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춘에 대한 예의
    [빵과 장미] 다양한 청춘들이 스스로 그 청춘을 말하도록 하자
        2012년 05월 30일 01: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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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 행복한 것이라기보다 생동하는 것

    공자가 마흔이면 불혹의 나이라 했더니 그저 숫자로 마흔이 넘으면 저절로 자신이 불혹의 반열에 오르는 것으로 착각하는 변종 공자들이 간혹 있다. 불혹을 위한 성찰은 배우려 하지 않아도 마흔만 넘으면 저절로 공자가 된 이들은 ‘어디선가 들어본’ 화이트헤드(Whitehead, 1861-1947) 의 한 문장을 아주 엉뚱하게 인용하기도 한다. “청춘에 대한 가장 심오한 정의는 아직 비극에 물들지 않은 생명이라는 것이다.”라는 말을 끌어와 청춘을 구박한다. 이것 봐라, ‘유명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대, 청춘은 아직 비극을 겪어보지 않았다잖아, 그러니까 아직 아는 게 없어!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 훈장님들을 만나면 딱하기 그지 없다. 알고 모르고 할 틈도 없이 차가운 물 속에 가라앉은 천안함 사건 희생자들은 얼마나 아까운 청춘들이었나. 관념을 경계하는 글을 거꾸로 자기 관념을 더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꼴이다.

    청춘을 가르치기 위해 많이 인용되는 저 문장은 화이트헤드가 70이 넘어 자신의 철학 세계를 정리하며 쓴 <관념의 모험 Adventures of Ideas, 1933년> 중에서 짧게 언급된 청춘에 대한 그의 소견이다.(오해를 막기 위해 고백하면 나는 저 두꺼운 책을 다 읽어보지 않았다. 누군가가 들이댄 인용문을 보고 특유의 의심이 발동하여 필요한 부분만 원문을 뒤져봤을 뿐이다.) 인용문의 아전인수는 종종 발견되는 유감 중에 하나다. 화이트헤드는 청춘을 비하하기 위해 ‘비극에 노출되지 않은 생명’이라는 정의를 내린 것이 아니다. “젊음은 행복한 것이라기보다는 생동하는 것이다. 젊음, 그 자체가 아니라 젊음의 추억이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첫사랑이 정말 아름다워서라기 보다 그 기억이 아름다운 것이고, 지난 연인이 그리운 것은 그 사람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사랑하던 자기 자신이 그리워서인 것처럼 ‘젊음’ 그 자체보다는 추억 속의 젊은 시절이 아름다운 것이다. 정작 그 젊음을 통과하는 청춘들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터널 속에서 절망하고 절망하고 또 절망한다. 그렇기에 행복한 것이라기보다는 생동하는 것이라는 말이 참 적절하다.

    2010년 5월 연금반대시위 도중 길에 누워있는 청년

     사람 죽이는 사회 고발해야

    우리 나라 2,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유럽에서 자살율이 높은 나라에 속하는 프랑스도 젊은층의 자살률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35세-44세까지의 사망원인 1위와 15세-24세까지의 사망원인 2위가 자살로 드러났다. 이렇게 젊은층의 사망원인에서 자살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점차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다. 그래서 그저 관념적으로 ‘젊은 애들이 아직 고생을 안 해봐서…’라고 훈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사람 죽이는 이 사회를 고찰해야 한다.

    그 ‘젊은 애들’과 고통의 무게를 저울질해서 승자가 되는 기쁨을 만끽하려 애쓰는 것은 시간 낭비다. 더구나 나이에 따라 고통의 승자가 된다는 착각을 한다면 그야말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젊은 애들=고생 안 해본 인간, 이라는 그 도식적 관념은 참으로 위험하다. 인생의 상처나 비극은 생애 주기에 맞춰서 순서대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만 나는 알고 있다. 아마도 진정한 인생의 공포는 바로 그것이 아닐런지. 준비된 만큼의 상처가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익숙해진 상처가 찾아오는 것도 아니며, 예고도 없다는 것. 그래서 타인의 사적 과거에 대해 함부로 저울질 하고 함부로 경험의 계량기를 들이대지 않는 것, 그것이 “남의 인생에 대한 예의”라는 것만 알고 있다. 삶에 있어 고통의 무게를 저울질 하는 것은 참 무례한 일이니까.

