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개혁과 농민 저항운동 (1)
[현대 인도인민의 역사] 좌파 성장과 집권의 사회경제적 기반, 토지개혁
    2013년 01월 07일 09: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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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전형적인 농업 국가다. 브릭스(BRICs)라는 이름으로 세계의 신흥 대국 가운데 대표적인 나라이지만, 여름철 비가 많이 와야 할 때 오지 않아 농업 생산이 많이 나오지 않는 해에는 국내총생산이 크게 떨어지는 현상이 여전한 대표적인 농업 국가이다.

그래서 농민은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국민이며 그들의 주된 관심사인 토지개혁의 문제는 모든 정당의 주요 전략이다. 독립 후 공산당이 께랄라와 서벵갈 주에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토지개혁을 성공리에 수행했기 때문이고, 그들이 정권을 잃은 것도 이 토지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이다.

지금부터는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 국민국가 체제를 갖춘 1947년 이후 인도에서 농업개혁이 어떻게 전개되었고, 그와 관련하여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전해나갔으며 그 안에서 인민들과 좌파는 어떻게 저항하면서 버텨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독립 당시 인도 농촌은 비합리적이고 불평등한 토지 제도를 식민 유산으로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지주와 소작의 제도는 철폐되지 않아 지주는 작은 왕의 권리를 누렸고,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소작인은 노예 상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 그 사이에서 중개인(자민다리)의 존재와 권력의 남용은 농촌 사회에서 가장 고질적인 문제의 뿌리로 작용하였다. 1951년 기준 전체 농업 인구의 2%밖에 되지 않는 지주들이 차지하는 토지는 전체의 55~60%였고, 그 아래 자기 토지를 소유하는 자영농이 30% 정도 있었는데 전체 토지의 40~45%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토지 없는 소작인이나 임금 노동자가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무시무시한 중세 봉건 사회의 전형이 고스란히 독립 이후에도 이어졌던 것이다.

지주 계급의 끝없는 착취는 농업 생산의 발전 저해를 가져오고 농민의 극심한 빈곤과 불만 누적 등의 결과를 가져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신생 국가로서 반드시 풀어야 할 제1의 문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권을 획득한 네루의 회의당은 ‘위로부터의 토지 개혁’이라는 부르주아 정당의 토지 정책을 추진하였고, 농민은 그 안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한 채 자본주의 발전의 단순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향후 국가를 운영할 정부의 기본 방향은 국내 독점 자본의 인정과 개인의 경제 활동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를 구조적으로 보면, 민족주의 정당인 회의당 내에서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국가 계획 경제를 실시하여 사회 경제적 목표를 신속히 이루어야 한다는 좌파의 주장과 대자본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공업화를 통한 자본주의를 굳건히 해야 한다는 우파의 주장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 결과다.

이러한 결과는 독립 후 여당이 된 회의당이 근본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성격을 가졌으나 하나의 국민국가 건설을 둘러싸고 너무나 많은 이질적 세력을 포용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특히 강력한 힘을 가진 대자본가와의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실시하는 토지 개혁은 자연히 그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농업이 처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대다수 농민은 생산을 해내지만 극소수의 지주와 중개인들은 그 생산을 비생산적 소비로만 사용하였기에 생산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우선적으로 토지의 소유권을 경작자인 농민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회의당은 독립 이전부터 그들의 든든한 지지자였던 농민들에게 독립 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반드시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주겠노라고 약속을 했으나 지주들의 강력한 반발에 밀려 그것을 시행할 수가 없었다. 이에 농민들은 저항하였고, 회의당 정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농민을 탄압하는 일뿐이었다.

끝나지 않은 토지개혁 의제. 2007년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는 빈민과 소농들 (출처: Action Village India)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민주당 정부는 민주주의 회복과 남북 관계의 개선이라는 관점에서 스스로를 새누리당과 차별하면서 중산층과 노동자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예측했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진보세력이 처참하게 몰락해버린 상황 위에서 정규직은 물론이고 비정규직의 노동자들도 민주당의 주요 연합 세력이 되었지만 결과는 그 연합 세력의 참패로 끝났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 세력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서 그들이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정책을 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순진무구한 발상이라고 자탄하였지만 그나마 조차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거 노무현 정부 때도 그러하였고, 새로 태어나게 되면 문재인 정부든 안철수 정부든 모두 마찬가지 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재로서는 그조차도 만들어낼 없는 상황이다. 노동자들은 이를 직시해야 하지만, 노동자가 진보 자유 진영에 등을 돌려버린 상황이다. 그렇다고 다른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파쇼화 될 것으로 보이는 새누리당에게 유리한 구도를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서민이 앞장 서 만들어 주는 형국이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진보 정당 건설은커녕 파쇼화라도 막을 수 있겠는가? 서민과 중산층이 모두 돌아서버렸고, 시간이 가면 사람들은 보수화 되어 가고 있는데, .파쇼 집단이 정권을 잡을 때 진보정당이 세를 모으는 것보다 자유주의 정부가 정권에 있을 때가 더 유리하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담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의 공산당이 취한 위치 설정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독립 후에 보수 정부의 배신을 이용할 준비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것이 주 정부 수준에서 공산당 정부를 수립할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보수 세력은 반드시 부패하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것을 예측하면서 어떻게 진보 진영이 준비를 해나가느냐이다. 인도 공산당이 농민 사회에서 무엇을 했는지 잘 살펴보도록 하자.

