온갖 이권들을 삼켜버린 흡사마가 헌재소장이 되었든 삶은 지속된다. 노동자들이 연이어 자살을 하든, 100일, 90일, 60일 고공 농성으로 살얼음 추위와 맞서고 있든 그렇지 않든 삶은 지속된다. 그것이 삶의 위대함이고 처절함이다. 우리는 여전히 노동하고, 책을 읽고, 섹스하고, 술 마시고, 대화하고, 놀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2013년 우리의 삶은 분명 외상적 경험으로 시작되었다. 누군가에게 외상은 독재자의 딸을 당당히 뽑아준 대중들로부터 왔다. 이명박 정부가 만들어 놓은 4년간의 처참한 현실 속에 상처받았으면서도 대중들은 여전히 성장의 신화에 헤어나지 못했다. 대중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그녀를 선택했다.

    대중들은 마치 억압자의 억압에서 쾌감을 느끼는 외설적 충동의 존재인 듯이, 혹은 자신을 납치하고 유린하는 남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소설 [클라리사]의 여주인공처럼, 피억압자들은 억압자의 욕망에 자신의 욕망을 동일시했다. 이것은 분명 무엇인가 변화를 바라던 이들에게 충격이라면 충격일 것이다. 그들은 대중에 대한 기대와 실망, 믿음과 불신, 공포와 연민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이것이 대선 이후 누군가가 겪었던 멘붕의 실체일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노동 현장으로부터 외상적 경험이 왔다. 철탑 위에는 벌써 100일에서 수십일 고공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의 극한적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다른 한쪽에서는 연이어 노동조합 활동가, 해고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살한 것이다. 노동자들의 죽음, 고공농성, 단식투쟁은 한편으로 초월적 용기와 극한적 투쟁에 대한 경외감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결단과, 고통, 그 냉혹함으로 우리를 떨게 한다. 동료의 죽음은 분명 같은 조합원이나 같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나 같이 어정쩡한 위치에서 처다만 보는 이들 또한 삶의 심연에서 그렇게 멀리 서 있지 않다.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보며 한편에서는 자본에 대한 분노가 치밀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지리멸렬한 노동자운동과 진보정당에 대한 자괴감에 휩쓸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지상의 안전한 거리에서 철탑 위의 전사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나는 아직 저렇게 극한적 상황은 아니구나!” 하는 자족과 자기 위안이 교묘하게 교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동자들의 극한적 투쟁은 연민과 공포라는 양가적 감정을 갖도록 하는 기이한 상황인 것이다.

    이 글은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외상적 경험에 대한 다소간 미학적 분석이다. 나는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생각의 나무, 2007)에 의존하여 이 상황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자살, 고공 농성이라는 극한적 투쟁을 ‘숭고’라는 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 숭고로서의 투쟁이 일상적 투쟁이 되어버린 사회적 상황에 대한 스냅사진을 제공한다.

    나는 이 글에서 극한의 상태에 서 있는 노동 형제들을 단지 영웅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노동자 운동과 진보정치의 ‘심연’으로 바라봄으로써, 이 심연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기초적인 방향을 모색해 보려는 것이다.

    숭고, 존재의 심연.

    숭고란 무엇일까? 언뜻 보아 그것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고귀한 존재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 자신이 이상처럼 생각하지만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그 무엇, 우리를 환희와 열광으로 몰아넣지만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대상, 고귀함과 존엄, 경외심이 곧장 숭고의 이미지와 겹쳐 진다. 종교적 희생, 민주화의 화신, 헌신적 봉사자, 민중의 구원자들에 느끼는 경외감이야말로 숭고에 대한 우리들이 갖는 일반적 통념이다.

    그러나 숭고는 결코 그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와 같은 존재를 숭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그의 무차별적인 사랑 때문만은 아니다. 예수가 숭고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신체에 못 박히는 고통을,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극적으로 전시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숭고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의 고귀한 사랑만이 아니라 자기 신체를 파괴하는, 죽음의 충동이라는 인간 존재의 심연을 펼친 것이다.

    이렇듯 숭고의 미란 우리 내면의 불안, 광기, 욕망, 죽음 충동을 보이면서도 한없는 사랑, 무한한 헌신, 초인적 용기가 함께 어우러져 생명의 가치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상에 대해 우리가 갖는 황홀함, 감동이다.