    부족한 것은 성찰이 아니다

    오래 전에 쓰여진 <청춘예찬>이라는 민태원의 수필도 있다. 글이 참 화려하지만 그런 문체에 영 구미가 당기지 않는 취향인지 내게는 그다지 매력이 없다. 게다가 마치 여자의 아름다움을 지극히 남성적 시각으로만 찬미하는 남자를 만났을 때처럼, 내게 그런 글은 청춘에 대한 객체적 환상만 가득 넣은 듯 해서 어딘가 껄끄럽다.

    누구는 그렇게 청춘을 예찬하고 누구는 청춘을 따끔하게 위로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나왔을 때, 마치 IMF 전후 경제난 속에서 우수수 해고를 당하던 수많은 아버지들에 대한 시기 적절한 위로를 담은 소설 <아버지>의 등장을 보는 듯 했다. 가부장적 질서에서 희생되는 아버지들에 대한 위로가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는 하겠지만 정작 배고픈 아버지들은 그런 낭만적 신파에 빠져있기 보다는 하루하루 먹고 살아갈 현실적 대안이 절실하다. 그건 소설이니까 그렇다 치자. 그런데 청년 실업이 심각한 상황에서 청춘은 원래 그렇게 아픈거야, 원래 혼란스러워, 아직 경험을 더 쌓아봐야 알아, 이렇게 무마시킬 뿐 등록금 투쟁을 위해 길바닥에 나서야 하고 심각한 구직난으로 우울한 청춘을 양산하는 사회 문제를 피해가는 시각은 어딘가 불편하다. 성찰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막장 어른들이 도처에서 요동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젊은 그대들에게 부족한 것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라고 근엄하게 말하는 것은 뭔가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성찰? ‘낙오자’라는 주홍글씨를 자발적으로 새길 용기를 갖기란 쉽지 않은 사회에서 허덕거리며 스스로를 ‘좋은 상품’으로 만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이들에게 성찰이 부족하다는 건 사기다. ‘의지만 있으면’ 다단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는 것처럼.

    취직 안 되는 자식과 해고된 남편 보면서 그 동안 가정에서 가사와 자식 뒷바라지에 매였던 엄마들이 생계를 위해 최저 임금도 안 되는 노동 현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 힘들어요, “어, 청춘은 원래 그래.” 그런데 청춘 아닌 우리 아버지도 힘들던데? “아버지들도 원래 그래. 고개 숙인 남자 몰라?” 그러면 우리 엄마는 왜 힘들어요? “한 많은 여자의 일생도 모르니? 이미자 노래도 있쟎아!”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별로 행복이 보이지 않는데? 노인 자살률도 왜 그렇게 높지? “산전수전 다 겪으면 그렇게 되는 거야.” 그럼 대체 사람은 언제 행복해요? “젊은 놈이 말이 많아!”

