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민주주의의 의미과 출발점
    [사회민주주의 선언-1]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체제
        2013년 01월 28일 04:5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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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2012년) 11월 홍진북스에서 <사회민주주의 선언>를 출판했다. 이 책의 저자는 조원희 국민대 교수와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준비위원이다. 최근 진보의 정체성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는 흐름들이 제기되고 있고, 이미 한국에서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옹호하는 많은 자료와 서적들이 있다. 그럼에도 진보정치의 전망과 관련하여 제기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압축되고 정리된 소개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레디앙>은 했다. 또 다행히 <사회민주주의 선언>을 출판한 홍진북스의 홍순종 대표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이에 <사회민주주의 선언>의 전체 내용을 연재한다. 책 자체가 많은 분량이 아니기에 5회~10회 가량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과 수용 모두 온전히 한국 사회의 진보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이들의 몫이다. 그래서 때로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조건부 수용이나 선택적 비판일 수도 있다. 그런 생산적 논의와 실천적 고민이 있기를 바라면서 게재한다. 홍순종 대표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이 책의 내용을 게재하는 과정에서 비판적 의견 등이 있으면 <레디앙>은 적극적으로 지면을 제공할 생각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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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가 우리를 사회민주주의로 부르고 있다.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는 때로는 무상급식과 보편적 복지로, 때로는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필요에 따라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었다가 다시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무명의 조연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사회민주주의는 온전한 정신(가치관)과 육체(전략과 정책), 손발(조직)을 가진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미래를 향한 역사 무대에 올라야 한다.

    지금까지 이 나라의 진보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주저하고 거부해왔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진보적 자유주의니 평등적 자유주의니 하는 각종 자유주의나 또는 반자본주의 좌파의 품 안에 머무르려 하면서 역사의 부름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때가 왔다.

    모든 나라, 모든 시대가 사회민주주의의 부름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지배에 이은 가난한 개발도상국으로 출발한 이 나라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50년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그리고 짧은 기간 내에 달성하는 세계사적으로 드문 업적을 이루었다. 오늘날 이 나라는 조선과 자동차 같은 중화학공업만이 아니라 전자와 통신 등 최신 산업에서도 세계적 수준의 생산력과 기술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땅의 사회민주주의는 이 나라 남녀 노동자와 직장인들이 청춘을 다 바친 땀과 장시간 중노동으로 이룩해낸 거대한 생산력 발전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이 나라는 기본 인권과 형식적 민주주의 면에서도 미흡하지만 야만적인 독재를 벗어난 나라로 발전하였다. 사회민주주의의 부름은 무수한 투사와 열사들이 독재와 탄압에 맞서 민족해방과 노동해방,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 온 전통과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는 지난 1백년간 우리 민족이 겪어온 고난과 성공, 실패를 모두 감싸 안으면서 이 나라를 사회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인도하고 있다.

    한국에서 사민주의자의 선구자로 해석되는 여운형의 연설 모습(자료사진)

    우리 역사에서 사회민주주의는 낯설지 않다. 해방 정국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한 여운형 같은 인물과 정치 세력이 있었으며, 이들은 민주적이고 자유로우며 모든 민중이 평등하게 잘 사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미소 냉전과 6.25 전쟁, 미성숙한 주체 역량, 근대적 산업 기반의 부재 등 악조건에 부딪혀 시지프스와 같은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반세기에 걸친 산업화와 민주화의 노고를 거친 이후, 역사는 우리에게 사회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라고 손짓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파국

    ‘온 몸에 피와 고름을 뚝뚝 흘리며’ 태동한 19세기 서방의 자본주의는 역사상 유래 없는 문명적 업적과 기술적 진보를 낳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20세기 초중반에 절망과 대립, 두 차례에 걸친 참혹한 세계대전, 그리고 1960~70년대의 황금기를 거쳐 1980년경에 그 1막을 내렸다.

    그리고 20세기 말엽 자본주의의 제2막 1장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급진 우파가 주도하는 체제로 얼굴을 드러냈다. 이 체제는 고전적 자유주의보다 더 거대하고 더 역동적인 기술문명적 발전과 함께 더 통합된 ‘글로벌적 성격’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신자유주의적인 글로벌 자본주의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예외 없는 결과인 양극화를 낳았고 마침내 2008년 이래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붕괴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그리고 이 땅에서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화의 거센 흐름이 지배하였다. 금융자본주의 반혁명은 금융자본의 국제적 이동성을 극대화하여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또한 그것은 20세기 중후반 선진국에서 달성된 복지국가를 상당 정도 해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가능하게 했던 사회적 연대는 물론 노동-자본간 합의 시스템을 해체하였다.

