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락한 대학에서 희망은?
    김예슬 선언에 대한 단상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3년전 그 사건 다시 생각하며
        2013년 01월 28일 11: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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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3월 10일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던 김예슬은 김예슬 선언이라고 불리게 된’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고 1인 시위를 한 후 고려대를 자퇴해 버린다.

    당시 여러 언론이 이 사건을 다루었으며 인터넷에서는 ‘김예슬 선언’이라는 토론 카페가 생기도 하였다. 그 후 김예슬은 이 선언의 내용을 좀 더 상술한 책 <김예슬 선언-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를 낸다.

    <김예슬 선언>을 읽고 난 후의 나의 단상을 적으려는 이 글은 ‘문학으로 읽는 우리시대’라는 이 난의 표제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예술적 창작문학만을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관례에 의하면 <김예슬 선언>은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의 원래 뜻이 배움을 주는 좋은 글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나는 이 책이야말로 제대로 된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자퇴를 선언하고 1인 시위 중인 김예슬

    김예슬의 선언이 나올 당시에는 이 선언이 대단한 파장을 일으켰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김예슬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대학 자체에서는 더구나 별 반응이 없었다. 극소수의 몇몇 교수가 부끄럽다고 고백하는 것을 읽어본 적은 있지만 수만 명에 이르는 한국의 대학교수들이 집단적으로 어떤 의견을 내거나 행동을 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나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고 그래서 부끄럽다. 대학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리고 3년쯤 지난 지금 김예슬 선언 같은 것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버렸다. 이 글은 김예슬이 제기한 문제를 다시 그리고 계속 생각해 보자고, 김예슬의 선구적인 행동을 본받자고, 그리고 김예슬 만큼 용기가 없다면 적어도 김예슬 선언에 동조하는 말이라도 해 보자는 글이다.

    김예슬은 이 책에서 명문대 학생인 자신이 경쟁의 트랙에서 자신보다 앞질러 나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도 친구들을 넘어뜨리고 제치면서 기뻐하는 우수한 경주마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경주마의 경주는 끝나지 않을 것임을, 끊임없이 새로운 경주가 주어질 것임을 이제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끊임없는 경쟁이 자신과 친구들을, 우리 모두를, 인간 자체를 말살하고 있으며 그 말살 행위를 대학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예슬은 이 책에서 경쟁에 내몰린 20대의 관점에서 사회, 대학, 국가, 그리고 자본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예슬이 이 책에서 분석하고 주장하는 내용은 전문지식인의 관점은 아니다.

    그러나 김예슬은 어느 전문지식인도 하지 못하는, 아니 사실은 전문지식인이 하려 하지 않는 일을 이 책에서 하고 있다. 대학과 사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폭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김예슬의 다음과 같은 말만큼 현재의 대학의 실체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말을 어느 전문가의 글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다.

    탐욕 사회의 작은 축소판이 되어 맹렬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된 대학, 거대 규모로 몸집은 커지고 돈이 있어야 교육도 연구도 최신식 건물도 가능하기에 국가와 시장 앞에 비굴해진 대학, 진리의 입은 닫고 자본을 향해 입을 쩍 벌린 공룡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 돈이 되는 학생들을 입 속으로 집어삼키고 있는 대학, 학생들의 눈치는 보지도 않는 대학, 취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과목이라고 평가되어 자기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만을 두려워하는 교수와 대학. 대학은 이제부터 차라리 진리의 전당이기를 당당하게 포기하고 취업고시학원이라고 천명해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취직도 안 된 청년들을 리콜하든지 손해배상하든지 해야 하지 않은가.

    (<김예슬 선언> 중 ‘자격증 장사 브로커 대학’ 일부)

    대학에 대한 김예슬의 위와 같은 진술은 교수들에게서는 나올 수 없다. 대학 교육을 책임지는 교수야말로 대학에 대하여 할 말이 많아야 하지만 교수들은 대학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

    교수들은 대학의 실상에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자기 자리를 보전하며 전문가 행세를 할 수 있다. 사익을 위하여 대학을 운영하는 이사장과 총장, 그리고 자본과 국가권력에 충실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는 대학의 교수들은 대학의 실상이 드러날 때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대학이 원래부터 이러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의 역사를 볼 때 대학이 항상 순수했던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며 바람직한 인간을 키우는 대학 원래의 목적에서 현재같이 벗어난 적은 없었다. 학생들은 진리를 알기 위하여 대학에 갔고 교수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대학의 교육과 학문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합의가 있었다. 공공성을 위하여 대학의 교육과 학문은 자율성이 보장되었다. 또한 대학의 공공성이 확보되도록 대학의 재정은 정부가 책임졌다. 이런 구조에서는 대학의 학문과 교육에서 사익이 들어설 여지가 별로 없었다.

    대학의 타락은 식민지적 상황 때문에 공적 기구의 지원을 받기 어려워서 사립대학을 세울 수밖에 없었던 초기의 미국 대학 모델이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파급되면서부터 본격화된다.

