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루먹은 낙타 씨
    [잡식여자의 채식기-2] "비건과 락토가 뭐예요?"
        2013년 01월 15일 11: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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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를 ‘비루먹은 낙타’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해골에 가죽 씌워놓은 것처럼 비쩍 말랐고, 길다란 팔다리는 흐느적흐느적 거렸다. 큰 눈을 꿈벅거리며 노상 웃는 얼굴의 그는, 비록 비루먹긴 했으나 묵묵하고 믿음이 가는 낙타처럼 보였다.

    식품영양학 박사과정이라던 그는 태극권을 배우러 우리 동호회에 들어왔다. 똑같이 마른 동호회장에게 기초과정인 24식을 배우는 모습은 상당히 볼만했다.

    두 남자의 흐느적거리는 팔다리는 마치 두 마리 학이 춤을 추는 모습같이 보였다. 한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펼치고 다리를 굽히면, 다른 한 마리가 따라하는 형상이었다. 비쩍 마른 그의 몸은 딱할 정도로 기름기가 없어보였다. 마치 고기 한 점 못 얻어먹어 본 사람처럼.

    수련을 마치고 밥을 먹으면서, 나는 그의 식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1700원짜리 밥, 계란국, 김치, 쥐치볶음, 매추리알 두 개가 전부인 학생식당의 B메뉴. 그는 밥과 김치만을 먹었다. 고봉밥에 김치만을 잔뜩 먹었다. 낙타가 먹이를 먹는 것 같았다. 그마저도 맛있게 밥풀하나 남기지 않고 먹는 그를 보며, 왠지 채식주의자 같다고 생각했다.

    “왜 국을 안 드세요?”

    내 물음에 그는 채식을 한다고 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얼마나 채식을 했는지 물으니 20년이 넘었다고 했다. 나도 한때 채식을 했었는데, 너무 번거로워서 그만두었다는 말을 했다. 그는 자신은 비건을 지향하는 락토라고 했다. 완전 채식을 지향하지만, 가끔 유제품은 먹게 된다고 했다.

    “비건과 락토가 뭐예요?”

    그는 일반적으로 채식은 네 단계가 있는데, 비건(Vegan)은 일체의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단계이고, 락토(Lacto)는 유제품은 먹는 단계, 그리고 락토-오보(Lacto-Ovo)라고 계란까지 먹는 단계, 어패류까지 먹는 페스코(Pesco)가 있다고 말했다.

    비건 협회의 로고

    “엄청 불편하시겠어요?”

    하고 물으니 오랫동안 채식을 해서 불편이 익숙해졌다고 했다. 하지만 밖에서 무언가 먹으려면 먹을 것이 별로 없어서 외식이 싫다고 했다. 그건 나도 짧게나마 경험해봐서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지점이 내가 잡식성 삶의 방식으로 회귀한 이유이기도 했고.

    나는 불편함이 싫었다. 편리의 증진이 지상 최대 과제인 이 세상에서, 자발적으로 불편함을 선택하고 그 선택 때문에 불필요한 설명을 하느라 진을 빼야하는 불편함이 싫었다.

    그런데 비루먹은 낙타 씨는 그 불편함이 익숙하단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게 했을까? 나는 그 동기 무엇인지, 그는 어떻게 동기부여가 되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초면에 실례라 생각하여 거기에서 질문을 멈췄지만, 그는 내 궁금함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 채식을 하는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가 있다고 한다. 종교적 가르침이 채식을 권하는 불교나 제칠일안식교, 기타 명상단에 속한 경우가 첫째요. 두 번째는 동물애호가와 그러한 활동가들, 세 번째는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하게 된 사람들이라 했다.

    “셋 중 어디에 속하세요?”

    비루먹은 낙타 그 자신은 아무데도 속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 속할 수도 있다고 했다. 생명을 해칠 수가 없어 동물성을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조물주가 함께 나눠준 생명을, 자신이 힘이 더 세다는 이유로, 자신의 감각적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함께 살아가는 친구들의 그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고 말했다. 참 요즘 세상에 만나기 쉬운 사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누가될지 내가 걱정할 바는 아니지만 사람이 이렇게 천진난만하니 그 부인 고생길이 훤하겠네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이것이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다. 후에 비루먹은 낙타 씨가 채식을 사준데서 밥을 한 끼 얻어먹었는데, 우연히 만난 학교 후배 녀석이 내 귀에 속닥거리기를 “누나, 저 형님이랑 사귀는 거 아니지? 피죽도 못 먹은 말라깽이 같아. 눈도 퀭하고 눈빛도 이상해. 요즘 많이 외로워? 아무튼 저 형님이랑 같이 다니면, 누나도 같이 이상해보이니까 자주 만나지마.”

    그 후배 녀석이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내가 눈꺼풀이 뭐가 씌었었는지, 비루먹은 낙타랑 결혼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걱정해마지 않았던 ‘그 고생길이 훤한 부인’이 되었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뭐랄까? 좋게 말하면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상호보완적 공존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공존은 끊임없는 투쟁과정이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비롯된 다름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간극, 그리고 채식과 잡식의 거리. 이것들은 쉬지 않고 우리를 투사로 만든다.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만을 주장하도록 말이다.

    어떤 날, 어떤 순간에는 마음이 놀랍도록 관대해서 서로를 용납하고, 이해할 때도 있지만, 어떤 날, 어떤 순간에는 또 마음이 놀랍도록 졸렬해져서 서로를 조소하고, 비난할 때도 있다.

    나는 아직도 한 달 걸러 한 번씩은 족발이나 순대가 당기는 잡식녀다. 이런 내게 남편은 일체의 육식을 하지 않는 비건(Vegan)식의 삶의 방식을 요구한다. 남편 자신도 그렇게 되기까지 수년이 걸렸으면서 말이다. 남편의 가치관을 존중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내가 가끔 먹고 싶은 족발이나 순대를 끊을 수 있을 만큼은 아니다.

    나는 주로 채식을 하지만,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드물게 한 번씩 먹고 싶은 욕구를 참아 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의 채식인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정도의 채식인이 되고 싶은 마음도 아직까지는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천지가 개벽하는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하면 내가 또 어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아니다.

    그러니 풀만 먹으면 고고하고 깨끗한 줄 아는 이 비루먹은 낙타여, 빨리 변하라고 나를 채근하거나 자극하지 마시라. 내 심술이 동하는 날, 내 아들이기도 한 그대의 아들에게 고기 맛을 가르칠 수도 있으니.

     

    필자소개
    ‘홍이네’는 용산구 효창동에 사는 동네 흔한 아줌마다. 남편과 함께 15개월 된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직장생활과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느라 집안은 늘 뒤죽박죽이다. 몸에 맞지 않는 자본주의식 생활양식에 맞추며 살고는 있지만, 평화로운 삶, 화해하는 사회가 언젠가 올거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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