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악마와 민주노동당 지방선거
[아빠의 현대사48] 노동자들의 열망과 헌신이 밑바탕 된 2002년 민주노동당의 도약
    2013년 01월 17일 10: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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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약육강식의 사회,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 상실의 세상에 살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의 질곡을 극복하고, 노동자와 민중 중심의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를 건설한다. 모든 사람이 교육․의료․주거․통신․교통 등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여건을 평등하게 누려, 저마다 하고자 하는 바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목표이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삶에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는 공공의 목적에 따라 생산되도록 한다….

민주노동당은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인류의 오랜 지혜와 다양한 진보적 사회운동의 성과를 수용함으로써, 인류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 공동체를 구현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나 억압, 착취와 차별이 모두 사라진 해방의 세상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민주노동당의 길은 민주와 평등과 해방의 길이다” (민주노동당 강령 중에서)

‘붉은 악마’와 붉은 박근혜

투쟁만을 말했지만 사실 2002년은 월드컵이 있었던 해이고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다. 사람이란 게 워낙 다양해서 하나만을 하지는 않는다.

노동자라고 매일 투쟁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일본과 역사상 처음으로 공동개최한 제17회 월드컵이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열렸다. 전두환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스포츠 열기가 국민들 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4강까지 진출함으로서 붉은 악마들이 시청광장을 가득 메운다. “대~한~민~국”을 외치는 소리가 전국을 강타했다. 16강전에서 이탈리아를 물리친 반지의 제왕 안정환의 골, 8강전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후 기쁨에 겨워했던 홍명보의 표정 등은 은지 너도 알거다. 무수히 반복해서 보여줬으니까 말이다. 비록 독일에 패배하고, 3-4위전에서도 터키에 3:2로 패배했지만 전 국민을 열광시켰다.

붉은 악마로 대표되는 특유의 길거리 응원 문화가 정착되는 시발점이 되었고, IMF 환란사태 당시의 금 모으기 운동과 더불어 우리 국민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 중 하나로 해외에 알려져 있기도 하다.

시청 앞의 월드컵 응원 열기

싱가포르의 한 정치인이 “그렇게 ‘다이내믹’할 수가 없었어요. 한 나라의 국민이 단합하면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느꼈어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5월 15일에 열린 노동운동탄압 대책위원회의 자료를 보면 구속자 42명, 수배자 43명, 손해배상 및 가압류 금액만도 1,067억원이었다. 2002년도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국가적 행사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에 대해 집요한 탄압을 했다는 말이겠다. 9월에 조사해보니 김대중정권 시절에 구속된 노동자가 828명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노태우 군사정권시절의 1,913명보다는 줄었지만 김영삼 정권시절의 632명을 훨씬 넘는 숫자였다. 보수언론은 노동자 투쟁에 대해 “월드컵에 웬 파업?”식의 마녀사냥을 하기도 했다.

붉은 악마의 가장 큰 공헌은 빨갱이 소동을 조금이나마 잠재웠다는 점이다. 당시 붉은 악마가 붉은 색을 입었다고 ‘빨갱이’ 시비를 걸던 보수층이 십년 뒤 박근혜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붉은 색을 선택한 것도 지나고 보니 코미디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붉은 머리띠조차 시비의 대상이었다. 대놓고 색깔을 바꾸라는 사람도 있었다. 온 나라를 뒤흔든 월드컵 열기는 월드컵이 끝난 다음날인 7월 1일을 4강 진출 기념으로 임시공휴일로 정할 정도였다.

그 때 시청광장에 모였던 많은 젊은이들은 그 장소가 87년 6월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열렸던 곳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 광장은 이후 2008년 촛불광장으로 변한다.

배타적 지지방침과 정당명부비례 대표제

민주노총은 발전노조 파업과 관련한 후유증을 깊게 앓아야 했다. 대의원대회가 성원미달로 연기되기도 하는 등 진통 끝에 결국 한 달이 넘은 5월 6일에야 금속노조 출신의 백순환 위원장을 중심으로 간신히 비대위를 구성한다.

월드컵의 열기가 막 뜨거워지기 시작할 무렵 6.13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조직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민주노총에서만 120명이 출마할 정도로 ‘준비된 선거’였다.