    ‘자본가와 투자자가 수익을 낼 수 있느냐 아니냐’가 기업과 국민경제 의사결정의 최고 가치로 부각되면서 각국 정부는 급진적인 규제완화와 시장개방을 통해 자국의 사회경제적 환경을 국내외 자본가와 투자자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데 몰두하여 왔다. 이는 노동자와 직장인들, 그 가족들에게 적절한 생활임금과 사회보장을 확약하던 복지국가의 틀을 허물었고, 그 결과 전세계적으로 88만원 세대(한국)와 빈털터리 세대(미국), 비참세대(일본), 1천유로 세대(유럽) 등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하는 근로빈곤층을 양산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 부국과 빈국 간 경제적 불평등을 고착화시키고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금융시장 불안정성을 심화시켰으며, 마침내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 체제는 80년 전인 1930년대의 대공황(Great Depression)에 버금가는 대불황(Great Recession)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 위기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진보의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지 퇴보의 징조가 아니다. 맹목적이고 무정부적인 사적 이익에 의해 추동되는 자본주의의 발전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불안정하지만, 역사에서 진보의 씨앗은 반드시 이런 상태 속에서만 태동된다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진보를 향한 역사의 에너지는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만 생성·축적되는 법이며, 자본주의의 발전을 우회하거나 생략한 채 역사가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관과 무관하다.

    신자유주의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던 시대는 2008년 말에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끝났다. 이제 자본주의의 대위기를 맞이하여 인류는 다시금 민주주의냐 자유 시장이냐, 진보냐 퇴보냐, 문명이냐 야만이냐 라는 양자택일 선택의 기로에 섰다. 현재 진행 중인 유럽의 경제위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가 지난 1백년간 피와 땀으로 쟁취하여 쌓아올린 민주주의와 노동권, 복지와 문명의 진지를 유지하고 더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더 이상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에 기댈 수 없으며, 단호히 그 헤게모니를 거부하여야 한다는 점이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과 파국

    그렇다면 세계 자본주의의 제2막에서 이 나라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19세기말 세계 자본주의의 제1막에서는 매우 후진적이고 희망의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마침내 식민지로 전락했던 이 나라가 20세기 말 제2막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는 하나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19세기에 세계의 진보 세력이 갈망하였던 보통선거권과 초중등의무교육, 8시간 노동제 등이 대한민국에서 이미 형식적이나마 대체로 실현되었다. 게다가 젊은이의 80% 이상이 전문대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19세기 유럽 진보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위대한 역사적 성과이다. 또한 이 나라는 기술문명의 측면에서도 세계의 선두에 서 있다.

    우리나라는 비록 구매력 기준이지만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수년 내로 경제력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리하여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소규모 도시국가를 제외할 때, 개발도상국에서 출발한 나라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선진국 문턱에 도달하였다. 물질적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나라는 20년 전부터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와 세계화의 조류 속에 깊숙이 휘말려 있다. 오늘날 우리 민중의 삶은 너무나 고단하다. 빈부격차는 오히려 과거 군사정부 시절보다 더 심해졌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청년들의 대량실업, 급격한 빈곤 증대,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의 만연, 투기의 만연과 가계부채 급증, 출산율저하와 높은 자살률, 황금만능풍조에 따른 사회적 황폐화 등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국적 양상마저도 주변적 배역이 아닌 주역으로서 앞장서서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위기 문제들은 언제든지 화산처럼 터져 나올 듯한 엄청난 불안의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다. 더구나 2008년 이후 세계 경제 전체가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가는 대불황의 위기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항해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머지않아 이 나라 역시 앞으로 문명이냐 야만이냐, 민주주의냐 보수반동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할 것이다.

    민족주의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식민지 예속에 이은 6.25 전쟁의 참화, 그리고 가난과 독재로 점철된 지난 1백년의 역사로 상처받은 우리 민족에게 지금까지 경제 발전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기여해온 것은 민족주의였다. 그리고 민족주의에는 보수적 민족주의와 진보적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 있었다.

    먼저 박정희로 대표되는 보수적 민족주의는 우리 국민이 가난을 벗어나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실현하려면 경제개발과 공업화에 매진하여 자립경제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반공과 자립경제를 국시로 채택한 박정희의 ‘반공주의적 민족주의’ 하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민족주의적 경제개발이 진행되었다. 적어도 경제정책에 국한해 볼 때,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된 박정희식 경제체제는 산업정책과 은행국유화, 외환금융시장 통제 등 각종 제도적 장치를 통해 선진국 자본이 한국 경제를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면서 국내 자본 특히 대자본을 육성하는데는 성공하였다. 그 반민주적, 반노동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민족주의는 한국경제의 자본주의적 공업화에 성공하였으며 그리하여 이 나라를 선진국 문턱까지 다다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지만 진보적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반공적 민족주의와 개발 독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진보적 민족주의는 박정희의 친일 전력과 성급한 한일국교 정상화, 베트남 전쟁 파병 등에서 나타났던 친일·친미적 태도를 시종일관 비판했으며, 또한 경제성장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마저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을 감시하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진보적 민족주의는 이 나라에 있어 친일 매판세력의 척결과 민주주의 및 인권의 신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들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의 한계는 분명했다. 이들은 경제개발 전략으로 외국자본과 외국 기술, 외국시장에 의존하는 의존적, 종속적 공업화를 비판하는 ‘민족경제론’의 입장을 견지했지만 오늘날 명백하게 판명된 바와 같이, 박정희 체제의 반공 보수주의적인 정부주도형 공업화는 한국경제를 자립적 자본주의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오히려 ‘민족경제론’의 입장과 궤를 같이한 북한의 경제개발은 실패로 끝났다.