민족 자본주의자와 사회주의의 연합 세력으로 독립 후 정권을 담당한 회의당은 5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든든한 지원군의 역할을 해 준 농민들의 요구를 전적으로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러자 독립을 전후로 도처에서 농민 운동이 터졌고, 회의당은 그것들을 탄압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엄청난 규모의 농민 저항 운동을 겪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부 데칸 고원 지역의 안드라 쁘라데시 주의 뗄랑가나(Telangana)에서 1946년부터 1951년까지 지속된 마오주의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무장 봉기다.

뗄랑가나 농민 운동은 인도공산당이 주도하여 일으킨 저항으로 3,000 개가 넘는 마을에서 10,000 에이커가 넘는 광대한 토지를 농민들이 모두 몰수하여 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무상 배분한 농민 저항 운동이다. 농민들은 처음에는 봉건 지주의 과도한 착취에 저항하는 수준이었으나 점차 부채 탕감과 토지 몰수와 무상 배분을 요구하였다.

이 운동은 진압당할 때까지 4,000여명이 넘는 농민들이 봉건 지주의 사병과 싸우다 죽은 독립 전후의 최대 농민 저항이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의미는 이 봉기는 인도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마오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농민 혁명을 부르짖은 무장 혁명이었다는 사실과 결국 인도 공산당이 게릴라전을 통한 무장 혁명 노선을 포기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타협과 정치를 통한 사회 변혁 추구의 노선을 결정했고, 이것이 향후 인도 공산당의 방향을 보여준 시금석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을 접한 회의당 정부와 자본가로 구성된 권력자들은 이 사건을 겪은 뒤 그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토지개혁을 실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회의당은 마침 중국에서 농민 세력에 의해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화를 두려워하여 하루 속히 농민들이 요구하는 토지 개혁을 시도해야만 했었다. 그 가운데 자본가들은 비생산적 기생 지주 계급의 철폐를 통해 농업 생산량의 극대화를 신속하게 추진해야 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중개인 제도를 철폐하고, 소작 제도를 개혁하며, 토지 보유 상한을 설정하고, 보유 토지의 통합을 통해 농업 성장과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로 하였다. 이는 토지 개혁의 근본인 ‘토지를 경작자에게(land to the tiller)’ 정신을 전혀 충족시키지 않는 그야말로 무늬만의 토지 개혁이었다. 결국 토지 개혁은 농민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었으나 그 시도의 칼자루는 정치와 경제의 권력자들이 쥐었을 뿐, 농민은 철저히 소외당했으니 그 결과는 불을 보든 뻔한 상황이었다.

토지개혁이 이렇게 형식적인 수준에 그친 것은 인도 공화국이 자본주의를 토대로 하는 법을 그 근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널리 아디시피 자본주의 법의 기초는 사적 소유권의 인정이다. 따라서 인도의 연방 헌법은 중개인과 지주의 토지를 보상 없이 몰수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편 연방제를 채택한 인도 국가는 토지개혁의 문제를 연방 차원의 문제가 아닌 주 정부 차원의 관할 사항으로 결정했다. 그 결과 누가 토지 경작자인지 규정하는 문제, 기존의 중개인과 지주들이 어느 한도로 토지를 보유할 수 있는지의 문제, 중개인과 지주에게 보상을 어떻게 얼마만큼 해줘야 하는지의 문제 그리고 토지 취득을 할 수 있는 자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 등에 관한 여러 사항이 각 주에 따라 달리 정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 정부는 사회 정의 수립을 위한 더 큰 틀에서의 중개인 제도와 지주제 철폐 등을 포괄적으로 시행하려 했으나 각 주 정부에서는 처음부터 지주와 봉건 세력들의 힘에 밀려 아무런 변화를 이끌지 못했다. 그들은 지주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비를 걸지 못하게 하였고 다만 형식적인 지주제만을 폐지하는데 동의하였다. 더군다나 그 정도의 형식적인 변화를 위한 입법마저 기득권자들의 압력에 의해 무한정 연기되었다.

토지개혁의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는 중개인의 토지 보유 제한이다. 그들의 토지 보유 제한은 나중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게 되는 서벵갈, 께랄라와 공산당에 의해 극심한 농민 저항을 겪은 안드라 쁘라데시의 뗄랑가나 지역 그리고 잠무-카시미르 주에서 상당 수준으로 이루어지면서 그들의 사회경제적 권한이 크게 약화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에서는 중개인 지주제가 형식적으로만 철폐되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토지의 대부분을 장악한 실제 경작자였으니 이전의 ‘사실상 소유권’이 이제는 ‘법적 소유권’으로 전환되었을 뿐이었다.

소작권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고 소작료를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지주들은 주 정부가 규정한 자경 토지를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그 위에서 소작인들을 협박하여 그들의 모든 권리를 ‘합법적’으로 부인하였다. 특히 주 정부가 규정한 소작인의 소작권 ‘자발적 포기’는 소작인 축출에 널리 악용되는 좋은 도구로 이용되었다. 여기에 인도는 전통적으로 소작 계약을 구두로 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 소작 기록이 없어서 그들에게 전적으로 불리하게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1977년 공산당이 집권한 지 1년 뒤인 1978년 서벵갈 정부가 실시한 ‘작전 바르가(Operation Barga)’이라는 이름의 소작 기록 정비 작업은 많은 소작인들에게 소작권을 법적으로 보호받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서벵갈과 이미 토지개혁을 강력하게 시행한 께랄라를 제외한 대두분의 지역의 소작인은 제대로 항거한 번 하지 못 한 채 축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필자소개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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