    돈을 들여야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본전을 뽑겠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것이고 이렇게 되면 대학 교육은 투자가 된다. 또한 돈 많은 개인이나 기업이 연구비를 마련해주면 그 연구는 돈 많은 개인과 기업을 위한 연구가 된다. 사립대학 모델은 필연적으로 대학을 돈이 지배하는 시장이 되게 한다. 한국의 대학은 이런 미국식 사립대학 모델이 극도로 타락한 결과이다.

    타락한 대학은 통합된 지식을 갖춘 전체적 인간이 아니라 돈을 잘 버는 전문가 양성을 목표로 삼는다. 학생들은 돈을 더 주는 직장을 찾기 위해 스펙을 쌓고 교수들은 돈을 더 잘 버는 전문가로 행세하기 위해 연구를 한다.

    그 스스로가 자본 권력이기도 한 대학의 경영진은 외부의 자본권력인 기업에 필요한 인력 양성을 대학 운영의 최고 목표로 설정한다. 전문 지식인 양성이라는 대학의 교육 목표는 사실상 윤활유가 잘 칠해진 기계의 부품을 생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전문 지식을 강조하는 대학에서 통합적 안목으로 사람과 사회와 자연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교육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분업 생산 체제에서 공장 노동자가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가듯이 전문 교육이 강조되는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들은 스스로 자본주의 체제의 부품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대학이 돈의 노예가 되는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칠 때 그리고 아예 노예라는 의식조차 없는 기계의 부속품이 되라고 할 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이를 거부하여야 한다. 김예슬은 인간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현재의 대학을 거부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실제로 고려대라는 명문대를 자퇴함으로써 이를 실천한다.

    현재의 대학과 사회에 대한 김예슬의 저항은 단지 대학을 거부하는 행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김예슬은 김예슬은 인간을 파괴하는 대학이 없어진 자리에 인간의 삶이 살아있는 새로운 대학을 꿈꾼다. 다음은 김예슬이 꿈꾸는 대학의 한 모습이다.

    우리 대학은 입학시험이 없다.

    우리는 졸업장도 자격증도 없다.

    당연히 교수도 캠퍼스도 없다.

     

    입학시험은 없지만

    진정한 자신을 살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이 필요하다.

    졸업증과 자격증은 없지만

    일생을 함께할 자신감과 좋은 벗들이 주어진다.

    교수는 없지만

    숨은 현자와 장인과 세계의 토박이 지성들이 우리의 교수다.

    캠퍼스는 없지만

    온 국토와 지구마을과 삶의 현장이 우리의 캠퍼스다.

     

    교과목은 다음과 같다.

    발목이 시리도록 대지를 걷고

    계절의 길을 거닐며 야생자연을 탐험한다.

    자기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 치유할 줄 아는 건강법을 익힌다.

    지감각을 되살리고 민감한 감성으로 절정체험의 순간을 느낀다.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가꾸며

    적은 소유로 기품있게 사는 법을 익힌다.

    우정과 사랑의 기쁨을 누리고

    슬픔과 고통을 다루는 삶의 기술을 배운다. (<김예슬선언> 중 ‘이런 삶의 대학 하나 세우는 꿈’ 일부)

    김예슬은 위의 말에 덧붙여 새로운 대학에서는 지식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도시와 농촌을 다 아우르는 총체적인 삶, 불의를 거부하고 평화를 공유하는 삶 등을 배운다고 한다. 학사운영 원칙으로는 사람이 중심이고 행복하고 사이좋게 삶을 꾸려가는 대학이 되어야 한다고 밝히기도 한다.

    김예슬이 꿈꾸는 대학은 돈을 위한 대학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대학이다. 바로 나를 위한 대학이며 우리를 위한 대학이다. 이런 대학이 현실화될 때 대학, 국가, 자본의 삼각동맹으로 인간성을 파괴하는 타락한 대학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김예슬이 꿈꾸는 대학이 가까운 미래에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유토피아의 꿈이 그러하듯 김예슬이 꿈꾸는 대학이 소중한 것은 이 미래의 대학이 현재의 대학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알려주는 가늠자가 되며 또 현재의 대학이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이 되기 때문이다.

    김예슬은 그의 선언에서 대학과 자본이 공모하는 거대한 탑에서 자신이 나와 버림으로써 하나의 돌멩이가 빠졌다고 한다. 돌멩이 하나 빠진다고 그 탑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탑에서 빠지는 돌멩이가 하나가 아니고 열, 열이 아니고 백, 백이 아니고 천개가 이곳저곳에서 빠지면 그 탑은 무너질 것이다.

    이 책에서 김예슬은 자본에 복무하는 현재의 타락한 대학이라는 탑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대학을 세우자고 말하고 있다. 새로운 대학을 세우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반드시 김예슬같이 대학을 그만두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김예슬만큼 용기를 낼 수 있다면 더 없이 좋다. 그러나 그만큼의 용기가 없더라도 대학이 타락했다고, 대학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인간다운 삶을 대학이 열어 주어야하지 않느냐고 끊임없이 외치는 일에 우리 모두가 함께 한다면 타락한 대학은 무너지고 새로운 대학이 세워질 것이다.

    필자소개
    민교협 회원,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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