위원장 사퇴와 그로 인한 조직내부의 아픔이 아주 많았지만 공공연맹도 22명을 출마시켰다. 민주노동당 차원에서 총 218명이 출마해서 133만표를 얻는 비약적인 성장을 한다. 처음으로 실시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덕분으로 8.3%를 득표하고, 울산에서 기초단체장 2명, 광역의원 11명이 당선됨으로서 제3당으로 급속하게 부상한다.

지방선거 승리를 전하는 '노동과세계'의 기사

이런 성장의 배경에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이라는 것이 있었다. 다른 당으로도 출마는 할 수 있었지만 오직 “민주노동당으로 출마해야만 민주노총 후보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사회당’이나 ‘노동자의 힘’같은 정치조직들이 반발했지만 민주노총이 자신의 진보정당을 가지기 위해 선택한 방침이었다. 1월에 열린 민주노총 중앙위원회에서 현대중공업의 김원필 동지가 이 조항의 삭제를 수정안으로 냈지만 부결되기도 했다. 훗날 민주노동당이 분당된 이후에 이 배타적 지지 방침에 대한 많은 논란이 다시 생긴다.

다른 하나는 한사람이 한 표만 찍는 것이 아니라 ‘1인 2투표제’인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때문이었다. 유권자는 한 표는 후보에게 다른 한 표는 정당에 투표할 수 있었다. 따라서 후보자가 비록 당선권에서 벗어나 있더라도 정당은 미래지향적인 당에 투표할 수 있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1표는 현재를 위해, 다른 1표는 미래를 위해”라는 구호를 정하고,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방침과 1인 2표라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라는 새로운 선거방식의 도입으로 인해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선거이후 한길리서치라는 곳에 의뢰해 조합원 1,000명을 조사해 보니 72.2%가 민주노동당에 정당투표를 한 것으로 나타날 정도였다. 이를 통해 2004년까지 국고보조금도 25억원을 확보하게 된다. “민주노동당, ‘지옥’에서 ‘천당’으로” “진보정치 날개 달았다”라고 민주노총 기관지인 노동과 세계가 쓴 그대로였다.

헌신으로 만들어진 민주노동당

노동자 정치가 가능성을 보이자 한 때 기존 정치세력에 속했던 사람들도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한다. 울산시장으로 출마한 송철호 변호사 같은 사람이다. 내가 92년 울산에서 진보정당추진위 중구지구당 위원장을 할 때 이상도라는 현대자동차 해고자를 국회의원에 출마시킨 적이 있다. 이후 민주노총 사무총장까지 했던 울산노동운동의 대부라 할 권영목이 우리 후보를 사퇴시키면 총선 후 진보정당운동에 함께 하겠다고 해서 결국 사퇴시킨 적이 있다.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던 송철호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였다. 송철호는 떨어졌고, 권용목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당시 송철호씨는 무소속으로 출마했었고, 2012년에는 민주통합당으로 출마했다.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보수야당에 어울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민주노동당 후보로 울산시장에 출마할 정도로 울산에서 노동자들의 결속력이 강했다.

노동자들이 얼마나 갓 만들어진 민주노동당을 지지했는지에 대한 다른 사례도 있다. 세진컴퓨터랜드라는 회사가 있었다. 지금의 삼성, 삼보, LG 등과 당당히 경쟁할 정도로 전국에 매장을 설치했었던 컴퓨터 전문 회사였다. 엄청난 속도로 사세를 확장하며 승승장구하던 세진은 97년 부도로 대우통신이 인수했다가 2000년에 파산한다.

그 세진컴퓨터랜드노조가 우리 연맹 소속이었다. 그 기나긴 투쟁을 하고 남은 돈을 잘 보관하고 있다가 민주노동당에 전액을 후원한다. 정말 ‘피와 같은 돈’이었다. 당시 돈 4천 837만 5천 970원이었다, 김득현 위원장과 이금곤 사무국장이 의논하길래 민주노동당에 주자고 했다. “우리처럼 강제 청산되어 피해를 보는 노동자들이 더 이상 없길 바란다.”라는 말과 함께 당시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에게 전달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노동자에게 희망과 꿈을 준 민주노동당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줄은 정말 몰랐다.