    숭고는 “위험하고 파괴적이며, 황홀하고 착란적인 요소이면서도 우리를 환희에 젖게 하고, 기운을 북돋아주며, 오늘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힘”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숭고한 대상을 통해 우리 존재의 지리멸렬함을 자각함과 동시에 끝없는 힘을 경험하는 것이다.

    신이 숭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인간들이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경외감을 갖는 것은 단지 그의 무한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다. 신은 가차없이 인간을 벌주고 파멸시키고, 전복시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무자비한 폭력과 함께 구원과 영원을 보장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신에 대해 경외감을 갖는 것이다. 신의 존재에 부가된 이 파괴적 속성이야말로 그에 대한 숭고의 이면이다.

    빼어난 보수주의자였던 에드문트 버크는 법이야말로 숭고의 대상이라고 보았다. 법은 우리에게 강제와 국가의 힘을 표상한다. 법은 모든 개인들에게 가차 없이 명령하고 집행한다. 법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질서가 구성되는 근원이다. 그러나 법은 언제나 그 이상이다. 법은 우리에게 삶의 지속성을 보장하고, 인권을 보호하며, 삶의 안정성을 보장한다. 법의 이 따뜻함이 저 무차별적인 강제와 공존하는 것이다. 법은 공포와 자비, 강제와 동의의 균형 잡힌 혼재이다. 법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이야말로 ‘법’이 숭고의 대상이 되는 이유이다. 공포란 숭고의 이면이다.

    부르주아적 숭고는 법과는 다를 것이다. 청교도적인 근면, 성실, 계산은 부르주아적 숭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덕목은 벤자민 프랭클린 같이 아무런 감흥도 흥미도 없는 메마른 인간들의 덕목일 뿐이다. 파우스트야말로 부르주아적 숭고의 전형이다. 부르주아적 숭고는 가차 없는 도전, 모든 낡은 것들을 쓸어버리는 무모함, 성적인 일탈과 광기, 그러면서도 냉정한 이윤의 계산자의 면모에서 느낄 수 매력이다. 냉철한 이성과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이야말로 부르주아적 숭고의 진정한 모습이다. 오셀로와 이야고,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리스는 이런 부르주아적 숭고를 보여주는 쌍생아적인 캐릭터이다.

    비극은 숭고미를 그 자체로 보여준다. 비극은 등장인물의 욕망이 좌절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극적 유희를 제공한다. 비극은 우리에게 주인공의 욕망에 대한 긍정과 그 욕망을 부정하는 세계에 대한 자각을 일깨운다. 비극은 희열(욕망)과 죽음(몰락)을 극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우리에게 교훈과 함께 우리 자신은 그런 비극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안도감을 줌으로써 외설적 쾌락을 제공한다. 비극을 본다는 것은 대상과의 거리를 둔 채 타인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소비하는 경험이다.

    숭고함이란 이성적 사유를 넘어서는 어떤 감정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다가갈 수 없는 고귀함과 함께 두려움, 광기, 죽음 충동을 상기시킨다. 숭고한 존재는 사랑, 정의, 욕망으로 우리 자신의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동시에 죽음의 공포와 외상적 충격, 혼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심연에 감춰진 어둠을 드러내면서도 새로운 긍정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미적 경험이다.

    투쟁으로서의 숭고

    2010년 이후 한국의 정세는 노동 전사들의 숭고한 투쟁이 결정하고 있다. 2011년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투쟁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00명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가 사측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결정된 이후 이에 맞서기 위해 김 전지도위원은 무려 300일 넘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주도했다. 그 와중에 적들의 침탈을 막고 김 지도위원을 보호하기 위해 4명의 투사들이 도중에 결합했다. 김 지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짐으로써 동료 노동자들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범접할 수 없는 결단이었다.

    이후 진행된 희망버스는 2011년 노동정국을 휩쓸었다. 수 십대에 버스에 올라탄 시민들, 노동자들, 학생들은 한편으로 정리해고에 맞서는 대중투쟁으로서, 한편으로는 홀로 싸우고 있는 김 지도위원과 한진 해고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의 의지로서 전국에서 부산 영도로 모여들었다. 그것은 김 지도에 대한 경외감이자, 누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자, 약자와 함께 해야 한다는 연민이었다. 여론이 들끓었고 야당 국회의원들이 방문했으며, 청문회가 열렸다. 한진 사측은 마지 못해 정리해고를 철회하기도 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농성하는 크레인 모습(사진=금속노동자 신동준)

    2012년 노동정세는 고공 농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수년 째 무시하고 있는 현대차 자본에 대한 저항으로서 천의봉 동지 등이 고압전기가 흐르는 철탑에 올라갔고,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복기성 동지 등 쌍차 해고자 동지들도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유성에서도 60일째 고공 농성 중이고 아파트 경비 노동자들도 해고에 대한 저항으로 굴뚝에 올라가 농성하기도 했다.

