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디 따라하기"
    [잡식여자의 채식기-1]'다름'에 대한 인식 변해갔으면
        2013년 01월 10일 10: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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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먹고사는 일은 중요하다. 채식을 통해 먹고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익숙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 수다를 떨어보고 싶었다. 밥과 수다는 아줌마의 상징이 아닌가? 동네 흔한 아줌마의 목소리로 먹고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이웃과 함께 소통하고 싶어 이 글을 연재하게 되었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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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 여섯의 내게 시간은 죽여야 하는 대상이었다. 청춘의 몸은 지금보다 싱싱해 어디든 갈 힘이 있었고, 꿈도 원대해 내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 같았지만, 나는 아버지 병간호를 해야하는 입장이었다. 간경화로 날마다 죽음에 다가가시는 아버지를 돌봤다. 그래서 나의 시간은 생기있는 것이 못되었다.

    엄마와 밤낮을 교대로 해가며 아버지를 돌봤다. 밤 시간에 아버지를 돌볼 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 시간을 퀼트나 뜨개질로 엮어나갔다. 낮 시간은 책을 읽었다. 시간이 넉넉했으니 그동안 읽지 않던 수백쪽짜리 고전류에도 손길을 뻗쳤다. 고난은 사람을 변하게 하지.

    아무튼 그러다 만난 것이 간디 자서전. 들고 다니기도 부담스러운 그 두꺼운 책을 읽으며 나는 간디가 삶에서 실천한 것을 한 가지 따라 해보자 마음먹었다. 그 중 제일 쉬울 것 같은 것이 채식이었다. 그래서 채식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채식도 단계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할 만큼 채식에 관해 무지했다.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나에게 채식은 지극히 사적인, 먹는 행위의 종류를 달리하는 것, 그리고 성인반열의 간디를 흉내 내는 정도의 의미였다.

    내게 채식은 동물을 사랑하고, 건강을 생각하는, 박애와 합리적 사고의 결과물이거나, 윤리적인 먹거리를 위한 소비자 주권 행사와 같은, 사회적 맥락을 고려한 행위는 아니었다.

    병든 아버지를 간호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친 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냥 간디 흉내내기 정도였다. 어디 가서 “내가 한때 채식을 해봤는데~”하며 인문계 특유의 ‘썰’을 풀기 위한, 직접 체험을 확장하기 위한, 무의식적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동기에서 시작된 채식은 겨우 두 달 만에 끝이 났다. 고기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생선과 해산물은 좋아하지만, 고기에는 큰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기를 앞에 두고, 멀뚱거리거나 하는 짓 따위를 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말없이, 묵묵히, 효율적으로, 복스럽게, 많은 양을 먹어치울 수 있다. 키 175cm의 장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잘 먹어야하니.

    마하트마 간디와 이효리.....

    사실 채식을 그만 둔 것은 지겨워서였다. 먹는 것 혹은 먹는 행위는 앞서 말했듯이 지극히 사적이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지극히 사회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보통 우리는 친하니까 같이 먹고, 친해지기 위해서 같이 먹기도 하니 말이다.

    이런 사회적 속성을 가진 먹는 행위에 있어 나의 ‘튀는’ 선택은 그 행위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일일이 설명해야하는 번거로움을 수반했다. 누군가와 함께 무엇을 먹을 때면, 또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 경우 ‘채식’을 하는 것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들의 관심사와 우리의 대화 주제를 내 채식생활로 집중하게 만들었다. 어느 식당이라도 고기를 넣지 않은 음식을 찾기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서, 알아서 고기반찬을 피해 먹는다 하더라도, 나의 고기를 먹지 않는 행동은 눈길을 끌고도 남음이었나보다.

    그런데 그 반응들이 그다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었다. 순수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질문들은 대부분 ‘골고루 잘 먹어야지’와 같은 훈계, ‘쓸데없는 짓 한다’는 핀잔, 그리고 ‘고기 안 먹고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보자’와 같은 빈정거림으로 수렴이 되었다.

