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주 이상룡의 집 - 임청각
    [목수의 옛집 나들이 7] 조선 선비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2013년 01월 04일 01: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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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 이상룡이 살던 집, 임청각

    백여 년 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위기를 맞자 안동의 유림은 ‘공맹은 시렁 위에 얹어 놓고 나라부터 구하자!’라며 떨쳐 일어났다. 석주 이상룡 선생도 그 대열에 함께 했다.

    고성 이씨 17대 장손으로 1858년에 태어난 석주 선생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망설임 없이 의병자금 지원, 대한협회 안동지부 조직, 협동학교 설립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지자 이번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1911년 1월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너희들도 이제 독립군이다”라며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오십여 명의 가솔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갔다. 그는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등의 단체를 설립하거나 이끌었고,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기도 했다.

    1932년 중국 길림성에서 서거할 때까지 조국의 해방과 독립운동단체를 통합시키는 일에 온 힘을 쏟았던 진정한 ‘조선의 선비’였다.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고, 아들과 손자를 비롯하여 아홉 명의 후손들이 그 뜻을 받들어 광복을 맞을 때까지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며 항일운동을 펼쳤다.

    거국음. 임청각 군자정에 걸려 있는 석주 이상룡이 서간도로 떠나기 전 남긴 시

    去國吟 조국을 떠나며
    山河寶藏三千里 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산하여
    冠帶儒風五百秋 오백년 동안 예의를 지켜왔네.
    何物文明媒老敵 문명이 무엇이기에 노회한 적 불렀나.
    無端魂夢擲全甌 까닭 없이 꿈결에 온전한 나라 버리네.
    已看大地張羅網 이 땅에 그물이 쳐진 것을 보았으니
    焉有英男愛髑髏 어찌 남자가 제 일신을 아끼랴.
    好佳鄕園休悵惘 고향 동산에 잘 머물며 슬퍼하지 말지어다.
    昇平他日復歸留 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

    임청각의 역사

    안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낙동강을 따라 가다보면 임하댐 방면에서 내려오는 반변천과 합수되는 근처에서 강은 북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즈음부터 서쪽으로 철길이 나타나고 그 너머 경사진 터에 기와지붕이 보이는데 그 곳이 임청각이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법흥종택으로 안동 입향조인 이증의 셋째 아들 이명이 1519년(중종 14년)에 지었다. 택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구절인 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 [등동고이서소 임청류이부시 :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읊으리]에서 따서 임청각이라 했다.

    임청각은 보물 제 182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살림집으로 1519년 창건되었고 임란 후 1600년과 1769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다. 본채와 별채인 군자정의 창호와 공포부재에는 조선 초기 양식이 상당히 남아 있다. 이러한 것들을 보아 두 번의 중수에도 완전히 새로 짓지 않고 초기의 건물을 증축, 또는 수리한 것으로 추측된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에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1930년 후반에 일제는 중앙선 철도를 건설하며 독립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임청각 전체를 헐어버리려 했으나, 안동 사람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행랑채와 문간채, 중층의 문루만을 철거하였다. 지금은 칠십여 칸이 남아 있다.

    허주 이종악(1726-1773)의 산수유첩. 1763년 4월 4일 당시 임청각의 주인이던 허주공이 그린 그림인데 낙동강과 임청각을 잘 묘사해 놓았다. 임청각의 배치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임청각의 배치

    임청각은 안동시내에서 안동댐 방면으로 1.5km 정도 떨어져 영남산의 남쪽자락과 낙동강 사이의 좁은 경사지에 위치해 있다. 낙동강 건너편에는 문필봉과 낙타산이 연이어 병풍처럼 이어져 있어 풍광이 좋다.

    임청각 내부의 각 건물들은 담장에 둘러져있고 그에 따라서 편의상 크게 4개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군자정을 중심으로, 본채는 서쪽에, 마당은 남측 낮은 곳에, 사당은 동측 높은 곳에 있다. 군자정은 별당이고, 본채는 살림집, 마당은 진입 공간, 사당은 조상의 공간이다.

    이 네 개의 영역은 본채와 마당의 경계를 제외하고는 모두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고 협문을 통해서만 연결된다. 이처럼 민가에서 내부 영역을 담장으로 철저히 구획하는 것은 매우 보기 힘든 형식이다.

    본채

    임청각 본채는 용(用)자형 구조에 남향이며 지금 남아 있는 것만 하더라도 오십여 칸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이다. 임청각 본채에 사용된 용(用)자형은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친 것으로 둘의 합은 명(明)이 된다. 풍수에서는 이런 물리적인 합이 아니라 천지의 정기가 화합한 형상으로 본다. 일과 월은 남녀 및 음양을 의미하며 음양이 합치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과 같이 보는 것이다.