    2013년은 열사정국으로 시작되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휴직 중이었던 한진중공업 노동자 등 몇 명의 노동자들이 연이어 자살함으로써 옆에 있는 동지들에게, 지켜보는 진보적 시민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권력 교체를 통해 조금이나마 사태를 개조하려던 희망이 좌절과 수년간 반동적인 정권 밑에서 고통이 지속될 것이라는 절망감이 노동투사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고공 농성중인 노동 전사들, 죽음으로 항거한 열사들은 자신들의 신체를 극한의 상황에 놓음으로써 그들이 처한 야만적 현실에 항거하고 있다. 고공농성은 해고당한 자들, 비정규직으로 억압당하는 자들이 스펙타클한 형태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일상의 억압에 침묵하는 시민들, 동료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더불어 그들은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무로 만들 수 있다는 결단을 보임으로써 지배자들로부터 지배권을 박탈시키려고 한다.

    죽음은 다른 어떤 이성적 수단으로서도 이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택한 마지막 방법이다. 열사들의 죽음은 그들의 삶이란 죽음과 다를 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체를 파괴함으로써 더 이상 적들에 의해 조롱당하고, 고발당하고, 사육당하고, 예속당하는 상황을 지속시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죽음은 그 어떤 타협도, 조정도, 협상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이다. 그들은 자기 신체를 무화시킴으로써 이 체제가 더 이상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는 극한의 세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가차 없이 결단했다. 그들은 모든 이들이 부조리하고, 인정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하면서도 그 현실을 침묵하며, 견뎌내며, 굴종하는 이들에게 이 삶이란 그렇게 굴종할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지시한다. 더불어 그들은 침묵하는 다수에게, 착취자들에게, 아무런 문제없이 자본을 찬양하는 이 세계에게 ‘당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비참함’을 눈뜨고 똑바로 처다 보라고 요구한다.

    단식투쟁가와 고공농성자, 자살한 열사들은 이 체제 속에서 자신들의 욕망이 철저히 외면당했다는 것을 스스로 선언한 점에서 비극의 주인공이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한 현실을 초월한 점에서 순교자이며, 생명을 위해 죽음 충동을 불러낸 점에서 존재의 심연을 일깨운 혼돈의 창조자이다. 2011년 이후 한국에서의 계급투쟁은 저항과 자기 파괴, 외상적 흔적과 죄의식이 결합된 혼돈 속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열사들은 죽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인간으로서 자기 존재를 확인 받기 위해 존재의 심연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자아의 치명적 손상은 더 풍요로운 자아의 회복이자 환희의 표현이다. 이들의 존재는 자기 파괴이자 자기 긍정인 것이다. 투쟁으로서의 숭고는 죽음 충동에서 야기되는 대조적 쾌락과 환희를 표현한다.

    이렇듯 계급투쟁, 자유, 해방에의 실천은 언제나 숭고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의 실천은 언제나 현존하는 질서의 파괴이자 자기 파괴의 과정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실천은 권력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요청한다. 질서가 교란되고, 감춰져 있던 억압자들의 폭력은 해방되며, 바지 속에 숨겨졌던 남근은 대낮에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피억압자들의 시체가, 유혈이, 고통이 극적으로 전시되는 것이 바로 자유의 실천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비극의 전장이자 숭고의 세계이다. 자유란 어쩌면 이렇게 축복이자 저주이다.

    우리들은 어떤가? 같은 노조에서 함께하던 동료들은? 그들에게는 앞선 자들에 대한 고마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 동료에 대한 연민이 교차한다. 옆에 있는 누군가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더 없는 공포이며, 아찔한 현기증이자,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이다. 동료들의 구원을 위해 철탑에 올라간 이들은 생명의 구원자이자 공포와 무의 창조자이기도 한 것이다. 외경과 공포, 불안과 죄의식이라는 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동료들에게 폭발시킨 점에서 그들은 또한 혼돈의 기원이기도 하다.

