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민주주의, 거듭나야 한다
    [경제와 사민주의] '복지국가론'과 '공정국가론'의 차이
        2013년 01월 17일 11:4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준비위원이 <레디앙>에 ‘경제와 사민주의’라는 주제로 고정적으로 글을 게재하기로 했다. 정 위원은 사회민주주의 담론이 확산되는 것은 반기면서도, 사회민주주의가 추상적이고 당위적인 이념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시스템과 구조를 혁신하는 것을 담고 있는 실천적이고 급진적인 이념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시장주의적 개혁이나 주주자본주의적 재벌개혁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왔다. 정 위원을 글을 계기로 경제민주주의와 경제구조개혁에 대한 논의가 더욱 진전되기를 바란다. 이번 글은 사민주의센터에 게재하고 있는 ‘경제민주주의는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주제로 4회 연재하는 글 1,2회분이다. 이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계간 <민주> 2013년 신년호에 실리기도 했다. <편집자>
    —————————————————–

    유신독재를 청년기에 경험한 50대 유권자들이 왜 ?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왜 그렇게 많은 유권자들이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자발적으로 선택했을까? 많은 분석이 나오지만, 가장 주목되는 현상은 역시 90%의 투표율을 보인 50대 유권자들의 투표 행위이다.

    50대 투표자의 약 2/3가 박근혜를 택했다. 그런데 50대가 누구인가? 흔히 5060이라 하여 50대와 60대를 하나로 묶어서 ‘보수화된 세대’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50대의 인생 경험과 문화적 코드는 그 윗세대인 60대와 사뭇 다르다. 전쟁 직후인 1954년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인 50대와, 식민지 치하 또는 해방정국 및 전쟁의 와중에서 태어난 60대는 다르다는 것이다.

    흔히 노래방과 맥주집 간판에 ‘7080’이 붙어 있는 것처럼,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시기에 20대와 30대 청춘을 겪은 이들에게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코드가 있다. 그들은 최초로 뽕짝이 아닌 조영남, 윤형주, 김세환 등의 세시봉 노래와 송창식, 서유석 등의 통기타 음악을 들으며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세대이다.

    지금도 7080 노래방에 가면 50대들은 송창식의 ‘고래사냥’과 이장희의 ‘그건 너’를 노래 부른다. 김민기 또는 양희은과도 어울렸던 그런 가수들과 그런 노래들의 상당수가 군사독재에 악압당했다. 그들 노래의 상당수가 존 바에즈와 비틀즈의 음악처럼 서구 68혁명의 영향 하에 있었다.

    1970년대의 살벌했던 박정희 유신 독재 치하에서 위의 노래들을 부르며 20대 청춘을 보내면서 숨죽여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이들이 오늘날 50대이며,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 장준하의 죽음, 긴급조치9호와 광주학살 등 개발독재의 폭압적 만행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한 세대이다. 즉 그들은 오늘날 2030 세대에 비해 군부독재가 무엇인지 절실히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다수가 박근혜를 찍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본래 민주주의보다 독재를 더 좋아했다는 건가? 전혀 그렇지 않다. 1980년대에 30대 직장인이 된 그들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과정에서 젊은 넥타이 부대로 또는 젊은 공장 노동자 부대로 나서서 386세대 대학생들과 함께 수백만 명의 거리 항쟁에 나섰던 이들이다. 그리고 1997년과 2002년에 40대였던 그들의 과반수 이상이 김대중, 노무현 후보를 선택하였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50대가 된 그들의 다수가 왜 이번에는 박근혜를 자발적으로 선택했을까? 왜냐하면 그들이 체험한 과거 김대중·노무현 민주 정부 10년이 그들의 다수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40대였던 이들의 다수가 민주정부가 시행한 이른바 ‘시장개혁’과 함께 처음 등장한 명퇴와 희망퇴직, 정리해고의 첫 희생자들이었다. 그렇게 밀려난 이들의 상당수가 퇴직금으로 통닭집, 피자집, 음식점을 차렸고, 그 중 다수가 파산하여 빈곤층이 되었다. 지금 은행대출과 신용카드 대출을 못막아 전전긍긍하는 신용불량자 중에도 50대가 가장 많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1990년대 말부터 상시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대규모 명퇴와 희망퇴직, 정리해고 등의 사태가 경제민주화-재벌개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문재인과 안철수, 이정희와 심상정 후보 등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복지공약 및 노동 공약에 비해서도) 가장 우선적이고 시급한 과제라고 국민들에게 제시한 경제민주화-재벌개혁, 또는 재벌해체의 슬로건이 그들을 감동시켰을까? 많은 이들에게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시장개혁과 경제민주화, 국가개입

    민주 세력 내에서는 정부주도형 경제보다는 시장주도형 경제가 바람직하며 특히 투명한 시장, 공정한 시장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담론이 지배해왔다.

