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 '등급' 판정 받아야만,
    장애인 취급받는 이상한 사회
    [함께 살자 연대모임] 광화문 장애인차별철폐 농성장 취재기
        2013년 01월 21일 04: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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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는 개성이다.’ 한동안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참 좋은 말인 듯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말이다.

    동명의 책이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에 대해선 넘어가자. 여전히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주위에 흔히 있으며, 사회 환경에 의해 차별받을 수밖에 없는 장애인들, 특히 사회로부터 격리된 중증장애인들은 ‘장애는 개성이다’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기도 한다고. 왜일까?

    ‘장애인 복지법’을 고수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보자. 먼저 장애인은 자신의 장애를 등록해야만 한다. 그리고 국가는 그들에게 등급을 매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장애를 가진 이들은 서비스를 받기위해 장애를 등록하고 어떻게든 중증임을 입증해야만 하니까. 그리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부는 적은 예산 규모에 맞춰 서비스 제공자를 줄여야만 하니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존재적 차별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대체 어떤 개성이 신고하고 등록하고 심지어 정부로부터 등급 딱지를 받는가? ‘장애 등급제’ 가 존재하는 사회란 ‘장애는 개성이다’라는 견해를 전면 부정하는 곳이다.

    광화문에서 농성중인 장애인들은 ‘장애 등급제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장애인 모두에게 무한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포스트모던에서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장애를 판단하는 사회적 시각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자는 이야기다.

    현 ‘장애인 복지법’하에서 3급으로 등록된 장애인은 다리가 골절되는 사고를 당하다라도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왜? 3급이니까. 의료가 규정한 등급에 맞춰 정부는 딱 3급만큼의 서비스를 지원하니까. 외국인 장애인이 한국에 오면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왜? 장애인으로 등록 되어있지 않으니까.

    이렇게 서비스 진입을 가로막는 등급제도를 제거해보자. 1급, 2급, 3급 따위의 딱지가 사라지면, 골절과 같은 일시적 장애를 비롯해 이동장애, 시각장애, 성격장애, 약물장애, 적응장애, 중복장애등 수많은 장애가 나열된다.

    등급이 사라지자 다양성이 나열된다. 자신의 장애 등급을 등록할 필요가 없는 개인은 각자의 장애에 따라 필요한 서비스를 요청하고, 국가는 장애상태와 장애인이 처한 환경요건에 맞춰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중증장애인뿐만 아니라 사고로 인한 일시적 장애도,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장애도 복지 서비스 대상이 될 수 있다. 개인이 처한 환경요건에 따라 서비스 제공대상 판단이 이뤄지는 것. 이로서 ‘장애도 개성’이 될 수 있는 기본 환경이 갖춰진다.

    장애는 개인의 특질인가? 다시 말해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는 장애인, 그 장애란 개인 신체의 특별한 성질로부터임을 뜻하는 것인가? 한국사회에선 당연히 그러하다. 집밖을 마음대로 나서지 못하는 것도, 음식점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것도, 취직을 못하는 것도, 외진 곳 시설 속에 갇혀 사는 것도, 그 모든 것은 장애 때문이고, 장애는 그 개인이 가진 특질이라 인식한다.

    하지만 장애인 등급제가 폐지된다면 장애의 다양성만이 나열된다고 했다. 장애의 정의를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는 사람이라 했을 때, 청각장애, 시각장애, 지적장애 뿐만 아니라 임산부나 약물중독,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외국인도 장애인이 된다. 외국이란 ‘환경의 변화’로 인해 발생한 이 장애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언어를 배울 때까지 소통의 장애를 걷어내는 통역서비스를 제공하면 된다. 환경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면 장애는 해소되는 법.

    다른 모든 장애 역시 이와 같다. 예를 들어 이동장애란 이동에 제약을 가져오는 환경을 바꾸면 되는 것이니까. 이렇게 장애를 개인의 특질이 아닌 사람과 환경의 관계로 파악하고, 개인이 처한 환경요건에 따라 서비스 제공 판단이 이뤄지는 것이 ‘장애 등급제 폐지’요구의 근간이다.

    지난 대선에서 뜨거운 이슈중 하나가 ‘반값 등록금’이었다. 이 이슈가 튀어나올 때 마다 궁금했던 것 하나. 왜 반값이어야 하는가? 반값이면 다 해결 되는 것일까? 독일에서의 유학시절, 독일인들에게 커다란 웃음을 선사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 대학교 등록금이었다.

    그들이 크게 웃었던 이유는 터무니없이 비싼 등록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비싼 등록금을 누가 내는가라는 것. 부모의 도움 없이 등록금을 마련하는 게 불가능한 한국 대학생들. 성인들. 독일인들의 ‘성인’이라는 인식하엔 발생할 수 없는 사건이기에 어이없어 터진 웃음이었다.

    성인이란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나이이며, 사회는 이들이 독립할 수 있는 환경 요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 마땅한 것. 자고로 학문을 하는 대학생이라면, 학업에 전념하고 남는 여가 시간을 이용한 짤막한 알바로 마련할 수 있는 게 등록금이어야 할 게다. 알바가 최소임금의 또 다른 이름이라 했을 때 등록금은 얼마로 계산되어야 할까?

