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출신 할머니의 생애사-1
        2013년 01월 24일 05: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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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에서 [여성주의 구술사 쓰기/ 평양출신 할머니의 생애사] 연재를 시작한다. 최현숙씨가 평양 출신의 90세가 다 된 할머니의 생애를 구술사로 정리한 것이다. 관심있게 봐주길 기대한다. 할머니의 말투는 그대로 살린다. 아래는 필자의 취지글이다 <편집자>

    “여성주의 구술사는 젠더(성별)경험의 주변성에 대한 주관적 진술이며, 또한 여성을 주변적 존재로 위치시키는 가부장적 쳬계의 전복을 꾀하는 담론적 정치의 장이다.”- 김성례, ‘여성주의 구술사의 방법론적 성찰’ 중

    口述史라기 보다 口述辭다. “史”는 사실관계와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하지만, “辭”는 주관성이 전제이며 심지어 “인지와 기억의 왜곡”도 포함될 수 있다.

    구술사 작업은 들여다보기와 보여주기다. 한 사람의 살아온 기억을 풀어놓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삶의 과정과 아픔과 한계를 정리하고 객관화하며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또한 우선 자신과 화해하고, 타인들과의 갈등과 원망도 가능하면 화해하는 과정이다. 나아가 읽는 이들은,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함을 통해, 삶을 공감하고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전망하는 과정이다.

    또한 구술사는 권력자들의 공식적 역사가 보이는 “추상적인 보편성”에 대항하여, 기록되지 않고 침묵되어졌던 “역사 없는 집단”들의 사적인 삶들이 구술하는 “구체적 보편성”을 드러냄을 통해 역사를 밑으로부터 접근하는 좌파적 방법론이다.

    여성주의 구술사는 가부장제에 의해 왜곡되고 사소한 것으로 무시당해온 여성들의 젠더(성별)경험의 주관적 실재를 언어화하는 데 활용하는 기본적인 도구이자 (Anderson, Armitage and Wittner 1990;95), 여/성들 사이의 시대적 계급적 문화적 차이와 경계를 넘어 반가부장적 정치 연대를 실현하는 서사적 투쟁 도구이다.

    흔해빠지고 사소한 “늙은 여자들”을 골랐다. 지금은 느리고 때깔없어 더더욱 태가 안나지만, 젊은 시절 살아보려고 신작로 바닥과 장마당에서 아등바등 기를 쓸 때조차, 기껏해야 거추장스러운 여편네 취급을 받은 여성들이다. 혹 줏대를 세워볼라치면 떨려나서 낙인과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 여성들이다. 단 한번도 그녀들의 노동은 “노동”이라 불리우지 못했고, 그녀들의 생산은 국가총생산 “G.D.P.”에 집계되지 않았다. 이제와서야 “고령화“니 “고령의 여성화“라는 용어 속에서, 의료와 연금 재정의 과잉비용으로나 분석 대상이 되는 ”늙은 여자들“이다.

    이 구술작업의 “말하기/듣고 쓰기”와 이후의 과정에서 ‘늙은 여자들’은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그녀들 내면의 혼자만의 변화가 아닌 정치적 연대로 이어지기기 위해, 듣고 쓴 사람과 읽는 사람들의 구체적 실천이 필요하다.

    쓰여지지 않아 시간의 기억 속에 매장된 죽어버린 말들을, 그녀들의 말라버린 혀로 휘젓게 하라. 기억을 복원하여, 역사를 다시 쓰고, 미래를 실천하라

    ‎”이제와서야 ‘고령화’니 ‘고령의 여성화’라는 용어 속에서, 의료와 연금 재정의 과잉비용으로나 너희들의 분석 대상이 되는 ‘늙은 여자들’이다. 섣부르게 읽고 말면, 불길하지만 아마 너희들의 미래다. 레디앙 독자라서 하는 말이다.”<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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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최현숙(출처:인권잡지 '사람' 인터뷰 중에서)

    들어가며

    ‘일제강점기(1925년 생) 산업도시 평양의 성차별이 적은 중산층 가정에서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으로 성장한 한 여성이(일곱 살부터 13년간의 개신교 생활, 열 살부터 3년간의 야학, 열네살부터 6년간의 직장생활) 정신대를 피한 급한 결혼 후, 해방직후인 만 스무살에 친구와 잠깐 서울구경을 왔다가 의지처가 없는 서울에서 돈도 연줄도 모두 떨어져 단절과 불안에 헤매다가, 연변서 알던 남자를 서울에서 우연히 만나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임신으로 발이 묶여 평양 가족에게 돌아갈 것을 포기한 채, 미군부대 인근 생활 등 평생을 고단하게 살아 온 이야기‘ 정도가 김미숙 삶의 개괄이다.