    ‘시장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은 관치경제고 박정희식 경제의 유산이다’는 생각에서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해체하자고 했고, 그러려면 더 많은 ‘시장 논리’, 더 강한 ‘시장 규율’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진보 경제학자들의 시각이었다.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준비위원

    그리고 그것과 동일한 관점에서 한국 경제를 시장주도형 경제로, 특히 선진국 중 가장 시장 논리의 힘이 강한 미국식 자본주의로 바꾸어 놓겠다고 한 것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였다.

    그런데 2008년 말에 시작된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는 과거 김대중·노무현 민주 정부들이 추구했던 ‘글로벌 스탠다드’ 즉 미국식 자본주의를 향한 이른바 ‘시장 개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똑같이 시장 논리 강화, 시장 규율 강화의 시각을 가진 것이 보수적인 신자유주의자들, 시장만능주의자들이었고, 이명박 정부는 그 생각을 극한까지 추구했다. 민주 세력은 그런 이명박 정부의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고, 그 과정에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민주 세력 내에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물론 이번에는 박정희 식이 아닌 다른 방식, 다른 형태의 국가개입이었다. 몇 년 전부터 민주 세력 내부에서는 두 가지 형태의 다른 국가개입론이 등장했다. 하나는 복지국가론이고, 또 하나는 공정국가론이다.

    복지국가론이란 필자처럼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만들자는 입장이며 특히 보편적 복지와 노동민주주의(노동해방)를 강조한다. 그에 반해 공정국가론이란 반칙·특권 세력인 재벌을 (그리고 모피아를) 정부가 규제해서 ‘반칙과 특권이 없는 공정한 시장질서’을 만드는 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 입장에 선 사람들은 복지국가보다 경제민주화를 앞에 내세운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문재인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 비하여 경제민주화-재벌개혁을 더 강하게 이야기했고, 순환출자 규제와 지주회사 규제, 금산 분리 등의 재벌규제를 놓고 박근혜 후보의 재벌공약은 진정성이 없다며 비판했다. 복지 정책보다는 경제민주화-재벌개혁 정책에서 박근혜 후보와 차별화하겠다는 문재인 후보와 진보 진영의 전략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물론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복지국가고 경제민주화고 할 것 없이 선거판에서 핵심 쟁점이 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안철수, 문재인 후보만이 아니라 박근혜 후보까지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하겠다고 하는 통에, 미래 비전이나 정책을 가지고는 후보간 차별화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문재인 후보 측은 정책 대결이 아니라 인물 대결, 과거사 논쟁으로 선거 전략을 끌고 갔는데, 결국 그것이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그것이 문재인 캠프의 근원적 한계였다. 박근혜 후보가 하겠다는 복지국가가 스웨덴 수준도 아니라 미국 수준도 안 되는 낮은 수준인데, 그렇다면 문재인 쪽은 더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를 제시하면서 박근혜와 차별화해야 했다.

    물론 유세의 마지막 단계, 특히 2차 및 3차 TV토론에서 문재인 후보는 건강보험과 같은 복지 정책에서 박근혜 후보를 압도했다. 그렇지만 선거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제시된 차별화된 복지 정책으로는 국민들에게 어필할 시간이 없었다.

    공정한 시장질서가 복지국가보다 더 정의롭다?

    많은 사람들은 빈민과 서민, 중산층을 도와주는 복지국가 정책은 빈부격차를 완화시키는 정의로운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복지국가 운동을 벌여온 필자 역시 복지국가야말로 사회정의와 인간존엄성, 자유와 평등을 고취하는 체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먼저 보수적인 시장주의자들 즉 신자유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복지국가는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못한 체제이다. 왜냐하면 복지국가는 ‘개미처럼 열심히 땀 흘리고 저축하여 부를 축적한 이들에게’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여 ‘그 돈을 게으른 배짱이 같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야말로 가장 정의롭고 공정한 체제라고 본다.

    그렇다면 민주 세력은 복지국가를 어떻게 볼까? 많은 인사들이 복지국가는 정의 및 공정·공평의 실현과 무관한양 말한다.

    대표적으로, 문재인 후보는 1년 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서 ‘복지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특권과 특혜의 철폐이며, 따라서 공정과 공평의 회복’이라고 발언하였다. 복지국가는 그 자체 사회정의 및 공정·공평과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2012년 3월 5일자 한겨레신문에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복지라고? 천만에, ‘공정’이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그렇다면 문재인 후보 등 민주통합당과 김동춘 교수는 어떻게 복지국가의 도움 없이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건가? 김동춘 교수를 비롯한 모든 경제민주화론자들이 제시하는 최고의 정의 및 공정성 회복 방안은 바로 ‘공정한 시장질서’ 원칙의 구현이다.

