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이회창 노무현 권영길
    [아빠의 현대사-49] 2012년과 닮았던 2002년 대선
        2013년 01월 25일 10: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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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자의 실수로 ‘아빠의 현대사’ 50편과 49편이 엇갈려서 50편이 먼저 게재되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지난 회의 50회와 오늘의 49회 순서가 바뀌었음을 확인합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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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선거의 역사적 의미는 좌익정당, 진보정당 세력이 국가 최고 권력인 대통령이 되고자 헌법에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민주노동당 후보가 선전해서 많은 표를 얻은 것도 그렇습니다. 사회당 같은 사회주의 정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낸 것도 해방 이후 57년만의 일입니다” (리영희 교수,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와의 대담 중에서)

    노동현장 중심의 선거운동

    선거를 불과 한 달도 남겨 두지 않고 파견되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만큼 2년여 동안 민주노동당은 성장하고 있었다. 조직위원장으로 임명된 나는 주로 후보가 현장을 방문할 수 있도록 일정을 노동조합과 협의하여 조정하고, 가능하면 전국을 빼놓지 않고 노동현장 중심으로 돌 수 있도록 배치했다. 가능하면 더 많은 사업장을 방문하도록 동선을 짰다.

    또 노동현장을 조직하기 위해서 “10년의 선택, 노동자에게 달려있다”라는 제목의 작은 책자를 민주노총 선전국장이었던 황혜원 등과 만들었다. ‘IMF가 노동자에게 남긴 것, 비정규직과 현장통제가 강화되는 현실, 할 수 없는 개혁을 내세우는 DJ 후계자 노무현’ 등의 작은 꼭지를 통해 “10년의 미래가 걸린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을 선택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5만부를 인쇄하여 배포했다. 자랑 같지만 지금 돌아봐도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그 결과는 노동자들이 밀집한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표를 많이 받은 ‘계급투표’의 한 모습이 만들어진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우리 연맹의 전 위원장이었던 박태주, 김호선 등이 ‘개혁과 통합을 위한 노동연대’라는 것을 만들어 노무현 대통령 지지선언을 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사람들은 2007년에도 2012년에도 반복하여 나타나곤 한다. 말로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얘기하다가 결정적인 시기에 보수야당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곤 한다. 노동현장을 조직하는 한편 그런 움직임에 대응해야 했다. 현장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를 비판하기 위해 매일노동뉴스에 글을 투고했다. 요지는 이랬다.

    우리는 권영길 당이 아니다

    “노무현이 대안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노무현 개인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게 얘기한다. ‘당’이 필요하다고. 잘난 ‘개인’이 아니라 당적 구조를 가진 ‘조직’이 필요하다고. 나는 개혁을 못한 이유가 진보세력을 궤멸시키고 반세기를 넘게 자리를 지켜 온 지배세력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노무현을 지지하는 노동연대는 말한다. ‘험난한 가시밭길이 예고된 정치적 홀로서기를 하지 마라. 노무현이라는 뗏목을 타고 이 강을 건너자.’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과 우리가 다른 이유 중 가장 큰 하나는 그들의 ‘바람’ 대신에 우리는 ‘조직’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조직이야말로 한국사회의 정치를 바꿀 수 있는 힘이라 믿고 있다. 때문에 민주노동당 당원이 현재 있는 당 중에서 가장 당원이 많은 현대적 의미에서 유일한 정당이 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이라는 나무는 좋을 수도 있겠지만, 그 뗏목이 믿을 수 있는 제품이라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 구걸하는 정치를 계속할 수는 없다.

    ‘이회창이나 정몽준이 되면 극우보수의 헤게모니가 되살아나서 노동조합운동은 위기에 처한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나은 노무현을 지지하자.’고 말한다. 정말 극우보수의 파쇼정치가 온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설령 온다고 해도 지난 시기처럼 민주화 운동의 열매를 보수 정치인이 따먹는, ‘죽 쒀서 개 줄 생각’은 없다.

    솔직히 노동연대에 있는 지도자급 사람들은 민주노총에 있었을 때 모두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그리고 97년 대선에 권영길 위원장 출마를 음으로 양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이거나 설령 반대했더라도 지도자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도적 지위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지난 4월 2일 발전노조 파업 때문에 많은 지도자들이 자진 사퇴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노동조합의 원칙 중에 하나가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이라고 본다. 386을 얘기하던 김민석이 정몽준에게 가고, ‘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말로 나를 꼬시던 김문수가 한나라당에 있어도, 자기가 말했던 것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책임을 못 지겠으면 그 자리를 떠나면 된다. 대신 조용히.