    지난해 8월 21일, 장애인들이 광화문에서 농성을 시작하며 주장한 것이 ‘장애 등급제 폐지’와 함께 ‘부양의무제 폐지’다.

    부양의무제에 대한 한 예를 들어보자.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해왔고, 전세 아파트 정도를 소유한 50대 부부가 30세를 바라보는 발달장애 자식을 두고 있다고 하자. 이 부모는 언제까지 부양책임을 져야할까? 대략 계산되는 재산을 기준으로 보자면 정부가 책임을 질 가능성은 없다. 허리가 구부러질 때까지 부모가 부양책임을 져야만 한다.

    광화문 장애인 차별철폐 농성장 모습(이하 사진= 김김명준)

    같은 경우 미국은 어떨까? 부모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것은 차별이란다. 같은 세금을 내는 국민임에도, 비장애 자식을 둔 부모들은 자식이 사회생활을 하면 부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장애 자식을 둔 부모들은 무한정 책임을 져야만 하는 현실이 차별이라는 것.

    영국의 경우엔 어떨까? 18세 성인이 되기 전에 방문하여 어떠한 계획이 있는지를 조사한다. 학교를 다닐 것인지, 취업을 할 것인지, 가족과 함께 계속 살 것인지, 독립형 주거 서비스를 원하는지. 성인이 되면 그에 맞는 시스템 지원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부양의무제 폐지의 기본인식은 위에서 얘기한 등록금 문제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성인에 대한 사회 인식의 문제점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 성인이라면 독립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고, 사회는 성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독립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구성되는 게 당연한 것이다. 부양의무제로, 자식의 수급권을 위해 부모가 자살하고, 장애인이 독립을 위해 부모와 연락을 끊어야 하는 현실 앞에서 너무 추상적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것일까?

    한국사회는 소수자를 배척한 채 발전했고 여전히 그러하다. OECD 가입국 중 사회복지 공공지출이 최하위인 한국은 박근혜의 복지공약에 대해 ‘유럽의 급진좌파’에 해당하는 정책이라며 염려하고 있지 않은가. 비장애인에 의해, 비장애인을 위해 건설된 환경 속에서 장애인은 당연히 설 자리가 없는 법. 배척당한 사회적 소수자는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그들에겐 인권이 부재하기 마련이다.

    스웨덴 사회복지는 정상화(normalization)를 기본원칙으로 두고 있다.

    정상화(normalization)란 서로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지역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 그리하여 모두가 함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것이 정상적인(normal) 인간사회라고 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의 사회복지란 경제가 번영한 후 남은 몫을 복지비용으로 돌리는 게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란 이렇게 꾸려지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닐까?

    내린 눈이 차마 녹기도 전에 뭉치고 얼어붙은 첫 추위로 낙마사고에 유의하라는 뉴스가 한창일 때, 활동보조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한 형님이 광화문 농성장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하루를 꼬박 보내고 저녁에 들어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불 속으로 몸을 넣었는데. 한 새벽 세시쯤 됐나?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한 게….” 상대적으로 혈액순환이 좋지 않은 장애인에게 추위란 그렇다.

    대여섯, 그 이상이 둘러앉아 북적이던 농성장은 첫 추위를 지나며 두어 명만이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추위로 인원을 최소화하는 수밖에. 쓸쓸히 투쟁하는 그들의 심정을 담은 듯, 천막 한 구석엔 침낭이 구깃구깃 놓여있었고, 고장으로 고개를 푹 숙인 열풍기는 휠체어에 앉은 발만을 간신히 덥혀주고 있었다. 장애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제 폐지. 장애인을 시혜적 복지대상으로 규정한 ‘장애인복지법’을 폐기하고 ‘장애인 권리 보장법’ 제정을 위해,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들은 150일이 넘도록 광화문에 나와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거창한 연대를 구하지는 않겠다. 먼저 그들의 요구가 비장애인의 삶과 거리가 먼 게 아닌, 사회 구조의 핵심을 관통한다는 것에 동의를. 그리고 광화문을 지날 일이 있거들랑, 해치광장 아래쪽 지하보도에 위치한 농성장을 방문해 따듯한 손길 전해주시길. 행여 먼 곳에 있어 방문이 어려우시거든, 정다운 손 편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은 어떨까.

    주소: [150-804]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동 3가 395-25 한얼빌딩 3층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앞

    광화문 현장엔 주소가 없는 관계로 전장연에 편지를 보내주시면 전달해드립니다. 보내실 때 광화문농성장이라고 적어주세요

    윗글은 광화문 농성장에서 이루어진 두 번의 인터뷰(이규식님, 김정하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페이스 북에서 ‘함께살자 연대모임’에서는 전국 농성장에 손 편지를 보내고 농성현장을 취재하고 농성장 정보를 모으고 현황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함께살자 연대모임’은 정치적 지향과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소리연대 , 사회적 파업 연대기금  등 다양한 연대활동이 SNS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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