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도 희망은 마지막에 죽는다
        2013년 01월 10일 03:01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선거의 결과만 가지고서는 한 사회의 성격 내지 가고자 하는 방향을 판단하기가 힘듭니다.

    선거에서 “모든” 유권자들이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지난 대선의 투표율이 75%이었다면 우리 사회 유권자들의 4분의 1이 투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또 대선 같으면 꼭 자신의 성향을 투표행위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꼭 아닙니다.

    근혜공주께 한 표를 봉헌한 모든 이들은 과연 공주님과 父王의 은덕을 다 무조건 사모하기만 한 것인가요? 그러한 “근왕파”도 없지 않았겠지만, 상당수는 “그냥” 엇비슷한 (수준의 거젓말인) “민생” 공약을 내세운 朴, 文 두 사람 사이에 보다 확실한 국가주의자인 듯한 전자를 택했을 뿐입니다.

    자유주의적 신자유주의 10년, 우파적 신자유주의 5년 끝에 그저 피곤해져 그저 “초강력의 국가가 책임져주는 성장과 고용”, 그리고 부동산 값 붕괴 방지를 원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투표한 이들이 그 무슨 특별한 “극우파”라기보다는 그저 남한 사회가 으레 요구하는 “표준적인” 경제동물적 근성과 국가주의적 보수성을 지닙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유권자들이 자민당에 기대했던 것은 그 무슨 군사대국화도 아니고 중국과의 갈등 심화도 더더욱 아니고 단지 과거와 같은 “토건식 케인스주의”, 즉 전후 “부흥기”와 같은 방식의 건설업 위주의 “유사 국가자본주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일 양쪽에서 지금 최악의 극우파가 선거제도를 통해 집권한 것은, 양쪽 사회가 “극우적”이라는 걸 전혀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단, 양쪽 사회에서는 신자유주의를 벗어날 줄 모르는 자유주의자들이 민심을 잃어 지리멸렬해지고, 사회주의적 대안은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입니다. 즉, 양쪽에서는 우리가 악질 극우들의 등극을 전혀 막을 줄 모르는 보수화된 사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보수화된 사회의 제일 분명한 특징 중의 하나는, 그 어떤 근본적인 물음에도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제3자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당연한 물음인데도, 보수화된 사회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군비 지출이 세계 12-13위 쯤 되는, 그리고 영국군보다 숫적으로 3배나 더 비대한 군을 가지고 있는 경제, 군사대국 대한민국으로서는 도저히 “주한미군”이 왜 필요한가 라는 물음입니다.

    그나마 그 질문을 일각의 급진적인 운동권 학생들이라도 가끔 던지곤 했던 군사독재 시절의 말기에는 정권 측의 답변은 늘 “북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남북의 경제 격차가 천문학적이 되고, 또 잘만 하면 북조선이 경제 파트너 역할까지 다 할 수 있다는 점이 햇볕정책 시절에 다 증명되고 나서는 물론 그런 답변은 무의미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답변은? “미군 철수” 요구 자체가 이미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에서는 이렇다 할만한 분명한 답변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남한 지배층이 미국의 군사적 보호령이라는 입장에 자족하고 미국 지배자들에게 끽소리 못할 만큼 이미 미국 중심의 체제 속에 편입되고 말았다는 사실과 이 사실을 “그저 그렇다”고 “그냥” 받아들이는 보수화된 다수의 민심만 남았습니다.

    2000년대 초기만 해도 보통 여론조사마다 30-40%가 미군철수를 지지했는데, 요즘은 그런 여론조사 자체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점령이라는 것도 어떤 상황에서는 “일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중-미 갈등이 끝까지 첨예화돼버리면 주한미군의 존재가 한반도 전체의 사막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보수화를 이끌어내는 매체들은 물론 조심스럽게 피해갑니다. 보수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장기적 미래”라는 건 없어요. 내년 성장률, 내년 집값 추이만 유의미합니다.

    보수화된 사회에서는 하여튼 “왜”라는 물음은 점차 사라집니다. 왜 국민총샌산의 10-20%씩이나 차지하는 공룡급 기업들을 사실상 지배하는 이씨, 정씨, 구씨들이 그 누구의 민주적 통제, 감시라도 제대로 받지 않고 수백만 명의 생계가 걸린 경제적 이해관계를 독단적으로 콘트롤해야 하나요?