    우리는 가시밭길을 걸을 것이다. 왜? 어렵고 힘들겠지만 그 길이 옳기 때문이다. 나는 십여년전 노무현이 얘기했던 것을 기억한다. ‘너희 노동자의 표가 얼마나 되기에 나보고 노동자를 지지하라고 얘기하느냐?’라고 했다.

    거꾸로 물어 보자. 도대체 노무현이 무슨 철학과 무슨 계급적 기반을 가지고 민주노동당보고 연대하자고 얘기하고 있는가? 정말로 민주노동당이 말하고자 하는 노동자의 계급적 기반에 기초한 개혁을 함께 하고자 한다면 ‘부유세 등 개혁을 한 번에 밀어붙이면 저항을 불러온다.’ 운운하는 노무현 후보와 현실에 대해 한번 허심하게 얘기하는 기회를 가지시길 바란다. 그런 노무현하고 땅따먹기를 하고 싶지 않다.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살고자 한다.”

    박태주 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에 대통령비서실 노사개혁 태스크포스팀 팀장을 하다가 어딘가를 헬기를 타고 방문하다가 민간인이 타서는 안 되는 공무용 헬기에 부인과 함께 탄 사실이 드러나서 보수언론의 집중공격을 받고 시작도 하기 전에 낙마한다.

    노무현 시대의 개막

    2002년 대통령선거는 12월 19일에 치러졌다. 유권자 총 3,499만 1,529명 중에 70.8%가 투표해서 그 중 48.9%를 얻은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3.9%인 95만 7,148표를 얻어 3위를 차지했다. 백만표의 벽을 이번에도 넘지 못했지만 모두 민주노동당의 선전에 놀랐다.

    2002년 대선의 벽보(자료사진)

    권영길 후보는 TV토론을 통해 몇 가지 유행어를 남기기도 했다. “국민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말은 개그맨들이 방송에서 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부패 원조당, 민주당은 부패 신장개업당”이라고 신랄하게 보수 정치권의 동질성과 부도덕성을 폭로하기도 했다. TV토론의 가장 큰 수혜자가 민주노동당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노무현의 승리를 예상하고 권영길에게 표를 주려고 했던 사람들이 대거 노무현으로 돌아 설 것입니다. 이 사태로 인해 권 후보 득표율은 여론조사 지지도의 절반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유시민이 12월 19일 0시 50분에 인터넷를 통해 유포한 말이다. 선거 뒤에 민주노동당의 영향력이 별 것 아니었다고 딴 소리를 해서 탈이긴 하지만 개혁적 국민정당을 추구하고 있던 유시민의 말은 맞았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당원 중에도 노무현을 찍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주에 사는 민주노동당 당원인 J씨는 이름난 노동운동가이고, 한때 혁명을 꿈꾸는 조직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는 12월 18일 밤 10시 정몽준이 노무현과의 결별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잠을 설쳤다. 결국 그는 집사람과 함께 투표장에서 노무현을 선택했다. 그리곤 민주노동당에서 재정마련을 위해 조직한 선거 참관인을 했다. 이 하나의 장면이 2002년 대선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뒷날 조사해 보니 민주노총 조합원 중에서 36.8%가 권영길을 47.4%가 노무현을 찍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왜 소위 386세대들은 이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밤잠을 설쳤는가? 왜 심지어 민주노동당 당원조차도 이회창이 당선될까 노심초사하고, 차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군부독재의 잔존세력’에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15년 동안 87년에 해결되었어야 할 ‘민주와 개혁의 문제’가 남아있었기에, 전라도의 몰표와 소위 민주화를 경험한 세대의 표가 노무현으로 집중되었다.

    ‘계급’에 방점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누가 되든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 민주화의 물결의 차이는 작은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민주’에 초점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혹은 부채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의 당선은 비록 15년이란 세월이 걸렸지만 이제야 한 시대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한다. 노무현의 당선으로 번갈아 가며 정권을 잡은, 그리고 똑같이 아들들을 감옥에 보낸 양 김씨는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네스 북에 올려도 될 만큼의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 김종필도 이제 코미디를 끝낼 수밖에 없다. 3김 정치는 이제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지고 있다. 노무현의 당선이 가지는 의미는 그만큼 크다.

    여기까지 오는 데 짧게 보면 5년, 길게 보면 해방 이후 5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100만표에 가까운 대중적 지지를 통해 앞으로 발전할 토대를 만들었다는 데 이번 2002년 대선의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지배세력이 항상 추구하는 보수양당 구조를 허물고, 진보와 보수가 경쟁하고, 대립하는 정치구조를 형성했다는 데 가장 큰 성과가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 정치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화당․민주당으로 보수 양당화된 미국과 같은 정치형태가 아니라 노동자 정치의 가능성을 여는 희망의 씨앗을 남겼다는 데 의미가 있다.”

