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정치 위기와 정체성 찾기
    진보정의연구소, 2차 집담회의 노회찬 발제문
        2013년 01월 25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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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오전 진보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는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의 발제로 진행되었던 1차 집담회에 이어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의 발제로 2차 집담회를 진행한다.

    연구소 집담회에서 물꼬를 열였던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서의 진보정치’라는 화두가 노 대표의 2차 집담회 발제문에서는 더 공세적으로 담겨 있다.

    진보정의당만이 아니라 진보신당에서도 당 대표 당직선거를 통해 진보정치의 재건이나 재창당 등 이후 진로에 대한 토론이 수면 위에서 벌어지고 있다. 2013년 연초의 시기가 진보정치의 재건, 재편, 재기 등 다양한 언어와 개념으로 진보정치의 진로를 모색하는 시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노 대표의 연구소 집담회 발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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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정치의 위기와 정체성 찾기

    1.

    지금 한국의 진보정당은 2000년 1월 민주노동당 창당 이래 가장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해있다.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며 치루어진 1987년 대선이래 가장 많은 수의 ‘진보후보’가 난립하고 가장 혹독한 평가 속에 저조한 지지율을 기록한 제 18대 대선은 진보정치의 위기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2.

    진보정의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으로의 분열과 갈등, 세 정당의 지지율을 합쳐도 원내진출 전인 2003년 민주노동당 지지율에도 못미치는 현상은 위기의 표면적 양상일 뿐이다. 위기의 심각성은 한국의 진보정당이 이제까지의 발전전략으로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무엇이 진보인가라는 근본적 물음 앞에서 유의미한 독자적 세력으로 존립할 가능성조차 불확실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3.

    2012년 10월 창당한 진보정의당은 2013년 2단계 창당을 약속한 바 있다. 어떤 당을 누구와 함께 만들 것인가는 진보정의당에게 올해 상반기 최대의 과제이다. 그러나 실패로 귀결된 2011년 통합진보당 창당처럼 기존의 관성을 유지한 채 단순한 몸집 불리기로 끝난다면 진보정치의 위기는 가속화 될 뿐이다. 따라서 진보정의당의 2단계 창당의 방향과 계획은 한국의 진보정치가 당면한 위기를 타개해가는 적극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될 때에만 그 의의를 가질 것이다.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사진=노회찬 블로그)

    4.

    현재 진보정당의 위기는 무엇보다도 정체성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2000년 1월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반세기만에 다시 등장한 진보정당의 상징이었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 도입 주장은 그 자체로 진보정책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들 정책들은 새로운 국가모델로 승화하지 못했고 정교한 복지프로그램으로 구체화하지도 못했다. 대신 IMF외환위기 이래 세 차례의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동안 사회양극화는 극대화 되었고 새누리당이 무상보육을 공약으로 걸 정도로 복지경쟁이 시작되었다.

    10년째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진보’는 더 이상 ‘진보적’이지 않으며 ‘진보’라는 정체성이 진보정당 고유의 특성과 강점으로 인정되지 않는 현실이 되었다. 2012년 새누리당의 대선 공약이 2007년 민주당의 그것보다 ‘진보’적이며 2012년 민주당의 대선 공약이 2007년 민주노동당의 그것만큼 진보적이며 2010년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의 무상보육공약보다 2012년 박근혜후보의 무상보육공약이 더 진보적인 내용으로 제시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진보정당은 진보라는 정체성만으로 그리고 과거의 방식으로 자신을 차별화하기 불가능한 새로운 국면에 직면하게 되었다.

    5.

    진보정당 정체성의 위기는 경쟁하는 다른 정당들과의 차별성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급증하는 복지수요에 대응하는 총체적이며 정교한 프로그램으로 발전하지 못한 가운데 위기가 가중되고 있다. 동시에 선거시기 대중적 환심을 사기 위해 대책 없이 ‘더 많은 복지’를 약속하는 퍼퓰리즘적 접근을 진보정당이 선도하고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이를 따르는 양상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무상교육과 반값등록금을 주장하면서 ‘대학 안가고도 행복한 삶’을 위한 종합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비정규직 완전철폐’라는 근본주의적 주장을 견지하면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원칙에 기초한 유연한 차별완화대책에 소극적이다.

    6.

    정체성의 위기는 당내 구심력의 제고에도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십년 남짓 기간 동안 십오만명 이상의 당원을 배출하였지만 정치이념과 노선상의 동질성 수준은 여전히 낮다. 교육, 토론, 설득, 합의를 위한 시스템이 열악하고 노력은 방기되는 경우가 많다. 당내에서 꿈을 공유하고 그 꿈을 시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은 오랫동안 중단되어 왔다. 당 강령은 창당과정에서만 통과의례처럼 논란이 될 뿐 사문화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었다. 이런 상황은 결국 당내 민주주의에도 영향을 미쳐 당 운영은 정파라는 이름의 소수 활동가그룹에 의해 독점되고 이들 정파들의 담합으로 권력과 자원이 배분되는 전근대적 방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방식의 폐해가 폭발적으로 드러난 것이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당사태와 2012년 통합진보당사태이다.

