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당에 예속된 노동조합 탈피
    [현대 인도 인민의 역사]노동조합과 노동자 투쟁(1)
        2013년 01월 28일 12: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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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의 노동조합의 출발은 반영 민족운동을 이끈 조직으로부터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매우 정치적인 성향을 띠어 왔고, 민족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민족운동을 이끌던 세력이 독립 정부를 이끌었으므로 친정부의 입장을 취했다.

    처음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것은 신지협회(Theosophical Society)라고 하는 힌두교 민족주의 계열의 한 단체에서 1918년 현재의 첸나이(당시 마드라스)에서 조직한 것이 최초다.

    그것으로 기점을 삼으면 인도에서의 노동조합의 역사가 무려 100년이나 된 셈이다. 1920년에는 그때까지의 친영(親英)의 입장을 폐기하고 반영의 입장을 대중적으로 주창한 급진파 민족주주의자의 한 사람인 랄라 라즈빠뜨 라이(Lala Lajpat Rai)가 주도한 전인도노동조합회의(AITUC)가 결성되었다 (인도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이끈 인도국민회의는 그 초기에는 철저히 친영의 입장이었다. 영국의 근대화를 수용하고, 건의 등을 통해 수탈을 줄이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한국의 경우에서와 같은 반식민-반제국의 경향은 영국이 인도를 떠나는 날까지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 정부가 노동조합을 법적으로 인정한 것은 1926년의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국 정부가 노조를 파트너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노조야말로 식민 지배를 전복시킬 가장 적대적인 세력으로 인식하였다.

    그 후 노조의 파업을 통한 투쟁은 지속되었고, 노조 투쟁과 연계하여 투옥된 인사들이 수가 갈수록 늘어났고, 그들의 형기 또한 점차 장기로 바뀌었다. 라이를 비롯해 네루, 보스(Subhas Chandra Bose), 찟따란잔 다스(Chittaranjan Das) 등 당시 투옥된 민족주의 인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노조 운동과 연계되었다.

    그 후 전인도노동조합회의는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노선 갈등을 겪으면서 분열을 거듭하다가 1934년 적(赤)노조회의(Red Trade Union Congress), 1938년에 인도노동조합연맹(Indian Trade Union Federation)를 다시 통합하게 된다. 이후 1945년에 전인도노동조합회의는 공산당의 산하 조직으로 연계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전국 단위의 중앙 노동조합은 12개 있는데 그 가운데 대부분이 특정 정당과 밀접한 관련을 갖으면서 산하 조직으로서 활동한다.

    노동조합과 정당의 세트화

    현재 대표적인 중앙 노조는 인도공산당 산하의 전인도노동조합회의 외에, 독립 후 집권당이 된 회의당이 공산당 노조에 대항하여 조직한 인도민족노동조합회의(INTUC), 199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세를 불려 일약 회의당과 더불어 2대 정당이 된 힌두 근본주의 정당인 인도국민당 계열의 인도노동자단(BMS), 인도공산당(M) 계열의 인도노동자중심(CITU) 등이 있다. 이외에도 각 주에 있는 여러 주 정당과 연계된 상급 노조들도 있다.

    2011년 AITUC와 CITU가 공동으로 개최한 노동절 집회

    정당이 파편화 되어 있는 만큼 노조도 파편화 되어 있고, 정당끼리 정쟁이 심해지는 만큼 노조 간의의 갈등 또한 첨예해진다. 그러면서 노조는 노동자로부터 멀어지고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가 주 정부이든 중앙 정부이든 노조의 상급 정당이 집권 여당이 되는 경우, 당에서 노조에 대한 정책을 입안하는 경우 당과 연계된 노조에서 그 안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1995년 회의당이 집권을 하였을 때 당에서 입안한 노동자 연금안에 대해 인도민족노동조합회의(INTUC)는 반대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당에 대해 수정을 기대하는 소극적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그 안에 대해 반대를 했던 것은 다른 노조들이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각 노조 간에 불협화음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노조에 대해 바라는 것은 자신이나 당을 위해 지지를 확산시키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들이 노동자들이 권익을 위해 같이 투쟁한다거나 그것을 위해 사용자들의 권한을 흔드는 일에 앞장서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전적으로 노조가 당의 정치를 위해 앞장서 온 전통의 결과였다. 이러한 추세는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는데, 1980년대 중반 이후 노조가 당의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의 경우에도 일정 부분 상통한다.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의 자주파가 상위 정당 노릇을 하고 민주노총이 그 산하 노조 역할을 하는 구조가 인도에서의 그 관계와 비슷하다고 해도 크게 어긋난 소리는 아닐 것이다. 심지어는 민중연대 라는 이름의 시민 운동 단체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위계적 구조 및 정당의 정치 행위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행동을 해 온 구조가 과거 권위주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데는 상당한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그 후 시민들의 지지를 잃고 나아가 진보 진영의 몰락이 오게 되는 것에도 상당한 타격을 가한 것이 사실이다.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시대의 변화를 간파하지 못한 그 정파성의 한계 때문이다.

