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기]의 '시차적 관점'
    [서평] 『유방』(사타케 야스히코/서해문집), 『시차적 관점』(슬라보예 지젝/ 마티) 등
        2013년 01월 26일 12:5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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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현상을 동일한 차원에 배치하는 허상은 칸트가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부른 것, 상호번역이 불가능하며, 어떠한 종합이나 매개도 불가능한 두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일종의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현상들에 대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가상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두 층위 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성립하지 않으며 어떠한 공유된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일치한다 할지라도 말하자면 그것들은 뫼비우스 띠의 상반된 양면에 있는 셈이다.-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졈] 중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는 사마천(司馬遷)이 부친 사마담(司馬談)의 업무를 이어받아 전한(前漢) 왕조 중엽인 서기전 1세기 초 무렵에 완성한 중국 통사(通史)인데, 편년체(編年體)가 아닌 기전체(紀傳體) 서술의 시초이다.

    즉, 편년체로 불리는 대부분의 통사들의 연대기적 사건 나열과는 달리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 등으로 역사서술을 구분하여 씨줄과 날줄을 엮듯 사건과 인물들을 교차하여 다각적인 역사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 역사에서 통일신라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또한 사마천 [사기]의 기전체를 그대로 본떠 그 당시까지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물론, 역사를 보는 시각은 많이 다르지만.

    ‘본기’는 ‘오제(五帝)’로부터 시작하여 사마천 당시의 한무제 까지 황제의 역사를 편년체 식으로 다루고 있고, ‘표(表)’는 말 그대로 역사 연표이며, ‘서(書)’는 예(禮), 악(樂), 봉선의식 등의 문화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마천의 독특한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서 ‘세가(世家)’는 제후들의 역사, ‘열전(列傳)’은 천하에 명성있는 개인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열전’의 마지막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는 글쓴이의 역사관과 심경 등을 나타내고 있는데, 궁형을 받은 상황에서 부친의 업을 이어 [사기]를 서술한 사마천 본인의 심경은 물론, 부친 사마담이 못다 이룬 역사서술을 완성한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자기 이야기인 ‘自序’에서 ‘태사공(太史公)’은 사마천 자신이라기 보다는 부친 사마담이다.

    [사기]는 역사서로서 당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사기]에서 가장 주요한 대목이 바로 한(漢)나라의 창건과정을 다루는 ‘초한전쟁(楚漢戰爭)’의 기간인 바, 한나라 시조인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다룬 ‘고조본기’, ‘항우본기’의 기록이 그 부분이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초한지(楚漢誌)]의 기본 뼈대이다.

    중국 역사에서 ‘서민황제’는 공식적으로 두 명이 있다. 유방은 풍읍 패현 출신의 건달에서 통일중국 황제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인 바, 중국 역사 최초 서민황제이다. 두 번째로 약 1세기 이상 지난 후 명(明)나라를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은 ‘서민황제 2호’로서 유방과 같은 패현 출신이나 건달 우두머리격이었던 유방의 ‘가문’에 비해 다 쓰러져가는 농가의 자식이었으므로 ‘빈민황제’에 더 가깝기는 하다. 당나라 말기 후량을 건국하여 장안 일대를 잠시 평정했던 주온 또는 주전충도 서민 출신이기는 하나 황제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고, 또다른 ‘황제’ 모택동도 서민 출신 아니냐고 하는 시각도 있기는 하다.

    어쨌든, [사기]는 후한(後漢) 시대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로 계승되는 한나라 정권의 역사서로서 유방의 건국과 창업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는 시각으로 쓰여진 면이 농후하다.

    아니, 그렇게 역사 속에서 수정되어 왔을 것이다. 관변 언론의 이러한 역사서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한서]의 경우 [사기]에 없는 내용은 없고 한나라 고조 유방에 관한 한 철저하게 미화하고 있는 반면, [사기]의 경우에는 고조본기, 항우본기, 뿐만 아니라 동시대 제후들의 세가 또는 열전을 보면 모순되는 서술이 자주 보임으로 인해서 정권 미화의 시대적 압력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역사 그대로를 보여준다고 한다.

