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과 열사들...
    [아빠의 현대사-50]노동자들이 죽음으로 절규하는 이유
        2013년 01월 22일 11: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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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호는 유시민의 역사의식의 경계 밖에 있다. 유시민에게서 1987년 6월의 요구는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완성해야할 과제로 받아들이지만 1987년의 7~9월의 요구는 남의 일, 예컨대 권영길이나 민주노동당이 풀어야 할 일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시민의 국민화(국민통합)는 한계를 드러내며 설득력을 잃는다. 그의 민주주의는 상대화된다… 하지만 6월 항쟁의 이 혁명적 국민통합이 이러한 상대성 속에서, 7~9월에 대한 배제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혁명을 필요로 하게 될 불구적 혁명으로 남게 될 것이다. 배달호의 죽음이 시사하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조정환, [노무현의 승리와 배달호의 죽음 속에서 생각하는 유시민의 참여민주주의] 중에서)

    대통령이 민주노총을 방문하다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식도 하기 전에 민주노총 사무실을 방문했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당시 영등포에 있던 사무실을 직접 방문하여 “민주노총이 진지하고,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협상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한다.

    노동정책에 있어 뭔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줄 정도로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1995년 만들어졌으나 무려 4년이 지나 99년 11월 23일에야 법적으로 인정될 정도로 정부의 탄압을 받던 민주노총을 대통령이 직접 방문했다. 그 자체가 파격이었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자체가 획기적인 것이었다. 우리나라처럼 학력 위주의 사회에서 대학교도 못 다닌(!) 상업고등학교 출신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놀랄만한 일이었다.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사법고시에 붙어 변호사가 되고, 대통령이 되었다. 청소년들이 열광할 만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1988년 TV로 생중계된 국회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의 활약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어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면서 국민들에게 알려진다.

    정치적으로는 몇 번의 아픔을 겪은 후에 2002년 민주당이 ‘국민참여 경선제’라는 새로운 방식을 택함에 따라 당 후보가 되고, 결국 한나라당의 이회창을 물리치고 극적으로 대통령이 된다.

    7만 명에 이르는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자원봉사, 미디어와 인터넷을 이용한 선거운동, 희망돼지 저금통으로 표상되는 국민의 자발적 후원금 등 그가 선보인 선거운동 자체도 새로운 것이었다. 물론 희망돼지는 민주노동당의 것을 베낀 것이지만 말이다. 주로 젊은 층으로 구성된 ‘노사모’의 열광적인 활동은 전혀 새로운 정치운동으로 나타났다. 2012년 안철수를 지지하던 젊은이들보다 훨씬 열광적이고, 조직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노동자들의 아픔을 잘 아는 인권변호사로 알려져 있었다. 1987년 8월 이한열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멀리 거제 대우조선의 이석규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생긴다. 그러자 그는 직접 거제에 내려가서 투쟁에 결합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장례식 방해’와 ‘노동쟁의조정법상 3자개입 위반’ 혐의로 구속, 부산구치소에 수감된다. 이후 변호사 업무 정지처분과 벌금 1백만원을 선고받는다.

    노동자투쟁 참여 때문에 구속 당시의 노무현 대통령

    “이 사망은 공권력이 국민을 적으로 보는 전투적 행위에서 빚어진 살육” “구사대의 폭력에 대하여는 수수방관하던 공권력이 노동자의 폭력에 대하여는 구속으로 나서는 편파적 개입의 연장선상에서 저질러진 노동자에 대한 적대행위”라던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왜 그 정권아래서 집회를 하다가 노동자와 농민 세 명이 경찰의 폭력아래 ‘살육’을 당해야 했을까? 그것도 백주대낮에 말이다. 왜 그의 입에서 불과 열 달 후에 “민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 하는 단체가 아니다.”라는 극언이 나오게 될까?

    노무현 대통령은 2월 25일 취임사를 통해 “노사화합과 협력의 문화를 이루도록 노사 여러분과 함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노약자를 비롯한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복지정책을 내실화하고자 합니다. 모든 종류의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랬을까?

    열사, 열사, 또 열사

    선거가 끝나고 며칠 뒤인 새해 벽두인 1월 9일 나이 오십을 넘긴 두산중공업의 배달호라는 이름의 노동자가 분신했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분이 분신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했다고 해서 놀란 기억이 새롭다.

    또 10월 26일에는 우리 연맹의 이용석이라는 서른 두 살의 젊은 노동자가 분신을 한다. 금속사업장의 나이 먹은 정규직 노동자와 공공부문 사업장의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우리나라 모든 노동자가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상징이라도 하는 걸까?

    2003년도는 ‘열사 정국’이라고 할 만큼 많은 노동자들의 죽음이 계속 이어진다. 마치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5명의 노동자가 죽은 것처럼 말이다.

    노무현 시대와 박근혜 시대의 노동자 삶과 죽음

    열사가 무슨 뜻인지는 알지? 열사(烈士)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저항하다가 의롭게 죽은 사람 혹은 강력한 항의의 뜻을 자결로서 굳은 의지를 드러낸 사람”을 뜻한다.

    대표적으로는 고종의 밀사를 가지고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일제의 침략시도인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불법성 그리고 일제의 침략성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 할복 자결을 한 이준 열사를 얘기한다.

    저항은 해야 하겠는데 뾰족한 수단은 없고, 막바지 벼랑으로 몰릴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우리나라는 자살률이 세계 1위다. 오죽했으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두고,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 봐야한다. 물론 나는 분신자살 같은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살아서, 끈질기게 싸워야 한다고 본다.