    좋은 시절(벨 에포크), 폐허, 절망

    이 절망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국민 소득이 2만3천 달러를 넘어 사상 최대를 기록한 이 ‘좋은 시절’에 절망감이 왜 존재하는 것인가? 부르주아의 수익은 천문학적으로 되는 이 시절이 어떻게 절망의 세계가 될 수 있는가?

    지오바니 아리기는 [장기 20세기의 역사](그린비, 2009)에서 오늘날을 ‘좋은 시절’(벨 에포크)이라고 했다. 좋은 시절이란 산업적 축적이 이윤율 하락으로 정체되면서 경제의 금융화를 통해 새롭게 성장하는 시기를 일컫는다. 산업에서 물러난 유휴자본은 새로운 금맥을 찾아 나서는데 그곳이 바로 금융이다. 주식, 채권, 부동산, 다양한 파생상품으로 이뤄진 이 새로운 판테온은 온갖 황금의 유혹이 도사린 부르주아의 꿈의 세계이다.

    금융은 투자는 하지 않고, 생산된 부를 나눠 먹는 투기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자산시장은 자금이 유입되면 유입될수록 성장하는 시장이기 때문에 가격의 상승이 오히려 수요를 부추기는 독특한 세계이다. 부르주아들은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의 충실한 동료로서 서로가 서로를 되먹이는 환상적인 투기 전장을 펼친 것이다. 그것은 또한 노동을 통해 생산된 부를 다시 부르주아에게로 전가시키는 수탈의 세계이기도 하다.

    금융의 세계화가 노동의 죽음을 초래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부르주아들은 자본파업을 단행함으로써 일자리를 대폭 줄여버렸고 여차하면 공장을 역외로 이전한다. 금융의 시대는 노동자들에게 정리 해고, 비정규직화, 공장폐쇄의 위협이 일상화된 그런 시대이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자본의 수익성은 더 높아간다. 소득이 2만3천 달러로 사상최대를 기록하면서도 가계소득은 오히려 줄어드는 것이야말로 ‘좋은 시절’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고 지속될 수도 없었다. 서브프라임은 붕괴되어 150년 된 투자 은행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신용부도스왑은 금융체계 전체의 뇌관으로 자리 잡았다. 투기 붐에 편승하여 한 몫 잡겠다고 막차를 탄 중산층 투기꾼들은 부채의 그물망에 사로잡혀 헤어날 수 없게 되었으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초고층 아파트들은 언제 가격이 폭락할지 몰라 조마조마 한 시절이다.

    그러나 이 폐허의 세계는 결코 무의 공간이 아니다. 여전히 백화점은 화려한 상품들로 가득 차 있고, 불로소득자들은 경기호황 때보다 더 잘나가며, 초고층 아파트는 현대의 판테온으로서 자신의 위용을 숨기지 않고 있다. 값비싼 상표는 여전히 청소년들의 선망이며, 부르주아의 인격이자, 모든 이들의 로망이다. 금융자본주의는 분명 최첨단의 위기를 걷고 있지만 상품들로 가득 찬 부르주아의 신세계는 여전히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는 번쩍이는 유리와 빛나는 상품들로 이뤄진 폐허의 공간인 것이다.

    이 ‘화려한 폐허’의 세계가 빛나면 빛날수록 부르주아 유토피아에서 ‘시민권이 박탈당한 자들’의 절망은 더욱더 쌓여갈 뿐이다. 정리해고를 당한 정규직 노동자들, 뼈 빠지게 일해도 빠듯한 생활조차 유지하기 힘든 비정규직 가정들, 취업의 전선에서 절망하고 있는 젊은이들, 전세 값을 마련하지 못해 결혼은 꿈도 미루는 연인들, 경제적 활동으로부터 배제된 늙은이들. 이들은 경제적 시민권을 박탈당한 자들이기 때문에 21세기의 상품유토피아에서 철저히 소외된 인간 군상들이다.

    반면 자본은 이 박탈당한 자들을 저임금, 불안정 고용 체계에 편입시킴으로써 경제호황시절보다 더 높은 착취율을 기록하며 이윤을 축적하고 있다.