    보수적 민족주의건 진보적 민족주의건, 후진국 민족주의는 방어적이며 부정적인 사상이다. 따라서 이 나라가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이 시점에서 앞으로 문명적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정치적으로도 더욱 굳건한 민주주의를 구축하고자 한다면, 개발도상국 단계에나 유효했던 민족주의적 사고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적-민족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집권한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집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민주화 세력 및 진보적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그리고 그 민주 정권에 참여한 민주화 세력과 진보적 민족주의 세력은 남북화해와 정치적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는 박정희 체제의 유산을 부정하는 것은 모두 선(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한국경제의 시장화, 자유화에 스스로 앞장섰다. 그들은 IMF와 미국정부가 요구한 것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한국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 즉 ‘자유 시장화’의 물결 속에 빠뜨렸다.

    그 정부들을 지지했던 학자·지식인들은 이러한 자유주의화, 즉 시장화를 ‘진보’의 이름으로 미화시켰던 바, 그것이 바로 ‘진보적 자유주의’이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정신과 이념은 민중의 삶을 개선하는데 무능하거나 오히려 악화시켰다는 것이 지난 민주 정부의 실천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는 그 정부들의 정통적 후계자인 오늘날 민주통합당의 모습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미국의 정치경제 사조의 영향을 직접 받아온 우리나라에서 민주통합당의 정신과 이념은 미국 클린턴·오바마 민주당의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김영삼 정부, 그리고 김영삼 정부를 계승한 이명박 정부 등 보수정권은 어떠한가? 이명박·김영삼 정부를 이끌어온 정신적 지주는 ‘보수적 자유주의’였으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레이건과 부시로 대표되는 미국 공화당의 정신과 이념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레이건과 부시, 마가렛 대처로 대표되는 정치경제 사조를 신자유주의라 지칭한다.

    1990년대 초반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가 ‘군부 독재 유산의 해체’와 ‘박정희 경제체제 유산의 해체’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제시한 이래, 정부 주도 자본주의는 악(惡)이고 시장 주도 자본주의는 선(善)이라는 잘못된 구도와 사고방식이 한국의 개혁 세력과 진보 세력에게 깊이 침투하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역시, 그들 스스로 정부를 장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주도가 아닌 시장 주도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하여 고군분투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민주정부가 아닌 시장에 넘어갔다.

    이 모든 일이 ‘개혁적 진보’와 ‘개혁적 자유주의’,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진보적 민족주의’의 이름하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 민주 정부의 집권기에 진보 혹은 범민주화운동 세력 중 상당수가 그 ‘자유주의 개혁 정권’에 몸소 참여하여 신자유주의적 경제사회 개혁을 이끌었으며 그리하여 진보를 희화화하는 일에 일조했다.

    진보적 자유주의와 민족민주 자유주의의 한계

    그런데 ‘시장 주도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한국 진보 세력의 자본주의 비판 정신을 마비시키고 있다. 즉 ‘공정한 시장질서’, ‘공정하고 착한 자본가’, ‘공정 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은 진보적 자유주의 또는 평등적 자유주의 같은 각종 자유주의적 담론의 진보적 유효성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것은 빌 게이츠 또는 스티브 잡스 같은 착한 자본가들이 미국 리버럴의 미래 비전인 것처럼 우리의 경우 문국현 또는 안철수 같은 착한 자본가들을 한국 리버럴의 미래 비전으로 포장하게 만드는 신념의 뿌리로 작동한다.

    더구나 민족·민주 진보 세력의 상당수는 여전히 구시대적인 반제·반봉건 민족해방·민중민주 혁명론(NLPDR)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이들은 마치 한국 자본주의가 1960~70년대에 머무르고 있는 양 착각하면서 민족자본가, 양심적 자본가로 미화된 중소벤처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 즉 민족민주 자본주의, 민족민주 자유주의 체제를 만드는 것이 한국 진보의 과제인양 착각한다. 민주주의적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민족민주 자유주의자들’은 공정한 시장질서와 공정한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공정 시장 자본주의’의 잠재적 가능성을 신뢰한다.

    이에 반해 사회민주주의는 공정 시장 자본주의의 잠재력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아무리 착하고 공정하다 할지라도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빈익빈 부익부의 체제이며 정의롭지 못한 체제이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같은 착한 자본가들의 모국인 미국 자본주의가 선진국 중 가장 빈부격차가 심하며 복지국가가 취약하다는 점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의 정신없이, 사회민주주의를 논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공정한 시장질서’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해 여전한 신뢰를 보내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민족민주 자유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렇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사안에 따라 다양한 진보적 자유주의 또는 사회적 자유주의와 협력할 수 있다. 즉 사회민주주의는 다양한 진보적 자유주의가 보수주의 및 신자유주의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 참여민주주의와 시민적 노동권 및 복지권 등을 지지하는 한에 있어 그것과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회민주주의는 다양한 진보적 자유주의가 가진 근원적 한계를 늘 잊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든지 사회민주주의와의 협력을 저버리고 신자유주의의 협력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경계하고 비판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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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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