    선거이후 연구전문노조 노보에 실었던 글이다. 그러나 2012년 박근혜와 문재인이 격돌한 대통령선거에서도 같은 논리가 반복된 것을 보면 여전히 역사는 반복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몇 가지 에피소드

    전에도 한번 말했듯이 민주노동당은 이전 보수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 세력과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집단의 연합이었다. 선거 막바지에 노무현후보가 밀리는 기세가 보이자 공동선거본부 중앙선거대책위원이었던 이천재 서울연합의장, 윤경희 한총련의장, 당 고문이었던 신창균씨가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막아야된다.”며 노무현 지지를 선언한다.

    그들 중 일부는 선거기간 내내 ‘반한나라당, 이회창 낙선’을 주장하며 실질적으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는 ‘민주정부 구성이 위협받지 않는 범위’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한창 나이의 여자 중학생인 신효순, 심미선이 경기도 양주에서 미2사단 소속 54톤 궤도차량에 깔려 그 자리에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6월 13일의 일이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범국민대회 등이 열리고 이후 촛불집회로 발전한다.

    한창 선거기간 중이었는데 민주노동당의 분당 이후 ‘경기동부연합’으로 유명해진 사람들이 그 문제를 가지고 미국 백악관에 보내는 항의 엽서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엽서에 글을 쓰면 그걸 수거하여 미국으로 보내는 운동이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그들은 잔혹하게 죽은 사진을 싣고 있었다. “아니 정말 이 엽서를 내가 내 딸에게도 보여 주고 동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미국의 잔혹성을 폭로하는 데 집중하는 바람에 대중적인 동의를 얻는 것은 무시하고 있었다. 결국 이미 인쇄되어 있다는 십만장을 전량 폐기처분하고 다시 만들었다. 물론 선거운동본부의 돈이었다.

    유세위원장은 이용대라는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경기동부연합’의 핵심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후보가 방문할 장소를 노동현장으로 잡는 조직위원장과 후보의 유세를 담당한 유세위원장은 긴밀한 대화가 필요했다.

    그런데 별로 그렇지가 못했다. 권영길 후보의 마지막 유세는 광화문 미국대사관 앞에서 열기로 했다. 효선이 미선이의 죽음에 대한 항의를 포함한 것이었다. 그리고 회의를 통해 그 사회는 조직위원장인 내가 보기로 했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나는 사회를 보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그래서 싫다고 했지만 아무튼 결정이 그렇게 되었다.

    마무리 집회인 만큼 미리 원고를 준비하고, 연습도 했다. 그런데 정작 마지막 유세 장소에서 유세팀이 내게 마이크를 넘기지 않는 것이었다. 황당했다. 심지어 항상 유세의 마지막엔 민주노동당가로 마무리해야 하는 데 당가 CD조차 없었다. 부랴부랴 다른 방송차에서 공수해 와서 끝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태도들이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당을 가져온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급하게 몇 명을 조직하여 마지막으로 수고하신 권영길 후보를 헹가래치는 것으로 마지막 유세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대선 기간 중에 한국노총이 독자적으로 정당을 창당하겠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들은 DJ와 비판적 지지를 한 것을 반성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다.

    한국노총의 성격을 잘 아는 민주노총은 그들의 입장 전환을 환영하면서도 “독자창당의 근거로 삼고 있는 ‘최소의 비용으로 노총의 정치적 입지를 극대화’ ‘향후 정치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도 창당 필요’ ‘지속 가능한 정당으로 성장하는 데 따른 막대한 비용소요’ 라는 등의 인식은 자칫 한국노총이 도모하고 있는 독자창당이 가시밭길을 헤치고 지속적인 성장을 목표로 하는 당이 아니라 단지 대선 전 합당을 위한 협상정당으로, 몸값과 ‘교환가치’를 높이기 위한 창당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대한 지적을 했었다.

    “지난 97년 대통령선거 이후 지속적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노력해 온 우리는 한국노총의 독자창당이 노동자 대중이 신자유주의 아래서 고통 받아 온 모든 아픔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할 것이다.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의 큰길에서 한국노총 동지들을 빠른 시일 안에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이었다. 온실 속에서 자란 꽃은 야생에선 크지 못하는 법이다.

    그리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시대가 시작되었다.

     

    필자소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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