    노동자 운동은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없었다. 19세기/20세기 초에는 사회주의라는 대안 체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운동은 파국의 시대를 정면 돌파 할 수 있었다.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20세기 초 사회주의는 정의와 동일한 언어였다. 그러나 21세기의 좋은 시절에는 그와 같은 대응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운동은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를 상실했고, 노총은 찢어지고 무너져서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동정심, 민주노총, 계급투쟁

    단식투쟁, 자살하는 노동활동가는 그들 자신의 신체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을 억압할 수 없도록 억압의 대상 자체를 없애버리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들은 자기 몸에 대한 완전한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몸이 사라진다는 전제하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자기희생 제의는 자신의 몸에 대한 절대적 권능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나 현실 세계에서의 완전한 무기력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서 키릴로프는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자기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는 자는 물론 권능한 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 있는 채로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입 능력도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강자와 약자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들은 죽음을 관장하는 신의 경지에 도달하고 그들의 이념과 가치는 영원성을 획득했지만 그 자신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무의 존재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는 권능과 죽음을 동시에 선사함으로써 ‘숭고의 대상’이 된다.

    남겨진 자들이 느끼는 감정에는 비극을 관람하는 관객처럼 일종의 외설적 쾌락과 유사한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타인의 고통에서 어떤 쾌감을 느낀다. 4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매우 비인간적이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타인의 행복에서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는 반면 타인의 고통에서 자기에 대한 위안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냉정한 현실이고, 거부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진실이다.

    희망버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고, 쌍용차/현대자동자비정규직 노조/한진중공업 사태에 대한 진보적 개입의 형태로 2차 희망버스가 가동되고 있다. 나는 이 희망버스에 탄 동지들의 헌신, 연대의식, 투쟁의 의지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전선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희망버스의 동력은 근원적으로 동정심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시민사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양심적인 시민들이 보여주는 연대의 메시지는 근본적으로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데이비드 흄이 정확히 관찰했듯이 연민이란,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보내는 강자들의 선량한 의식일 뿐이다. 노동형제들의 죽음, 고공농성자들의 투쟁은 우리로 하여금 연민과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나는 아직 저런 상태는 아니구나’라는 묘한 안도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쓰고 있듯이, “우리의 연민과 동정이 아무리 진정한 것이라 하더라도 시련을 겪는 이웃을 볼 때 피할 수 없이 느끼는 내면의 만족감”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동정심은 결코 동등한 위치에서 나오는 연대의식이라 볼 수 없다. 노동자운동은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선량한 시민들의 동정심에나 의존해야 하는 처지까지 몰린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의 근원적 책임은 노동자운동 스스로에게 있다. 노동자운동이 스스로 주체로 서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정세를 돌파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의 숭고한 희생, 선량한 시민들의 동정심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희망버스를 하나의 새로운 투쟁의 전형으로 사고하는 방식에 대해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이 현재 상태에서 가장 유용한 투쟁수단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투쟁이 이렇게 희망버스에 의존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노동운동의 죽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지금처럼 정파 노조화 되어 균열되어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갈라져 있고, 계급적 연대의식이 한심한 수준으로 약화되어 있다.

    민주노총이, 금속노조가, 제대로 된 대오의 형성과 능동적으로 정세해 개입할 수 있었다면 노동자 동지들은 고공농성을, 단식투쟁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고, 연민과 동정심에 의존하는 수세적인 투쟁을 진행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계급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고, 이런 상태에서 노동 전사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투쟁으로서의 자기파괴인 것이다.

    제대로 된 노동자운동의 정립 없이 개별적인 노동자가, 개별 노조가 이 ‘좋은 시절’을 굳건히 견딜 수는 없다. 노동자운동이 지리멸렬 할수록 더 많은 쌍용차, 더 많은 한진중공업, 더 많은 현자비정규직 노조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노동 전사들의 개인의 결단에 의존하는 ‘비극적 투쟁’은 더 많아질 것이다.

    민주노총이 제대로 된 노동자들의 센터로서의 자기정립과 조직 기풍을 만드는 것만이 이런 ‘숭고의 시대’를 진정한 ‘계급투쟁의 시대’로 전환시키는 근본적인 힘이 될 것이다. 노동운동의 건강한 활동가들의 결단이야말로 이 과제를 수행하는 밑걸음이 될 것이다. 현장 활동가들의 강력한 연대를 기대한다.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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