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제리, 또 다른 민중
    '레 미제라블' 역사 뒤에 있는 것들
    [빵과 장미] 기억해야 할, 민족과 국경을 넘는 연대
        2013년 01월 07일 12: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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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이 한국에서 흥행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의 주역인 ‘프랑스 민중’의 힘에 많은 이들이 감동하고 있다고, 혹은 대선 결과에 지친 마음을 달래기에 유익하다는 등의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나는 ‘자유, 평등, 박애’에서 소외된 또 다른 민중의 모습을 말하고 싶다.

    [… 알제리 민중에게 프랑스 정부가 행하고 있는 이 전쟁은 방어전쟁이 아닙니다. 이 전쟁에서 자신들의 아내, 자식, 그리고 조국을 방어하는 건 알제리인입니다. 평화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이들은 바로 알제리인입니다.
    또한 제가 지키고 싶은 것은 프랑스인과 알제리인 사이의 우정입니다. 제가 존중하는 것은 프랑스 헌법입니다. 헌법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프랑스 공화국은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전쟁도 하지 않을 것이며, 민중의 자유를 침해하는 어떤 무력도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 이와 같은 이유로 저는 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알제리 민중을 향해 총을 들 수 없습니다.]

    이 글은 1956년 스무 살의 군인으로서 알제리에 파병될 운명에 처한 알반 리슈티Alban Liechti가 직접 대통령 앞으로 보낸 편지 중 일부이다. 프랑스 공산당(PCF)에 가입해 있었던 그는 편지에 적힌 대로 ‘알제리 민중을 향해’ 총을 드는 행위에 동참할 수 없었기에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특히 알제리 독립전쟁에는 많은 알제리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했었다. 프랑스 공산당원인 그가 전쟁에 참여하면 같은 공산주의자끼리 총을 겨누게 된다. 그는 거부했고 알제리에서 재판을 받은 후 전부 4년간의 감옥 생활을 했다.

    수감 중 그의 가족을 비롯하여 프랑스 공산당과 시민들이 석방 운동을 벌였고 또 다른 젊은 공산당 당원들도 파병을 거부하며 감옥행을 택했다. 일종의 파병거부 운동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국가의 침략 행위에 동조하지 않길 원했다.

    알반 리슈티의 2007년 모습(출처 Despatin & Gobeli http://despatin.gobeli.free.fr/)

    리슈티의 이야기는 <거부 Le Refus>라는 다큐멘터리와 책을 통해 기록이 남아있다. 지난 10월 중순 이 <거부>를 특별상영한 극장에 리슈티와 그의 동생이 초대되어 관객과의 대화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날 나는 여든이 가까운 리슈티를 눈 앞에서 보는데 마치 교과서의 흑백 사진 속에서 튀어나온 독립 운동가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그는 담담하게 자기 인생을 회고했다.

    “나는 내 결정에 후회하지 않는다. 내게 죽음의 위협도 있었지만 나는 결국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아무도 고문하지 않았다”며 그는 자신의 ‘거부’에 자부심을 가졌다. 감옥에서 나와 강제로 알제리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을 때도 그는 총에 총알을 넣지 않았다고 말했다.

    충격적이었다. 총에 총알을 넣지 않은 군인이라니.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알제리인을 죽이지 않겠다는 강한 결의다.

    모든 노동자가 단 하루라도 총파업을 한다면 세상이 마비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군인이 침략 전쟁에 반대하고 총을 들지 않는다면 전쟁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일 뿐 실제로 파업에 참가하는 노동자가 소수이듯 파병에 불복하는 군인도 소수일 수 밖에 없다.

    역사가 흘러서 지금은 리슈티와 같은 파병 거부자를 재조명하지만 당시에는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게다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대혁명 정신은 종종 ‘프랑스인’에게만 적용되곤 한다.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좌파들도 이 벽을 넘지 못할 때가 있다. ‘피’와 ‘국가’는 ‘계급’보다 더 강력한 힘을 뿜어낸다.

    그래서 피식민 국가의 인민을 연대해야 할 동지로 여기지 않는 치명적 결함은 종종 있어왔다. 독일 사민당이 1914년 전쟁 찬성에 투표한 것처럼 프랑스 사회당도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지 않았다. 1954년에 시작되어 1962년 에비앙 협정으로 종전에 이르기까지 8년에 걸쳐 벌어진 알제리 독립전쟁은 그렇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 8년의 독립전쟁도 프랑스 시각에서 보았을 때 8년이다. 알제리인들은 자신들의 독립전쟁은 132년간 꾸준히 있어왔다고 말한다. <레 미제라블>의 주요 배경이 되는 1832년 봉기의 시기, 알제리에서도 프랑스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있었다.

    식민 초기인 1830년에서 1860년까지 압델 카데르(Abd El Kader, 1808~1883)와 같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격렬한 저항운동이 수시로 있었다. 그러나 알제리의 무슬림 인구가 급속히 감소할 정도로 프랑스군의 무자비한 학살은 지속되었다. 1871년과 1945년에도 크게 무장 투쟁이 있었지만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알제리 전쟁’이라 명명되는 그 8년의 전쟁은 사실 가장 마지막의 치열한 전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1962년의 독립은 “오직 영웅은 민중이다”라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구호처럼 132년간 이어진 알제리 민중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다. 그 8년의 전쟁마저도 ‘독립전쟁’이었음을 프랑스 정부가 인정한 것은 1999년이 되어서였다.

    얼마 전 올랑드 대통령이 알제리를 방문했다. 2012년은 알제리 독립 50주년이었다. 알제리가 독립 50년 만에 과연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공식 사과를 받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올랑드는 ‘사과’ 하지 않았다. 식민 기간 동안 벌어진 범죄를 ‘인정’하는 선에서 멈췄다.

    알제리 독립 전쟁이 ‘전쟁’이었음을 인정하기까지 거의 40년이 걸렸고, 식민 통치가 부당했음을 인정하기까지 50년이 걸렸다. 고문 희생자 가족들은 아직도 프랑스 정부의 답을 기다린다. 그럼에도 이 모든 과거를 공식적으로 사과하기까지는 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필자소개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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