    주체의 입장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해서는 안돼

    결국 예찬도 위로도 별로다. 둘 다 청춘의 타자화이기 때문이다. 어떤 청춘에게 나는 이미 어른, 혹은 어떤 어른에게 나는 아직도 청춘, 물론 내 스스로는 만년 청춘이라는 착각으로 살지만, 바로 그 청춘은 기성세대에 의해 타자화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청춘은 그 청춘이 주체적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말하기보다 언제나 청춘에서 멀어진 세대들에 의해 “나도 겪어봐서 아는데”라며 규정된다. 그리고 은연 중에 청춘은 스스로의 존재를 그렇게 믿게 된다. 하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간지러운 말을 쏟아내다가 맘에 안 들면 “20대 개**”라고 비하하는 것, 둘 다 청춘의 시각이 아니라 청춘 외부의 시각에서 이루어진 그들 식의 재단이다. 20대는 오늘은 위로 받다가 내일은 개**가 되어 패대기 당할 수도 있다. 사회에서 주도적 세력이 아닌 ‘만만한’ 젊은이는 기성 세대나 원로들에게 그렇게 쉽게 입맛에 맞춰 이리저리 정의되곤 한다. 청춘은 그렇게 자기 스스로 청춘을 말하기도 어렵다. “애들이 아직 고생을 안 해봐서 정신을 못 차려…” 글쎄다. 고생 많이 하고 세상에 안 해본 것이 없는 이명박 대통령은 왜 정신을 못 차리나. 얼마 전 아웅산 수치 여사를 만나서도 “내가 운동 좀 해봐서 아는데…”이렇게 무례를 범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인격이나 통찰력이 나이와 비례한다면 세상이 훨씬 정돈되고 살기 쉬울 것 같다. ‘어른’이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가?

    또한 청춘이 씩씩하고 아름답고 생기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 청춘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이다. 어린이가 어린이답지 않은 질문을 한다거나 표독스러우면 애답지 않다고 하지만 사실 애다운 것이 무엇인지는 어른이 정의한 것이다. 어른이 보기에 편하고 좋은 것을 유지해야 주변 어른들이 안심할 수 있다. 남자가 보기에 좋은 여자가 여성스러운 것이 되고, 노인은 적당히 동물적 욕구에서 초월한 듯 해야 어른스러운 것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이 먹어서 추하게’라고 손가락질 받는다. 모두 다 그들 주체의 입장이 아닌 ‘보는’ 사람의 입장이다. 우리가 보기 좋은 것을 타인에게 요구한다. 그래서 아픈 청춘은 위로할 수 있어도 꼬박꼬박 대꾸하는 청춘은 싸가지 없고, 약한 여성은 보호해줄 수 있어도 자기 주장 강한 여성은 재수 없어진다. 위로나 보호가 정녕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아한 억압이다.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위로나 보호를 통해 상대를 ‘약자’로 만들면서 자신들의 세계를 더욱 확립한다.

     청춘에 대한 예의

    19대 국회가 곧 시작된다. 청년 문제가 정치적 담론으로 성장하자 이 청년들의 표밭 관리인지 야당에서는 청년비례대표를 선발했다. 그러나 단지 나이라는 숫자로 같은 숫자를 가진 세대를 대표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나의 삶이 30대 중반 여성의 삶을 대표할 수 없고 50대 국회의원이 50대 해고자들을 대표하지 않는 것처럼. 세대론은 범람하지만 계급론은 가뭄이 들었다. 또한 기성 세대를 그대로 답습하는 청년이라면 단지 나이만 젊다고 모든 청년을 대표할 수는 없다. 흔히 볼 수 없는 이런 선진(?) 정책이 단지 보여주기가 아니라 궁극의 목표를 이루려면 여러 청년들의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관습적으로 우리는 청춘의 소리를 들으려 하기 보다 자신이 뭔가 그들에게 충고나 조언 혹은 위로를 해줘야 하는 위치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세대와 성별, 계급을 다 떠나 ‘인간’이 절실히 원하는 것은 억압 없는 ‘존중’일 테다. 최고의 대화는 듣는 것이듯, 최고의 존중은 그 존재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닐지. 아직도 사회의 목소리에는 균형이 없다. 대학생, 그리고 취직 전쟁을 치르는 4년제 대졸자로 상징되는 눈물겨운 그 ‘청춘’이라는 언어 속에서마저 밀려나는 고졸 이하의 생산직 노동자 청년도 있다. 청춘의 다양한 군상을 외면하지 말자. 나도 말이 너무 많네. 이제 입을 닫아야 할 시간인가 보다. 가르치지 못해 안달하기보다 청춘에 대한 예의를 좀 지켜보자. 다양한 청춘이 스스로 그 청춘을 말하도록, 그렇게, 좀 들어보자. 그것은 지나온 자기 청춘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니까.

    필자소개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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