    나는 이런 과정이 귀찮았다. 인생의 삼락(三樂) 중 하나였던 먹는 일이, 채식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과 저런 반응들에 응대하는 일로 좀 먹어지는 느낌이었다. 또 색다른 것에 대해 색안경 끼고 보는 시선과 그것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것이 지겨웠다. 내가 무슨 숭고한 신념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이상하게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멘탈이 무장된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래서 나는 간디 따라하기, 첫 채식실험을 끝냈다. 그리고 예전과 같이 노릇노릇 잘 구워진 고기를 묵묵히 꾸역꾸역 잘도 먹는 잡식녀의 삶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잡식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먹을 수 있는 종류가 증가한 것은 물론이요. 아무데서나 쉽게 먹을거리를 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니 잡식의 삶은 정녕 내 영혼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왜 간디를 흉내 낸다고 해서 고생을 사서했나 싶기도 했다. 잡식을 하니 이렇게 편안한 걸.

    두 달의 채식에서 나는 무엇을 얻은 것일까? 몸무게가 살짝 줄어 턱선이 선명해져 주걱턱이 더 도드라져보였다. 그래도 살이 빠졌으니 좋아할 일이겠지. 허나 내가 채식을 하던 시기는 병간호를 하느라 심신이 고단했다. 그러니 채식이 아니었어도 몸무게는 줄었을 게다.

    그렇다면 동물친구들의 숭고한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는 도덕적이거나 문화적인 우월감? 그것도 아니었다. 구라파의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할법한 ‘나는 박애주의자구~’ 하는 우월의식을 가질 만큼 우리나라에서 ‘채식’의 입지가 단단한 것이 못되었다. 그리고 그때는 유명인들이 채식한다고 밝히는 세상도 아니었다.

    내가 입으면 몸빼인 것이 이효리 씨가 입으면 패션아이템이듯, 내가하는 채식은 궁상스러운데 유명 연예인들이 채식을 하니 그게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그럼 뭘까? 지금 생각해보면 소수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짧은 경험 정도가 될 수 있겠다. 고기 좀 두어 달 안 먹고 살았다고, 그걸 침소봉대해서 거창하게 소수자 운운하는 것이 민망한 일이지마는, 어쨌든 채식을 하니 마땅히 먹을 것도 없었고, 주류인 비채식인들의 구별짓기는 상당한 불편함을 감수하게 하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자신의 선택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또 선택을 했다. 채식을 포기하고 덜 불편하게 살기로. 그런데 많은 경우, 소수자들의 삶이란 차별에의 노출되고 수많은 설명을 요구받으면서도, 그것을 그만둘 수 없다. 성, 인종, 국적, 장애와 같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소수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선택으로 쉽사리 바꿔지지 않는 것들.

    세상이 변하니 다행이다. 희망을 가져볼 여지가 있으니. 효리 씨가 채식을 한다고 밝힌 이후로 채식이 뭔가 ‘간지’나 보이는 거 같다. 무한 설명을 반복해야 했던 채식이, ‘아 그거 이효리도 하는데’로 상황이 정리가 된다. 역시 ‘효리 아우라’는 대단하다.

    채식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가는 것처럼, 또 다른 ‘다름’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변해가면 좋겠다. 그래서 다수와 조금 다른이들도 평화롭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느릿느릿 손물레를 돌리듯 살다보면, 세상은 변하니 희망을 가져볼 만하겠지.

    필자소개
    ‘홍이네’는 용산구 효창동에 사는 동네 흔한 아줌마다. 남편과 함께 15개월 된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직장생활과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느라 집안은 늘 뒤죽박죽이다. 몸에 맞지 않는 자본주의식 생활양식에 맞추며 살고는 있지만, 평화로운 삶, 화해하는 사회가 언젠가 올거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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