    독립 이후 인도는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공기업이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이에 따라 노조도 공기업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그래서 노조 지도부의 절반을 외부 인사로 영입하는 일이 가능했고, 그 때문에 정치인들이 주요 공기업 노조 간부직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노동조합이 움직이는 경향이 강했다.

    여기에다 전통적으로 인도 사법부는 약자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에 노조와 사용자가 충돌하여 재판으로 갈 경우 법원의 판결이 노동자에 유리하게 나는 경우가 많아서 노사 갈등이 조정되거나 중재되어 완만한 합의를 이루는 경우보다는 재판으로 해서 일방적 판결로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인도의 노조는 강성 일변도가 되었다. 인도의 노조는 전통적으로 정당과의 연계가 강하고, 강성이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인도의 노조의 성격을 규정하는 두 가지 기본 바탕이다.

    노조가 정당과 깊게 연계된 것은 인도 전 지역에 해당하는 문제로서, 공산당이 처음으로 정권을 잡은 께랄라나 서벵갈 같은 곳에서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께랄라의 경우를 보면, 그곳은 다른 곳과는 달리 공업화가 많이 진전되지 않은 곳이고, 그래서 노조의 기반은 절대적으로 농업 노동자였다. 그들은 매우 잘 조직되어 있었으나 그 조직은 거의 공산당이라는 정치 집단의 영향력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어김없이 절대적으로 정당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노동자나 노조의 이익 및 관심과 정당의 이익 및 관심을 따로 분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조와 정당의 유착으로 인한 노조의 정치 집단화는 외부로부터의 투자를 봉쇄해버린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이것이 께랄라가 사회 자본은 충실하게 잘 쌓았으나 경제 발전을 이루지 못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노동조합의 정당으로부터의 독립 움직임

    하지만 노조-정당 연계의 전통은 1982년 뭄바이에서 일어난 노동자 총파업 이후 서서히 바뀌게 되었다.

    총파업은 당시 뭄바이 최대 산업인 섬유 산업 공장 노동자들에 의해 1월 18일부터 일어났는데 50여개의 공장에서 25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하였다. 총파업이 강경하게 전개되면서 사업장이 80여개가 폐쇄되었고, 약 15만 명의 노동자가 실업 상태에 빠져들었고, 뭄바이의 섬유 산업은 거대한 타격을 받아 크게 위축되었다.

    집권 여당이 한 일은 노동자의 권익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적자 경영을 하는 공장을 폐쇄하는 것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각 노조 지부를 총괄하는 상급 노총 지도부는 자신들이 정치적 입지만 강화시키려 하였을 뿐,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급여 인상으로부터 출발했으나 결국 상급 노총에 대한 반감이 훨씬 커졌고, 상급 노총과 결별하였으며 이후 정치적 독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점차 크게 터져 나왔다.

    이 사건은 노조 총파업에 의해 봄베이라는 거대 상업 도시가 폐허가 된 결과를 가져왔다. 노조의 대응이 비록 정당한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경제 도시 봄베이가 폐허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의 책임은 노조의 강경 대응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노동운동사에 나타난 현상이지만, 노조의 급진적인 대응은 바로 노조 운동의 위축으로 나타난다. 시민들이 대거 등을 돌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역사의 의미는 아니다.

    노조의 힘이 크게 위축되고 도시가 크게 황폐화 되었지만, 이 사건은 한 가지 의미있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인도 노동운동사에 획기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우선적으로 파업 이후 사업주들의 노동자 착취가 크게 줄었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그 피해를 막중하게 입었으나 이후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희생으로 덕을 크게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생긴 가장 큰 의의는 인도 노동사에서 노조가 정당의 입김에서 벗어나 오로지 노동자의 경제적 문제를 위한 독자적 저항에 나서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한 결과는 총파업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나왔다. 파업이 심각하게 전개되면서 노조는 상급 정당의 정치 노선에 전혀 휘둘리지 않았고, 그 독자적인 움직임에 당시 집권당인 회의당을 비롯한 모든 정당은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초기 충격파에 쌓인 정당 지도자들은 노조 총파업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려 하였으나, 파업 지도부는 노조 안에 정치국을 신설하여 그들 정치인들의 간섭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 사건이 끝난 후 노조는 정당의 입김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점차 생겨났다. 그러면서 노조는 정치적 파업에서 벗어나 고용과 임금 등 실질적인 노동자의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눈앞의 현상은 비록 반동적으로 진행되지만, 먼 역사의 차원에서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경우가 많다. 인도 노동운동에서 봄베이 투쟁이 바로 그 경우다. 노동자가 노동의 문제에 천착하게 된 것은 그 어떤 출혈을 해서라도 얻어낼 만한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통합진보당이 민주주의에 역행하면서 진보 정당으로서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 버린 비극적인 일이 2012년에 일어났지만, 역설적으로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과 결별함으로써 더욱 노동 현장의 사업을 독립적으로 정파의 이익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긴 역사의 의미로 볼 때는 의미 있는 일이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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