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잡식여자의 채식기-4] 산부인과 의사와 식품영양학 박사
        2013년 01월 25일 04: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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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산부인과는 검진만 하는 산부인과와 출산까지 하는 산부인과로 나뉜다. 나는 한동안 검진만 하는 산부인과를 다녔다. 의사선생님은 경험 많은 여의사셨는데, 지인으로부터 그분이 산부인과 여의사로 아주 용한(?) 분이라는 추천을 받고 선택했다.

    그 선생님은 과장되게 친절하시거나, 설명을 자세히 해 주시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선생님이 정말 용~한 의사시라는데 동의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넘치거나 부족함 없이, 편안한 상태로 이끌며 진찰하셨다. 뱃속에서 홍이의 크기가 좁쌀에서 쌀알로, 쌀알에서 콩알로, 내 뱃속을 올챙이처럼 휘젓고 다닐 때까지 나는 선생님의 진료를 받았다.

    어느 날, 임산부가 의례하는 여러 검사를 통해 내게 아주 약간의 빈혈이 있는 것으로 나오자, 선생님은 철분제를 처방해주셨다. 그리고 식사를 통해서 철분과 단백질을 많이 섭취하기위해 “엄마가 쇠고기와 치즈를 좀 드셔야 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난 눈치 없이 “저 채식하는데요. 고기랑 유제품 끊었어요.” 하고 말했고, 남편은 그런 내 옆에서 멀뚱멀뚱 서있었다.

    의사선생님은 우리를 말없이 바라보시다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뱃속에 아기를 키우면서, 지금 뭘 하신다구요? 채식? 임신이 장난입니까?”

    나는 쫄아서 아무 말도 못했다. 남편을 힐끗 쳐다보니, 남편도 쫄았다. 당황해서 황망해진 큰 눈이 시선 둘 곳을 찾고 있는 게 보였다. 웃겼다.

    갑자기 의사선생님한테 혼쭐이 나서 당황한 저 남자 어른이, 면피책을 찾느라 뇌회로가 풀가동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장난기가 동해 순진한 장화신은 고양이 얼굴을 하고, 의사선생님께 남편을 일러바쳤다.

    “남편이 채식하라고 해서… 콩 먹으면 단백질 다 섭취하는 거라고 그래서…”

    선생님은 남편을 쳐다봤다. 나는 남편의 얼굴을 보진 않았지만, 그 시선을 피하느라 고개를 떨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잔뜩 긴장해서 배꼽이 오그라든 모양이었다. 정말 웃겼다.

    선생님은 “계속 채식을 하면 철분과 단백질이 부족해서 임부한테 문제생길 수 있어요. 더 말하지 않겠으니 알아서 잘 하셔야 합니다.”

    “네”, 선생님 카리스마에 쫄다못해 쪼그라든 남편이 우물쭈물 대답을 했다.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의사가 식품영양학 박사(사실 박사가 아니라 박사수료임)에게 음식에 관해 꾸중하는 상황. 관련 지식을 설명하고, 꾸중 들은 것의 부당함을 호소하자니, 그것이 너무 장황하고, 의사-환자보호자 관계에서 의사를 가르칠 수도 없으니 이래저래 대략 난감한 남편의 입장.

    시트콤의 한 장면 같았다. 아 불쌍한 내 남편, 근데 왜케 웃기지.

    철분과 단백질에 대해 우리가 본래 가졌던 입장은 남편의 주장에서 기인했다. 남편은 임신기에 피가 약간 묽어지는 것은 당연하니 철분을 섭취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혈액이 태반을 통과해 태아에게 양분을 전달하기 위해 묽어지는 것이니, 철을 먹어서 피를 진하게 하는 것은 그런 기전에 역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단백질은 고기단백질과 콩 단백질이 다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식물성에는 콜레스테롤이 없으니 콩 단백질이 더 좋다고 했다.

    뭔가 그럴 듯하게 들렸다. 그래서 임신 중에 채식을 한 것이고. 하지만 나의 생물학적 지식이란 ‘피는 국물과 건더기로 이뤄졌는데, 국물은 혈장이고, 건더기는 혈구다’의 수준이니, 남편의 지식과 논리를 검증할 만한 능력이 나에게는 전혀 없는데, 의사선생님 말씀처럼 남편이 틀린 거라면?