    하나의 예로, 유방이 항우를 죽이고 초한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해하 또는 진하’의 결전 후 제왕(齊王) 한신의 군대를 접수한 사건을 보자.

    ‘고조본기’에서는 ‘해하 또는 진하’의 결전으로 “참수가 8만 급, 드디어 대략 초 지방을 평정했다”고 기록하면서 초군이 사방으로 흩어진 후 유방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패잔병을 추격하여 노(魯)나라 지방에 이른 후 정도(定陶)라는 곳으로 돌아와 한신의 지휘권을 박탈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조본기’는 “정도로 돌아와 말을 달려 제왕(한신)의 성에 들어가 그 군을 빼앗았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한신의 일대기인 ‘회음후열전’에는 “항우가 깨진 뒤, 고조는 기습하여 제왕의 군을 빼앗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누구라도 후자인 ‘회음후열전’이 더욱 사실에 가까움을 짐작할 수 있다.

    한신(韓信)이 누구인가. 항우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여 유방군에 가담했으나 유방 또한 신임을 주지 않음에 실망하여 도망쳤지만 유방 정권 제1 공신 소하의 인정을 받아 유방군 지휘권을 얻어 옛 주나라 본지라 하는 삼진은 물론 제나라까지 평정함으로써 바야흐로 유방, 항우와 함께 천하를 삼분할 수도 있었던 인물 아니었던가.

    또한 한신군은 신병들을 모집하여 강군으로 양성 후 여러 전쟁에서 참패하여 자신의 군영으로 도망친 유방에게 그 훈련된 병력을 주고 자신은 또 다시 신병들을 이끌고 출전함으로써 유방군의 병력에 있어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았다.

    이러한 한신의 참모 괴통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한신에게 권하였음에도 정치적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실무적인 인물이었던 한신은 이를 거절하고 유방을 위해 혼신을 다하여 공을 세웠고, 결국 제왕에서 회음후로, 즉 왕에서 제후로 격하되다가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명언을 남긴 채 반역죄로 죽임을 당한 인물이었다.

    항우를 제압한 유방에게는 최대의 적수가 아닐 수 없었으므로 유방은 필연적으로 한신을 제거할 수 밖에 없었으며 애초부터 계획적으로 한신의 병력을 접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기]는 ‘고조본기’가 아니라 ‘회음후열전’을 통해 유방의 한신 ‘기습작전’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식과 서술에서 유물변증법과 ‘시차(視差,Parallax)’의 관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시차(視差,Parallax)’란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고차원적인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시차적 간극이라는 개념은 결코 변증법에 되돌릴 수 없는 장애물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그 전복적 핵심을 간파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를 제시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이러한 시차적 간극을 적절히 이론화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해 필수적인 첫 단계이다. –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중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하기 위하여 기존 헤겔식의 정반합적 구조를 해체하고 애초부터 다른 기반에 입각한 시각들의 끊임없는 긴장과 그 속에서의 관계정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각을 전제로 하여 철학, 과학, 정치 분야에서 각 사안들을 다루고 있는 바, 변증법적 유물론의 도식화를 철저히 배제한다.

    슬라보예 지젝에게 이전 마르크스주의 도식화는 문학과 영화, 뮤지컬 등의 구체적인 분야에서 전반적으로 해체되며 항상 새롭게 분석되어야 한다.