    본채는 마당을 중심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동쪽 상단 우물이 있는 곳이 사랑마당인데 이곳을 중심으로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서쪽 문을 들어가면 안채마당이다. 안채마당의 북쪽에는 대청과 안방이 있으며 다시 안채마당의 서쪽으로 나아가면 부엌마당이다. 그 아랫단에도 두 개의 커다란 마당이 있는데 모두 행랑채에 둘러져 있기에 안행랑마당과 바깥행랑마당이라고 한다.

    임청각 본채. 오십여 칸의 큰 건물로 용자형의 건물이다.

    임청각 안채는 진입이 매우 번거롭다. 대문을 지나 서편 바깥 행랑채 동측 계단을 통해 사랑마당으로 이르게 된다. 사랑마당 서쪽에 있는 안채 대문을 통해야만 비로소 안채로 이르게 된다. 이밖에 부수적으로 안채 내부로 진입할 수 있은 문이 있으나 모두가 행랑채와 부엌마당, 행랑마당을 거쳐야만 한다. 남녀를 구별하는 유교적 인식에 따라 계획되었기에 안채 출입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폐쇄적인 형태이다.

    임청각의 안채는 비슷한 용(用)자형 배치를 한 경주 양동마을 향단에 비하면 안채마당이 넓어 한결 트인 느낌이 나지만 지난번 글에서 소개했던 조선후기 실용적 주택이었던 괴헌고택과 비교하면 폐쇄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혹시 전통 건축을 보러 갈 기회가 있으면 집의 구조를 보며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행동을 유추해 보는 것도 좋다. 양동마을 향단의 안마당에서 그곳에서 살았던 당시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더라.

    본채 구조는 안대청을 제외하고는 모두 삼량가이다. 안대청은 오량가 구조에다 전면에 툇간을 두어 더욱 넓다. 대청 전면에 툇간을 두었기에 대청마루는 넓어졌으나 기둥이 마루 가운데 서게 되는데 이는 생활에 불편을 주었을 것이다.

    임청각 본채 안대청. 오량가 전면에 퇴량을 두었다. 대청 가운데 기둥이 있는 불편함보다 넓은 대청을 선호한 결과이다.

    용자형의 임청각 본채를 이루는 건물군의 높낮이 차이를 살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본채는 각각 다른 높이의 횡으로 긴 세 개의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그 중 아래 두 단의 건물은 내부에서 보면 중층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임청각이 경사지에 건립되었기에 가능한 구조인데 위층은 고상식의 마루방인데 주로 창고로 쓰이고, 아래는 다양한 형태의 수장 및 작업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본채는 규모가 커서 다양한 창호가 사용되었는데 그 아름다움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제일 아랫단 행랑채 남측에는 같은 모양의 환기창을 일정하게 설치하고 인방의 위치를 달리 하였다. 이곳의 창호는 횡으로 긴 건물의 엄숙함, 창호의 규칙성, 인방의 변화로 나타나는 리듬감이 참 좋다. 이 행랑채를 보면 해인사 장경판전 창호가 생각난다.

    임청각 정침 행랑의 전면창호. 엄숙함, 규칙성, 리듬감이 잘 나타나 있다.

     

    군자정

    군자정은 임청각에 있는 별당 형식의 누정이다. 우측의 2*2칸 대청과 좌측의 1*4칸 방이 서로 등을 붙이고 하나로 합쳐진 형상으로 왕릉에 있는 정자각과 비슷한 구조이다.

    우측 대청은 주심도리, 중도리, 마룻도리가 있는 오량가 구조에, 둥근기둥을 사용했고, 화려한 팔작지붕, 기둥사이에 화반이 있는 이익공 양식이다. 반면 좌측 방은 주심도리, 마룻도리만 있는 삼량가 구조에, 사각기둥을 사용했고, 단아한 맞배지붕, 기둥위에는 아무런 공포가 없는 민도리 양식이다.

    군자정은 살림집 별당 건물이면서도 단청이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데 대들보, 공포부재, 우물반자 등에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을 비롯한 법률서를 보면 민가의 단청은 엄격히 금지했는데 지방이라 규제가 미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단청이 있었던 사찰의 부재를 가져와 새로 지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한 고증이 필요하다.

    군자정에는 퇴계 이황의 친필 현판을 비롯한 많은 편액들이 있다. 그 중에는 앞서 소개한 석주 선생이 간도로 떠나며 남긴 ‘거국음’도 걸려있다.

    군자정. 건물 바닥이 높고, 전면과 동측면에 계자난간이 있어 건물이 화려해 보인다.

    사당

    사당은 군자정의 오른편 연못 옆 높은 곳에 있다. 군자정 마당에서 높은 계단을 올라 협문을 통과하면 사당마당이 있고, 높다란 석축 위에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자연석 초석에 각기둥을 사용하였고 건물 내부에는 기둥이 없다. 정면 툇간 양쪽 측면에는 판문이 있는 게 특이하다. 가구는 규모가 작은데도 오량가이고 구조가 훤히 드러나는 연등천장, 엄숙한 맞배지붕, 공포가 없는 굴도리집이다. 군자정과 마찬가지로 내부에는 뇌록가칠한 단청의 흔적이 있다.