    나는 의사선생님 명령도 있었겠다, 심심하면 한번 씩 남편에게 고기를 먹겠다고 겁박했다.

    남편은 나에게 그러지 말라고 구슬리고 달랬다. 하지만 나는

    “여보의 지식은 여보의 가설일 뿐이예요. 여보의 주장이 확실하다면 레퍼런스를 대세요. 확실한 근거자료를 보여달라구요”

    그때부터 남편의 폭풍 논문검색질이 시작되었다. 관련된 논문들을 찾고, 읽고, 나에게 읊어댔다. 앉으나 서나 무지몽매 여편네가 혹시라도 동물친구들의 살을 먹을까 노심초사하는 남편은 나를 향한 계몽운동을 쉬지 않았다.

    그의 이런 노력은 내 이성을 설득했다. 남편의 가설이 과히 틀리지 않구나. 그것을 믿은 나도 틀리지 않구나하는 안도감을 주었다. 그래서 임신기 내내 채식을 했다. Meat-lover가 아니니 채식하는 게 고행은 아니었으니까.

    위로부터 아주까리콩, 쥐눈이콩, 오리알태, 선비잡이콩, 밤콩, 서리태(출처: 대한민국 정부 대표블로그 정책공감)

    그런데 의사선생님 말씀이 아예 그른 것은 아니다. 채식을 할 때 철분과 단백질은 신경써서 챙겨야하는 영양소다. 채식을 하면 탄수화물, 비타민, 무기질은 쉽게 섭취할 수 있지만, 철분과 단백질은 자칫하면 간과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가 있으면, 철분과 단백질은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렌틸콩과 서리태를 자주 먹는다. 렌틸콩은 렌즈콩이라고도 하는데, 녹두랑 비슷한 맛이 난다. 나는 렌틸콩으로 카레를 자주한다. 또 죽도 끓이고, 녹두처럼 김치랑 고사리 넣어서 전을 부쳐 먹기도 한다.

    렌틸콩은 철분이 아주 많은 식재료이다. 세계 4대 건강식품으로 좋은 음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잘 먹지 않는다. 렌틸콩은 구하기가 쉽지 않지만, 용산에 사는 나는 이태원 이슬람사원 앞의 인도식품점에 가서 구입한다. 1kg로 7000원 정도 하는데, 1kg를 사면 서너 번 정도 요리해 먹을 수 있다.

    서리태는 검은콩이다. 단백질 보충을 위해 먹는데, 주로 밥에 넣어 먹는다. 우리집 밥은 쌀이 7할, 콩이 3할이다. 서리태는 8시간 정도 불린 후에 밥을 지어 먹으면 콩이 아니라 밤 같다.

    본래 나는 콩을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밥을 지어먹었더니 먹기가 훨씬 수월했다. 한번씩 내키면 두유를 만들기도 한다. 두유는 자기 전에 콩을 밥공기 반 정도를 씻어 불렸다가 아침에 물에 5분정도 삶은 후에 믹서에 콩을 갈아 체에 내리면 된다. 거기 구운 소금 약간과 설탕을 타면, 정말 고소한 두유가 된다. 체에 거른 콩은 비지로 국을 끓여먹거나 야채를 다져서 동그랑땡을 만들어먹으면 좋다.

    이렇게 만들어주면, 남편은 다 먹은 후에 가슴에 두 손을 얹고 꼭 노래를 한가락 뽑는다.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평안해~”

    그 노래를 들으면, 주부놀이에 대한 무한한 보람이 느껴진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주부놀이의 꽃은 잘 먹여놓은 남편이 가사노동을 위해 분홍고무장갑을 끼고 꽃무늬 앞치마를 입은 모습을 보는데 있지 않나 싶다.

    필자소개
    ‘홍이네’는 용산구 효창동에 사는 동네 흔한 아줌마다. 남편과 함께 15개월 된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직장생활과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느라 집안은 늘 뒤죽박죽이다. 몸에 맞지 않는 자본주의식 생활양식에 맞추며 살고는 있지만, 평화로운 삶, 화해하는 사회가 언젠가 올거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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