    훗날 이병렬이라는 한 노동자가 분신 자살을 하여 투쟁을 할 때 집행위원장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아랍의 카타르 민영방송인 ‘알자지라 방송’과 인터뷰를 한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분신이 하나의 전통입니까?”라고 기자가 물었다. 깜짝 놀랐다. 아니라고 얘기했지만 외국에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동자가 없으면 정말 좋겠다.

    배달호, 자본의 노동자에 대한 압박

    김대중 대통령은 공기업 개혁이라는 명분 속에 한국중공업을 두산그룹에 헐값으로 팔아치웠고, 두산그룹의 박용성 회장은 한 늙은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당시 두산중공업은 노조간부들을 상대로 65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조합원들의 재산과 임금을 가압류했다.

    “두산이 해도 너무한다. 해고자 18명, 징계자 90명 정도.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악랄한 정책에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사원의 고용은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동지들이여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해주기 바란다. 불쌍한 해고자들 꼭 복직 바란다. 나는 항상 우리 민주광장에서 지켜 볼 것이다. 내가 없더라도 우리가족 보살펴 주기 바란다. 미안합니다.” 21년동안 회사 생활을 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다.

    유서에 쓴 것처럼 배달호 열사는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으로 임금과 재산을 가압류당한 것 때문에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노조 투쟁으로 구속되고, 석방된 뒤에도 3개월 정직의 징계를 받았다. 이후 현장에 복귀했지만 월급 50%와 퇴직금, 집이 가압류된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배달호 열사의 영정과 집회 모습

    통계를 보면 2003년 10월 31일 기준 전체 노동자들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액은 손해배상 청구액 총 574억 9971만 6,897원이고, 가압류 금액은 총 781억 6266만 6,416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출근을 해도 재미가 없다. 해고자 모습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해지고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하면서 해고자 문제를 안타까워하던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헌법은 노동 3권을 보장하고 있다고 했다. 파업의 자유를 준 이유는 힘이 없는 노동자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생산을 정지하고, 노동을 거부함으로서 힘이 있는 자본가에게 저항하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를 사용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방해한다는 게 말이 되는 얘기일까? 임금 및 재산 가압류는 대단히 두려운 것이다. 웬만한 노동자들은 위축되지 않을 수 없고 파업 참가를 꺼리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최강서 동지의 경우에도 회사가 청구한 손해배상 액수는 무려 158억원이었다. 2012년에 투쟁을 한 MBC 195억원, 현대자동차 179억원, 쌍용자동차 237억원등의 손해배상이 노조에 청구되어 있다.

    당시 두산중공업의 회장은 박용성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시절에는 공공연맹의 양경규 위원장을, 두산인프라코어의 회장 사절에는 전재환 금속노조 위원장을 해고시킨다. 민주노총의 골간이라 할 양대 연맹의 위원장을 사업장에서 해고한 셈이다. 그만큼 노동조합에 대해 악랄하게 탄압했다.

    형제끼리 돈을 가지고 싸워서 유명해진 ‘형제의 난’을 통해 수많은 범죄행위가 폭로되었지만 자본에 관대한 한국사회의 관례에 따라 불구속기소 된다. 두산중공업의 노조탄압과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를 대충만 봐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800명 이상의 조합원이 징계를 당할 정도였다.

    이후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두산제품 불매운동도 하고, 무수히 많은 집회와 투쟁을 전개한다. 결국 62일 만에 손해배상 가압류 등을 철회시키고 투쟁을 끝낸다. 동대문 운동장 근처에 있는 두산타워 앞에서 관을 불태우면서 투쟁을 한 기억이 새롭다. 얼마 전 배달호 열사의 10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보다 자세한 얘기는 김순천이 쓴 ‘인간의 꿈 –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평전’을 권한다.

    이용석,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라

    배달호 열사가 나이 먹은 정규직 금속노동자였다면 이용석 열사는 젊은 비정규직 공공연맹의 노동자였다. 근로복지공단의 비정규직노동자로서 노조의 광주전남본부장이었던 그는 당시 32살이었다. 10월 26일 종묘에서 열린 “비정규직 차별철폐․정규직화, 권리보장 입법 쟁취를 위한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 참가햇다가 집회가 끝나갈 무렵인 오후 4시 10분 경 분신했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하라.”는 게 그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이용석 열사 장례식의 노제 장면

    근로복지공단은 노동부의 산하 기관이었지만 앞장서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차별을 조장해 왔다. 공단은 교섭의 당사자가 아니라고 버티다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사용자로 결정되자 이번에는 불성실한 태도로 교섭에 임했다.

    이용석은 “일생동안 우리 공부방 어린 학생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은 그들이 내 삶의 스승이자 등대였습니다. 내 어두운 미래와 긴 터널 속에서 나를 빛으로 깨우게 한 나의 동반자였습니다.”라며 공부방 학생들에 대해 애정을 가졌던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자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는 없지만 이를 악물고 울지 않을 것입니다.”이라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생각한 것은 무엇일까? “ ‘무모하다, 그래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라는 의문보다 거기에 서 있는 순간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음에 마음이 제일 편안함을 느꼈습니다.”라던 아름다운 청년이 말이다.

    결국 40일을 투쟁한 끝에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노조 인정 등에 합의하고 장례식을 치른다. 첫 눈이 무척이나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이후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용석 가요제’를 2009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인휘가 쓴 책 ‘이용석 노동열사 평전 – 날개달린 물고기’를 권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노동자들이 분신이 잇따르자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한다.

    죽음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애정이 없어진 셈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훗날 그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나와 네 엄마는 시청광장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 갔었다. 이한열의 장례식이 치러진 그 곳이었다.

    필자소개
    이근원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을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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