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허구는 현재의 은유이다
    [서평] 『바람의 열두 방향』(어슐러 K. 르귄/ 시공사)
        2013년 01월 19일 03: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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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열두 방향》판타지와 SF소설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 어슐러 K. 르귄의 초창기 단편집입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르귄의 《땅바다》시리즈는 J.R.R. 톨킨의《반지의 제왕》, C.S. 루이스의《나니아 연대기》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지로 꼽히고 있을 정도로 이미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라있습니다. 그 명성은 아마도 심리학, 인류학,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있는 르귄의 예리한 통찰력뿐만 아니라 그녀의 풍부한 문학적 은유와 유려한 문장 덕분일 것입니다.

    르귄의 초창기 단편집인 《바람의 열두 방향》은 일종의 ‘회고전’입니다. 그녀가 쓴 모든 단편이 실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단편을 연대순으로 실은 책입니다.

    책에 실린 단편은 <샘레이의 목걸이>, <파리의 4월>, <명인들>, <어둠상자>, <해제의 주문>, <이름의 법칙>, <겨울의 왕>, <멋진 여행>, <아홉 생명>, <물건들>, <머리로의 여행>,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땅속의 별들>, <시야>, <길의 방향>,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혁명 전날>로 꽤 두툼한 이 책은 총 17편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SF는 허구지만 모든 허구는 현재의 은유이다”

    르귄은 판타지와 SF가 갖는 허구성과 그것이 갖는 이중적인 속성에 주목합니다. 그녀는 가장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가장 현실적인 것들을 재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들은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닌, 현실적인 문제를 깊이 고민하는 날카로운 공상입니다.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두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혁명 전날>은 허구적인 이야기에 빗대어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고자하는 르귄의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평온, 아름다움, 즐거움으로 가득한 ‘오멜라스’라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멜라스의 주민들은 언제나 행복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바보인 것도, 기술 문명이 존재하지 않는 원시적인 사회에 사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행복한 열정으로 가득함과 동시에 충분히 지적인 사람들입니다. 오멜라스의 주민들은 종교인들과 군대가 사회에 미치는 해악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오멜라스에 사원은 있지만 사제는 없습니다. 대부분은 종교를 갖고 있지만 사람이 사람을 속이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멜라스에는 군인이 없습니다. 이들은 타인을 무참히 짓밟고 학살하는 것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그리고 영혼을 깊이 탐구하는 철학적 사색으로 즐거움을 얻습니다.

    마치 아크로폴리스에서 시민들이 정치를 토론하고 철학을 이야기했던 고대 그리스 시대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유토피아와 같은 오멜라스에는 지하실이 있습니다. 한줄기의 빛도 비치지 않는 지하실에 한 아이가 있습니다.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이 아이는 오래전부터 이 지하실에 갇혀있습니다. 오멜라스의 성인들은 모두 아이가 이곳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멜라스의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접어들 무렵, 아이들은 이 지하실을 방문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충격을 받고 이 아이를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어 합니다. 아이를 지하실에서 꺼내어 줄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이내 아이들은 그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인정하고 맙니다.

    “물론 아이를 그 지독한 곳에서 밝은 햇살이 비치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중략) 당장 그날 그 순간부터 지금껏 오멜라스 사람들이 누려 왔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계약인 것이다. 단 한가지 사소한 개선을 위해 오멜라스에 사는 모든 이들이 누리는 멋지고 고상한 삶을 맞바꾸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하실 안에서 벌어지는 죄악을 방기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pg. 478

    한 사람의 희생으로 자신들의 행복은 더욱 갚진 것이 된다고,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겁니다. 니체가 찬양하고 아렌트가 그토록 염원했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정치와 철학적 사유는 사실 수많은 노예들의 노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멜라스의 사람들과 고대 그리스 시민들이 ‘방기했던 죄악’은 비단 그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모두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종종하곤 합니다. 잔인한 사람들은 ‘소수’의 강자에게 희생을 요청하지 않고 ‘약자’에게 이 논리를 따를 것을 종용합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누군가’는 오멜라스의 지하실과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처참하게 살아가게 되겠지요. 르귄은 그 열악한 환경을 오멜라스라는 가상세계의 지하실로 묘사했지만 이는 우리의 일상 곳곳에 포진해있습니다. 회사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이루어지는 대규모 정리해고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지하실을 잊고 때로는 잊었던 지하실을 굳이 상기하며, 희생이 있기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오멜라스의 사람들입니다.

    “지하실의 아이를 본 청소년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에 차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아예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중략)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는 듯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pg. 480

    르귄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그리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습니다. 르귄은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여 얻은 오멜라스식의 행복이 얼마나 추잡한가를 스스로 명확히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단편 <혁명 전날>은 이렇게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이 일으키는 혁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혁명의 과정에서도 모순은 끊이질 않습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스포일하지 않기 위해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르귄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비유가 와 닿았다면, 너무나 추워 심지어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영하의 날씨에 비현실적인, 그러나 현실적인 《바람의 열두 방향》을 펼쳐보길.

    필자소개
    연세편집위원회 편집위원 hwangji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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