    역사서로서 [사기]를 보는 유물론적 해석은 이렇다. 본기와 세가, 열전을 넘나드는 서술의 모순과 불일치는 사마천의 원래 의도 여부와는 무관하게 [사기]가 하늘이 내린 한나라 정권의 합리화의 도구도 아니고 확인불가한 역사적 사실 그대로의 기술도 아닌, 춘추전국시대와 진(秦)나라를 거쳐 동양적 봉건양식을 넘은 중앙집권적 군주제 확립이라는 ‘경제발전단계’의 필연성을 토대로 하여 역사 속에서 내재된 다양한 해석과 관점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닐는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방법론에 관하여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에 관하여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방법론은 사건을 실제로 그러했던 바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혁명의 현실과 그 마지막 결과에서 배반된 숨겨진 잠재력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요점은… 어떻게 이렇게 배반된 급진적 해방의 잠재력들이 역사적 유령들로서 끈질기게 ‘존속’되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혁명적 기억을 일깨워 그 실현을 요구함으로써 이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또한 이 모든 과거의 유령들을 구원하도록(영면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중

    다시 [사기]의 초한전쟁으로 돌아가자. 유방과 항우로 대표되는 영웅들의 천하쟁패는 이후 중국의 여러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후한 말기의 황건농민반란을 거쳐 위촉오(魏蜀吳) 삼국전쟁, 위진(魏晉) 이후 5호16국은 이민족의 경쟁을 통해 중국문화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점, 수나라 말기의 군웅전쟁, 당나라 이후 5대10국은 분열왕조 중 권력유지가 최상의 문화가치가 되었던 최대의 암흑기였던 점, 한족 재부흥의 송나라 건국과 원나라의 침입, 원나라 말기 홍건농민반란 및 빈민혁명가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과 민중배반 등의 역사는 진(秦) 말기 유방, 항우 초한전쟁에 관한 [사기]의 모순된 기술들 속에 대략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남아 있는 기술상의 모순은 바로, [사기]를 유물변증법적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주요한 조건이고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관점정립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요소이며, 이로 인해 사마천의 역사의식은 현대에 이르러 한껏 빛을 발하지 않겠는가.

    ***

    1. [유방(劉邦)], 사타케 야스히코 지음,  권인용 옮김, <이산>, 2004.

    : 사마천 [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한고조 유방의 일대기를 서술한 일본 문학자 사타케 야스히코의 저서로 [사기]에 자주 보이는 서술상 모순은 사마천이 반고 등과 같은 관변 역사학자를 초월한 뛰어난 역사학자임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한고조 유방의 생애는 물론, [사기] 뿐만 아니라 역사서 속에 내재한 역사의 생생한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시각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2.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이라는 슬로건으로 도식주의에 빠진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하려는 구 유고슬라비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 도발이 담겨 있는 저서라고 볼 수는 있으나 솔직히 너무 어려워서 ‘철학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접하기에는 무리가 많이 따르는 책이다.

    기존 헤겔식 정반합 도식을 벗어나 ‘시차적 관점’을 통해 ‘상호번역이 불가능하며 어떠한 종합이나 매개도 불가능한 두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현상들에 대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가상’과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 대략의 내용인데, 이러한 시차적 간극을 ‘적절히 이론화’하기 위하여 철학, 과학, 정치 분야에서 각 사안들을 지루하고도 최대한 어렵게 다루고 있다.

    이 책에 따른다면, 결국 시차적 간극을 최대한으로 좁히는 것이 변증법적 유뮬론자들의 최대강령이 될지도 모른다. 영화나 뮤지컬, 문학 등의 개입도 많이 언급한 철학서이기는 하나 영화 매트릭스의 철학적 관점을 논한 [매트릭스로 철학하기]가 그나마 읽기 편하다.

    3. [사기], 사마천 지음,  김진연 편역, <서해문집>, 2002.

    : 총 3권에 걸쳐 중국 통사를 뼈대로 하여 [사기]의 ‘표’와 ‘서’를 제외한 ‘본기’, ‘세가’, ‘열전’에 나온인물들을 엮어 서술하고 있다. 사마천의 역사의식, [사기] 관련 고사성어 등을 잘 정리해 놓은 책.

    필자소개
    현대해상화재보험노동조합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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