    산업도시 평양의 중산층 가정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의 여성 청년이, 돈과 연줄이 모두 끊어져버린 이남에서 얼마나 황망하고 억울하게 삶을 다시 시작해야 했는지,

    단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엉겹결에 붙잡은(혹은 붙잡힌) 연줄은 썩은 동아줄이어서 그 새로운 시작에서 그녀의 “여성임“은 주변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고 억압되었는지,

    임신과 출산과 육아라는 ”모성”은 자유로운 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옭아매었고 여든여덟의 지금도 여전히 짐으로만 남아있는지,

    남편의 자살 덕에 얻은 가부장적 가족에서의 이탈/탈출과 생계문제 및 우연히 닿게 된 미군부대 인근의 환경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성적 가치를 어떻게 활용하여 살아남고 다른 한편 즐기고 자원을 모으고 욕망하며 또 한계에 부딪쳤는지,

    그녀 생애의 시대적 배경으로서의 일제와 미국은 한 여성 시민의 노동이나 몸을 어떻게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득을 챙겼으며, 그녀의 국가는 무엇을 했고 그 국가의 다른 시민들은 그녀를 어떻게 대했는지.

    그럼에도 그녀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고, 혈족을 넘은 다른 시민들(가부장제로부터 밀려나고 단죄 받은 여성들, 가난한 여성들, 가난한 미군들)과 의지하고 부대끼며 살다가 지금 피해자를 넘어 생존자이자 생활자로서 자신을 정체하며 호기롭게 자신의 “독거”와 시민으로서의 “권리”(국민기초수급, 노인장기요양 등)를 향유하고 있다.

    강한 생활력의 이북 출신인 점과 활달하고 화끈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그녀의 험난한 삶의 과정으로 인해 그녀의 구술에는 많은 욕들이 섞여 있고 그것을 대체로 살렸다.

    노동과 벌이

    평양 : 성냥공장 – 전매국 담배공장 – 고무공장 – 피복공장 – 봉천 피복공장

    서울 : 시누네 살림집과 바에서 식모 겸 잡일 – 과일행상 – 양색시대상 옷장사 행상 – 양키물건 장사 – 미군댄스홀 댄서와 성매매 -미군들과의 살림 – 파출부 – 현재는 작은 집의 가게세와 방세 수입 및 국민기초수급 대상

    이북에서의 직장과 남한에서의 직장이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그것은 생산직 노동이나 비공식 노동이냐의 차이 일뿐 당시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제국주의 일본과 미국이 한반도를 수탈/지배하는 과정에서의 (최)하위노동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산업도시 평양에서 있었던 공장들은 일제가 대동아 전쟁의 물자공급이나 자금조달을 위해 운영했던 공장들이었고, 그 곳들에서 김미숙은 가장 낮은 지위의 여성노동자로 일했다.

    또한 이남으로 내려와 노동이니 직장이랄 것도 없는 일들(시누네 살림, 행상 등)을 하다가 양색시 대상 옷장사를 계기로 서울과 수도권 인근의 미군부대 주변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양키물건 장사, 미군댄스홀 댄서와 성매매, 미군과의 살림 등으로 생계를 잇다 아들이 목사공부를 시작하면서 미국인 가정의 파출부를 한다. 

    이북에서는 집에서 살림하기 싫어서 나선 직장생활이었지만, 이남에 오자마자 정착과 생계를 위해 시누네 살림집과 바의 잡일 등 살림을 도맡을 수 밖에 없었다는 점, 미군 주변 인근에서의 성을 매개로한 돈벌이들을 거쳐 육십이 되어 다시 미국집 파출부 일을 해야 했던 점 등, 성을 매개로 한 돈벌이 이외에는 가장 싫어하던 “가사일“ 혹은 가사노동의 굴레를 생계를 위해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 역시 여성인 김미숙이 피할 수 없었던 딜레마라 하겠다.

    다행이 양키물건 장사와 미군들과의 살림들을 기회로 모든 돈과 셈 확실하고 놀지 못하는 부지런함 덕에 집을 일찌감치 사놓았고, 그 집이 자원이 되어 아들의 늦은 목사공부와 본인의 노후 삶의 기반이 되고 있다.