    그리고 공정한 시장 질서를 위해 최우선시된 과제가 바로 각종 재벌 규제를 통해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는 일이다. 그런데 과연 ‘공정한 시장질서’가 정의가 보장되는 경제체제를 낳을 수 있을까?

    법조계 인사들은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라는 임마누엘 칸트의 실천이성 명제를 좌우명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특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법조계 인사들은 더 그러할 것이다. 이들 역시 대부분 복지국가보다는 정의·공정의 회복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의 현실에 직면하였을 때 법조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단순하게 답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나 공병호, 복거일 같은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야말로 가장 정의로운 체제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시장’이 아닌 ‘공정한 시장’만이 정의로운 체제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유시장이건 공정 시장이건, 모든 자본주의적 시장질서 그 자체를 불의와 착취의 체제라고 비판하며 오직 사회주의만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는 마르크스주의도 존재한다. 이렇듯 정의와 공정·공평의 의미는 (따라서 ‘경제민주화’의 의미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서로 다른 경제관과 세계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형식적, 절차적 평등(절차상의 공정·공평)을 실질적 평등(실질적 공평·공정)보다 더욱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들은 흔히 ‘복지보다 우선적인 것은 공정·공평’이며, ‘복지국가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특권과 특혜의 철폐’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나 같은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론자들은 복지국가야말로 정의와 공평(평등)을 달성하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이며, 더구나 재벌의 특권과 특혜를 철폐(완전경쟁 시장 창출을 위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특권과 특혜를 실질적으로 철폐하는 것이 정의를 위해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복지국가라고 생각한다.

    ‘공정한 시장질서’란 시장 경쟁 절차의 공정성(즉 기회의 평등)을 의미할 뿐이다. 즉 공정한 시장질서 그 자체는 소득 분배의 공정성(즉 결과의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시장이 더욱 공정해질수록, 즉 더 완전경쟁 시장 모델에 가까울수록, 성과주의의 확산에 따른 불평등한 소득분배, 승자와 패자의 빈부격차 심화는 불가피하다. 공정한 시장질서는 필연적으로 불평등한 사회, 불공정한 사회를 낳는다.

    아무리 공정한 ‘경쟁적 시장질서’가 관철되더라도 그 경제는 자본주의적 착취도, 노자 대립의 심화도 막을 수 없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1998년 이래 경제민주화-재벌개혁이 진행되면서 동시에 도입·확산된 것이 기업에서의 미국식 성과주의 및 개인주의 문화였다. 그것은 기업들에서 살벌한 비인간적 경쟁을 낳았다.

    미국식 성과주의와 능력주의는 모두 사람들이 이기적이며 경쟁과 금전적 보수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주된 동인이 된다는 전제 아래 경제적 생산성을 최대한 높이는데 주안점을 주는 원칙인데, 성과주의와 능력주의에 가장 부합하는 경제이론이 바로 미국에서 발전한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 생산성 원리이다.

    ‘공정한 시장질서’의 이름으로 시행된 1998년 이래의 경제민주화 또는 ‘시장주도형’ 경제로의 개혁(시장 개혁) 과정에서 한국 경제에서 임금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투입노동 대비 낮은 한계생산성을 보이는 중하층 노동자들에게는 과거보다 낮은 임금을, 높은 한계생산성을 보이는 고급 관리자와 경영자들, 특히 금융권 직원들과 펀드 매니저들에게는 높은 봉급을 주는 것이 정당하고 정의로운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저소득 노동자(워킹 푸어)와 고소득 임직원간의 소득격차는 과거 박정희 체제에 비해 크게 벌어졌다.

    사회민주주의센터 발기인대회 모습(사진=사회민주주의센터)

    정의로운 경제란 무엇인가?

    오늘날 한국 사회처럼 빈부격차가 심하고 자살률과 비정규직 세계 최고, 행복도 세계 최하위의 나라를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재벌이 빵집과 순대사업에 진출하여 영세자영업자를 몰락시키는 재벌공화국을 정의로운 경제, 민주주의에 맞는 경제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에는 여러 종류의 상벌 체계가 존재한다. 법과 관습은 대표적인 상벌 체계인데, 법이 철저하게 적용된다는 것은 곧 법으로 표현된 ‘정의’가 관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벌 범죄의 경우, 재벌 총수들 역시 ‘법 앞에서의 평등’ 원칙에 따라 다른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처벌하는 것이 정의로운 나라이다.