    우리는 얼마든지 한 개인이 삼성건설이 지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제일모직이 만든 옷을 입고, 제일제당이 만들어 판 식량품을 아침으로 먹고 삼성르노제 자동차를 타고 삼성계열사나 그 계열사의 협력, 하도급 업체로 가서 일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공부해도 삼성대학 (구 성균관대), 아파도 삼성병원, 전화 걸어도 삼성휴대폰, 신문 봐도 중앙일보… 우리 삶의 전반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한 왕조가 다스리는 한 재벌집단이라는 생각은 소름끼치지 않으세요?

    출처는 http://blog.daum.net/espoir/8126420

    이런 부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더 이상 “이렇게 된 이유”에도, “이렇게 된 것”이 과연 좋은가, 대안이 없는가와 같은 부분에도 완전하게 무관심한 곳은 바로 보수화된 사회입니다.

    제3자 입장에서 본다면, 1인 독재권력이 키운 경제왕조들이 점차 그 생산의 중심기지들을 임금이 훨씬 낮고 매출액이 훨씬 높은 외국에 옮긴다는 점, 즉 그 공룡들을 정점으로 하는 국내 경제가 어쩔 수 없이 장기적으로 침체와 高실업을 경험할 것은 아주 뻔합니다.

    그러나 보수화된 사회에서는 “미래”는 없고, “삼성은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의 중심!”이라고 미치듯이 외치는 매수된 언론인들의 주문소리만 시끄럽습니다. 그리고 이 무서운 공룡들을 다수의 이익을 위해 순치시키기 위해, 즉 사회와 노동자들의 민주적 통제 하에 두기 위해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려는 사람들은 너무 적습니다.

    보수화된 사회에서는 싸움들은 있지만 대개 수세적이고 대개 이미 짜여진 구도를 묵시적으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 전개됩니다. 해고자들이 복직을 위해서 힘겹게, 죽어가면서 싸우지만, 부당한 해고를 가능케 한 구조, 즉 재벌이 대주주의 소유물로 남고 노동자들의 경영참여나 사회의 기업경영 통제가 불가능한 구조 그 자체를 싸움의 대상으로 삼지도 못합니다.

    그럴 힘이라고 없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음을 각오하면서 송전탑 농성을 벌이지만, 그 요구는 “법원 결정에 따르는 정규직 전환”, 딱 그것뿐입니다. 보수화된 사회에서는 비정규직 양산을 가능케 한 재벌에 대한 대주주들의 사적 소유 구조라든가 경영구조 등을 문제 삼을 만한 유의미한 세력이라고 없죠.

    문제는, 법원이 명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면서 농성한다 해도, 그 요구를 외치다가 얼마든지 죽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수화된 사회에서는 “밑의 놈” 목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법은 “밑의 놈”들에게만 적용되지 주인님들은 그 이익대로만 움직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 정의에 대한 정면 부정이지만, 보수화된 사회에서는 “정의”란 개념 자체가 점차 무의미화됩니다. “미래”라든가, “근본적 물음”들과 함께 말에요.

    그런데 우리가 보수화된 사회에서 산다고 해서 꼭 낙담해야 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그 어떤 낙토도 보장돼 있지 않습니다.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악화될 수도 있고, 제국주의 열강 갈등 구도 속에서 남한이 완전한 파쇼화 과정도 거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을 때까지 마음껏 외치고, 힘껏 연대하는 것입니다. 사회는 보수화돼도 진리는 그대로 진리입니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인간을 왜곡시키고, 필연적으로 장기적 차원에서는 다수를 절대적, 또한 상대적 빈곤으로 빠뜨리고 필연적으로 위기, 공황, 전쟁을 낳는다는 건 진리입니다.

    저는 그냥 저들이 제 입을 힘으로 막을 때까지 그 진리를 크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파쇼들을 막을 수 있다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수화된 사회의 경제적 상황이 불가피하게 악화되어 다수의 삶이 망가져가는 대로 연대와 투쟁의 폭을 계속 넓히면 됩니다. 그래도, 그래도 희망은 마지막으로 죽습니다.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