    그리고 “온갖 고생을 하여 마련한 ‘그녀의 집’조차 그 사분지 삼을 국가에 빼앗긴” 김미숙은 구청을 줄기차게 쫓아다니며 항의를 한 끝에 “국민기초수급권”을 받아 냄을 통해, 미군 주변의 다른 성매매 여성들이나 빈곤층 여성가장들이 겪곤 하는 소외와 가난의 굴레에서 얼마만큼 비껴나 있다 하겠다.

    성 / 남자 / 가부장 / 결혼제도 / 낙태 / 신앙

    어린 시절의 성평등한 가정 분위기, 경제적 주체이자 외향적인 성격의 청년 시절 등으로 김미숙은 당시의 농촌/봉건 사회의 여성들과는 다른 성의식을 갖게 되었다.

    일제 정신대 공출을 피한 갑작스러운 결혼 역시 (그 남편에 대한 호감 여부와는 상관없이) 김미숙을 결혼제도 속의 여성으로 묶어놓을 수 없었다.

    결혼에 대한 김미숙의 이 태도는 돈 떨어지고 연줄 떨어진 남한에서 급한 김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한 남성과의 결혼생활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녀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성향이 결혼제도의 틀에 그녀 자신을 남겨둘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임신한 여자“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평양 가족과 주변인들)의 사고방식의 벽을 깰 수 없었다거나 낙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임신과 출산으로 이어진 ”자녀양육”의 책임을 그녀는 최선을 다해(경제적 목적의 재혼을 포기하면서까지) 감수하며 산다.

    김미숙에게 결혼제도 바깥(혹은 재혼)의 한국과 미국의 남성과 성은, 나름대로는 경제적 안정을 얻어보려거나 탈한국/미국진입의 기회로 잡아보려는 생계와 탈출/상승의 전략이었으나, 그 전략은 늘 실패하여 스스로 “이깟 놈의 것, 실속은 없고 속곳 밑만 닳는 짓”으로 결론 내려진다.

    그녀에게 “남자는 열 여자 스무 여자가 괜찮지만, 여자는 그렇게 몸 함부로 굴리면 안된다.”든가, “남자가 소금섬을 매고 물루 들어가라 그러면 들어가야 하는 게 여자.”라든가, 주변 다른 할머니들에게서 보이는 청상과부들의 절개 등은, “그래, 너희나 그러구 살아라.”며 아무 상관 거리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미군들에게 몸을 함부로 굴린 것과 숱한 낙태” 등을 이유로 회개를 종용해오는 목사 외아들과 목사 외며느리의 주문에 대해, “저 목사 만든 돈이 어디서 나온 거며, 에미 팔십여덟이 되도록 생활비 한번 줘본 적 없는 놈을 여자 혼자 멕이고 키우고 목사 만드느라고 한 정당한 돈벌이여서 도무지 회개가 나오지가 않는 생계노동이자 삶의 전략이라고 항변한다.

    많을 수밖에 없었던 낙태 역시, 더 이상의 불행을 만들지 않기 위한 선택이자 잘한 결정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그 아들며느리 목사네들이랑 같이 사는 것이 바로 지옥이고 ”내 집에서 혼자 사는 것“이 천당이라며, 독거를 하고 있다.

    나아가 “지네들 하나님은 어쩐가 몰라도, 내 하나님은 딱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있는 하나님이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란지는 나는 모르겠고, 나한테 하나님은 그냥 누가 내 평생을 안쓰럽게 지켜봐 준거, 그 분이 내게는 하나님이야. 누가 나를 안스러워하며 지켜 봐 준 덕에 내가 그 험한 세상을 이렇게라도 살았구나 싶어서 감사한 거지.” 라며, 목사외아들의 가부장적 판단자로서의 하나님과 구별을 한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 떨려나고 / 진입에 실패하고 / 혹은 스스로 포기를 결정하며, 고난으로만 치환되지 않는 자신만의 삶의 과정과 전략으로 지은 ‘그녀의 집’을 천국으로 느끼며, 김미숙은 오늘도 여든여덟 여성노인의 생활과 정체성을 재구성하며 살아나가고 있다.

    필자소개
    1957년생 / 학생운동은 없이 결혼/출산 후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천주교사회운동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됨. 2000년부터 진보정치 활동을 하며 여성위원장, 성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공공노조에서 중고령여성노동자 조직활동. 현재 서울 마포에서의 지역 활동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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