    그런데 자유 시장도 상벌 체계의 일종이다. 정상적인 자유 시장에서는 좋은 상품을 값싸게 생산하는 기업이 돈을 벌게 되는 반면, 저질 상품을 비싸게 생산하는 기업은 망한다. 시장에서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자유시장이 상을 내린다는 뜻이고, 망한다는 것은 자유 시장이 처벌한다는 뜻이다.

    자유 시장 즉 완전 경쟁 시장은 명백한 책임 추궁을 바탕으로 하는 ‘공정한 보상·처벌 시스템’이다.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자유 시장 그 자체가 훌륭한 상벌 체제라고 말하는 복거일과 공병호, 하이에크와 프리드먼과 같은 시장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매우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본다.

    그런데 스스로를 ‘진보적 자유주의자’(또는 진보적 시장주의)라고 자임하는 민주 세력 내의 공정시장론자들은 공정한 (즉 완전한) 경쟁적 시장을 회복하는 것이 공정과 정의를 회복하는 핵심적인 방법이며, 따라서 공정한 시장질서 구축이 복지국가보다 논리적, 시간적으로 우선시 되는 과제라고 주장한다. 경쟁적 시장질서의 회복을 위해서는 재벌그룹처럼 기업간 경쟁을 왜곡하는 특권·특혜 세력을 약화 또는 해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공정한 시장질서를 어디까지로 볼 것이냐를 놓고도 그들 안에서 견해가 엇갈린다. 일부 민주 인사들은 공정한 완전경쟁 시장 창출을 위해서라면 한미FTA와 노동운동 약화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경우, 자유시장론과 공정시장론이 갈라지는 유일한 분기점은 독점과 경제력 집중 즉 재벌에 대한 태도에서 뿐이다. 즉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신자유주의자들)이 독점과 경제력 집중(즉 재벌그룹의 계열사 확대) 역시 자유로운 시장 경쟁의 자연스런 결과이므로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민주적 공정시장론자들은 재벌그룹을 자유로운 완전경쟁 시장의 작동을 저해하는 ‘왜곡 요인’으로 보면서 그것을 제거 또는 축소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재벌그룹 축소 또는 해체를 통해서만 ‘합리적인 완전경쟁 시장’ 즉 ‘공정한 시장’을 만들 수 있고, 그래야만 정의와 공정·공평이 넘치는 공정사회 또는 공정국가가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주자본주의적 재벌개혁이 과연 정의로운가?

    재벌그룹의 축소 또는 해체를 위한 실질적 정책이 바로 재벌기업의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하는 일이다. 실제 민주적 공정시장론자들이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한 김대중·노무현 정부시기에 재벌기업의 기업지배구조는 크게 변화했다.

    즉 1997년 외환금융위기의 주원인으로 재벌들의 ‘왜곡된’ 기업지배구조가 지적되면서 주주권 이론에 따른 기업지배구조 개혁이 수행되었다. 그 개혁의 목표는 투명성 강화와 함께 소수주주권 강화와 기업경영권 시장(즉 적대적 M&A 시장)의 활성화였다.

    이를 위해 상법과 증권거래법, 공정거래법 상의 기업지배구조 관련 법제도가 크게 변했다. 집중투표제와 펀드의결권 행사, 외국인의 국내기업 주식 취득 한도 폐지와 외국인의 국내주식 10% 이상 취득시 해당 기업 이사회 동의 요건의 폐지가 그 당시 이루어졌다.

    이번 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 문재인 또는 안철수 후보 캠프에서 활동한 경제민주화론자들에 따르면 소수주주권 강화와 적대적 M&A 활성화는 총수 자본주의를 억제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이 때 출자총액제한과 순환출자 규제, 지주회사 규제 강화와 같은 공정거래법상 재벌규제는 소수주주권 강화 및 적대적 M&A 활성화를 위한 바람직한 도구가 된다.

    그런데 소수주주권이 강화되고 적대적 M&A가 활성화되는 재벌 규제가 강화되었을 때 그 과실을 따먹는 것은 누구일까?

    과연 하청 중소기업과 종업원들, 그리고 국민들 전체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즉각적인 수혜자는 바로 주식시장에서 활동하는 소수주주들 즉 각종 국내외 투자펀드들과 개미투자자들이다. 국제 석학들은 소수주주권과 적대적 M&A가 활성화된 1980년대 이후의 미국 증권시장과 그 지배하에 있는 상장기업들의 행태를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월스트리트와 긴밀하게 결합된 금융주도 자본주의 및 주주자본주의를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앙지로 지목한다.

    필자소개
    사민주의센터 준비위원. <쾌도난마 한국경제>공저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