심재옥 여성국장의 당선

공공연맹에서도 광역 1명, 기초 4명의 당선자를 냈다. 광역의원은 서울시 의원으로 연맹에서 오랜 기간 함께 일해 온 심재옥 여성국장이었다. 은지 너를 잘 아는 후배다. 심재옥국장은 이후 103명의 서울시의회 의원 중 단 한명의 진보정당 의원으로서 정말 열심히 활동을 했고 이후 진보신당 부대표를 맡기도 한다.

그런데 비례대표이기 때문에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임원이나 단위노조에서 출마해야지 왜 상근자에게 그런 권한을 주느냐?”고 시비를 건 사람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권력에 가까운 길이 보이면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평생을 묵묵히 뒷바라지를 하는 사람도 있다. 심재옥 국장은 거꾸로 노동조합만 하다가 졸지에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 논란은 양경규 위원장이 단칼에 정리해 버렸고, 심재옥 국장은 이후 연맹을 떠나 진보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번 6월 13일 지방선거에도 내가 속한 연맹에서 22명의 후보를 출마시켰다. 연맹 상근자인 여성국장도 서울시 광역비례대표로 출마시켰다. 우리는 광역비례대표는 돈이 별로 안 들어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서울시는 인구가 대단히 많고, 각 가정에 들어가는 선거공보물 제작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에서 조합원 1인당 2,000원의 모금을 결의했지만 경험으로 미뤄볼 때 돈이 부족할 것은 뻔했다. 또 돈을 모아야 했다. ‘서울시 광역비례대표와 함께 하는 노동자 100인 선언’이라는 그럴듯한 내용을 준비했다. 1인당 10만원씩 내라는 얘기다. 수소문을 시작하고, 심지어는 캐나다에 이민간 전 노조 위원장에게도 계좌번호가 적인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목표한 천만원이 넘는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당당하게 서울시의회 의원으로 당선시켰다. 지구당이 어렵다면 특별당비를, 선거에 들어가면 특별 선거비용을 내야 하는 당원들. 그 힘으로 민주노동당은 유지되고, 발전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정당 당원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창작과 비평>에 쓴 글 중 일부다. 그렇게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들의 헌신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나는 교육을 가면 “길게 보자. 50년 이상을 유지 해 온 보수 정치가 한 번에 바꿔질 수는 없다. 10년만 해보자”라는 말을 즐겨했었다.

그리고 온 국민을 열광시킨 월드컵 4강 신화가 달성된 이후에는 더욱 말하기가 편해졌다. “봐라. 한국 축구가 16강에 들어가는 데도 4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한국전쟁과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이념을 내세운 정치는 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없었다. 이제 시작이고,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한번 해보자. 축구도 되는 데 정치라고 안 되겠나?”라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민주노동당으로 파견되다

그해 3월 16일 권영길 위원장은 서울지하철 노조 위원장 출신인 정윤광 선배와의 경선을 통해 민주노동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진보진영의 선거가 매번 그렇듯이 또 수많은 논의를 거친 후에 7월 16일 전국연합, 한총련 등 8개 단체가 대선승리를 위한 공동기획단을 구성하기고 하고, 8월 9일 권영길 후보가 출마선언을 한다.

그리고 선거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11월 22일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전국연합 등이 공동선거대책본부를 발족한다. 민주노총은 공공연맹, 사무금융연맹, 전교조 등에서 각 1명을 집행위원으로 파견하여 “노동자 계급 투표실현”을 목표로 하기로 한다. 이 방침에 따라 연맹은 11월 31일 중앙위원회의 인준을 통해 나를 선거대책본부에 파견한다. 나는 짧은 기간이지만 선거대책본부의 조직위원장으로 민주노동당 선거운동을 하게 된다.

파견을 나가기 직전인 10월 19일 오랫동안 준비했던 공공연맹의 가족문화한마당이 올림픽공원에서 열렸다. 최은아 선전부장은 은지 네가 대여섯살 정도 되었을 때 그린 그림으로 포스터를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너는 그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필자의 딸 그림으로 만든 공공연맹 포스터

필자소개
이근원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을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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