    1911년 1월 석주 이상룡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임청각을 떠나며 나라를 되찾을 때까지는 조상의 봉제사도 어려우리라고 판단하고 사당에 모셔 놓았던 조상의 위패를 뒷산에 파묻고 갔기에 아직도 내부는 비어있다고 한다.

    사당 내부의 단청 흔적도 보고 싶고, 위패를 새로 모셨는지도 보고 싶었으나 사당은 굳게 잠겨있더라.

    사당.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쉬움이 크다. 다음에라도 내부가 공개되면 다시 찾아야겠다.

    마당 영역

    임청각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마당이다. 위로는 담장으로 구획된 군자정이, 서쪽으로는 본채가 있다. 지금은 마당과 본채를 구분하는 담장이 없는데 이전 자료를 보면 본채와 마당도 담장으로 나뉘어져있었다. 마당 앞에는 대문과 토석담이 있고 밖에는 신세동 칠층전탑으로 향하는 도로와, 중앙선 철로, 그 너머로 왕복 2차선 도로 및 인도, 그 아래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임청각 앞 강변도로를 보면 황색 두 줄 중앙선이 갑자기 넓어지는 곳이 있다. 바로 그 자리가 임청각 회화나무가 있던 곳이다. 회화나무는 임청각 대문채 바로 앞에 있었다 하니 원래 임청각 대문채는 지금의 중앙선보다 낙동강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중앙선 철길이 옮겨진다면 임청각의 대문채와 중층누각, 행랑채도 복원할 수 있으리라.

    2008년까지만 해도 임청각 앞 강변도로 한가운데 ‘안동의 신목’이자 ‘임청각 학자수’로 알려진 회화나무가 있었다. 일제가 의도적으로 임청각의 지맥을 끊기 위해 철길을 내면서 회화나무와 임청각은 철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게 되었다.

    석주 선생이 독립투쟁을 위해 간도로 떠날 때도 이 나무 아래에서 출발하였다. 임청각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갈 때도 좋은 소식을 기원하며 길을 떠났고, 과거 급제를 하고 와서는 청·홍 비단을 걸어주며 감사의 뜻을 전했던 학자수였다. 한말, 일제가 불을 질러 안동시내가 전부 불바다가 되었을 때 시민들이 피신을 했던 곳이며 6.25때 폭격으로 사람들이 갈 곳이 없을 때도 이곳에 모여 생명을 부지 했던 곳이고, 안동시내와 용상동을 잇는 개목나루를 지나는 행인들의 쉼터가 되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임청각과 안동사람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던 나무이기에 안동댐 진입로를 개설하면서도 없애지 않고 도로 한가운데에 두었던 것이다.

    그런 나무를 2008년 8월 22일 새벽에 누군가가 잘라 버렸다. 그래도 회화나무는 죽지 않고 싹을 틔우며 또 자라기 시작했으나 2010년 8월 3일 새벽, 한 20대가 운전하던 승용차가 들이 받아서 회화나무는 뿌리째 뽑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임청각 회화나무(2010년 초여름). 2008년에 누군가 허리를 베었는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고목이 새싹을 틔웠다. 그러나 2010년 8월 교통사고로 이 둥치마져 뿌리째 뽑히고 말았다.

    임청각을 나서며

    임청각은 1519년(중종 14년)에 건립된 살림집으로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사료이다. 특히 각 영역을 구획하는 담장, 본채의 배치, 오래된 법식이 남아있는 창호와 가구부재, 민가에서 보기 힘든 단청의 흔적 등은 고건축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속적으로 공부해야하는 너무나 소중한 자료이다.

    한편, 이 집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이 태어나서 살았던 집으로 독립자금의 큰 밑천이 되기도 했다. 석주 선생은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이 저택을 매물로 내놓자 고성이씨 종친회에서 세 번씩이나 석주 선생에게 다시 사주었다. 결국 고성이씨 종친들이 합심하여 임청각 집값을 세 번이나 독립자금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러니 석주 선생만 아니라 여기에서 자란 많은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통해 조국과 민족의 소중함을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조선의 지배층이었던 선비로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것이다.

    임청각은 유형의 박제된 우형의 문화재만이 아니다. 유형의 건축물과 공간에 살았던 사람과 그들의 활동은 단순한 유형적 가치를 넘어서 무형의 사회적, 시대적 가치를 보여준다.

    유난히 눈이 많은 겨울이다. 백여 년 전 이맘 때, 그 추운 겨울에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떠난 석주 선생을 생각해본다. 새해에 새로운 계획을 세울 즈음에는 임청각을 찾아도 좋다.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조금 북쪽으로 가면 국보 16호인 신세동 칠층전탑과 고성이씨 법흥동 종택도 있다.

    석주 이상룡 선생. 그는 임청각을 떠났지만 임청강의 영원한 주인이다.

    필자소개
    진정추와 민주노동당 활동을 했고, 지금은 사찰과 옛집, 문화재 보수 복원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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