    7.

    진보정의당의 2단계 창당은 2000년 이래의 진보정당운동을 정산하는 새로운 당 만들기 과정이 되어야 한다. 진보세력의 이미지는 실추하고 신뢰는 저하되었지만 진보적 가치의 사회적 실현을 향한 시민들의 요구는 날로 커가고 있다. 낡은 진보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제대로된 진보정당을 바라는 요구는 반대로 커가고 있다. 이제 새로운 진보정당은 진보라는 애매한 이름 뒤에 숨지 말아야 하며 사탕을 쥐어주는 대신에 자신의 영혼과 속내와 계획을 당당히 드러내고 심판받길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8.

    1987년 6월항쟁으로 정치적 민주화는 국민적 합의가 되었다. 1987년 대선은 이 정치적 민주화를 누가 주도할 것인가를 정하는 선거였고 양김의 분열로 그 역할은 노태우대통령에게 주어졌다. 2012년 대선은 지난 15년간의 사회양극화 속에서 국민적 요구로 등장한 경제민주화를 누가 주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거였다.

    개혁, 진보진영의 무력한 대응 결과 박근혜당선인이 경제민주화를 추진할 주도권은 쥐게 되었다. 박근혜당선인이 이를 성공적으로 추진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복지수요를 줄일 일자리 대책의 부재, 재원마련을 위한 증세계획의 결여, 내부 저항에 맞설 철학과 의지의 결여 등 부정적 요소가 적지 않다.

    그러나 박정희대통령이 긴급조치 제3호를 발동하여 저소득층을 위한 근로소득세, 주민세 면제, 중소상공업자에 대한 특별저리융자, 임금체불과 부당노동행위 가중처벌, 재산세 면세점인상과 사치품 중과세, 공무원 임금인상등 추진하였듯이 박근혜정부의 복지는 시혜차원에서 확대하되 경제력 집중은 오히려 심화하는 상황이 될 가능성도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대되는 복지는 복지국가로의 지향과 요구를 강화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이에 따라 진보정당은 이같은 시대적 요구에 자신의 역할을 제고할 사명을 요구 받고 있으며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국가모델과 사회시스템 그리고 총체적 복지프로그램 정교하게 제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9.

    노동에 기반한 대중정당은 진보정당 정체성의 가장 주요한 축이다. 강한 노동은 복지국가 건설의 물적 기반이며 정책의 중심 가치이어야 한다. 이를 실현할 방법은 과거의 관성을 벗어난 새로운 로드맵으로 기획되지 않으면 안된다.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방식은 과거의 낡은 방식이 되었으며 5% 남짓한 민주노총 조직율의 현실에서 내부 정파구조에 위탁하는 방식의 조직화의 한계와 폐단도 분명하다. 이제부터 노동과 정치는 직접 만나야 한다. 비정규직등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노동대중과 진보정당이 직접 만나는 다양한 장과 소통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진보정당의 미래는 노동자와 청년과 여성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

    10.

    이제까지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선거를 통한 권력의지의 실현, 추구하는 가치와 표명하는 정책들로 볼 때 일종의 사민주의 정당으로 분류되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나 지난시기 국가사회주의와 사민주의 진영간의 오랜 반목과 대립의 역사에 갇혀 사민주의를 살아있는 정치과정과 미래계획으로 다루는 것을 금기시해왔다.

    이제 이런 낡은 금기로부터 진보정당을 해방시킬 때가 되었다. 진보정의당 당 간부 의식조사에서 북유럽의 스웨덴모델에 대한 호감도가 90%를 넘는 현실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우리가 갈 길이 전혀 아니다고 강변하는 것이 과연 솔직한 태도인가? 사회민주주의는 나라 수만큼 다양하며 신자유주의의 공세 앞에서 유약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에 기반해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온 여러 시도와 그 결과물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11.

    진보정의당이 추구하는 가치는 강한 노동과 넓은 복지 그리고 생태와 평화의 존중이다. 민주주의에 철저하게 기반해서 자본주의의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원리가 낳는 폐해를 극복하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우리의 신념이다. 현대적 진보정당이 하나의 사상, 유일사상을 강요할 수는 없다.

    최대강령으로서의 이념적 지향은 각자의 몫이며 당은 다원적 민주주의로 이의 공존을 보장해야 한다. 동시에 복지국가를 열어나갈 책임있는 진보정당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의 정당을 이루는 공통분모이며 국민들에게 약속하는 우리의 최소강령이다.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으로서 우리가 보장하는 한국의 미래 모델와 사회시스템을 만들어 가자. 그것이 바로 한국적 사회민주주의를 정립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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