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낙살반군, 체제전복 꾀하다 (2)
[현대 인도인민의 역사] 네팔 공산당 집권과 그 이후
    2013년 01월 03일 10: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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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의 낙살 공산 혁명은 실패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동부와 동남부의 산간 지역에 위협 세력으로 존재하고 상당수의 해방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세가 크게 위축된 지 벌써 몇 년 째다.

그런데 이웃 나라 네팔에서는 마오주의자 공산당이 내전을 통해 세를 결집하고 그를 바탕으로 총선에서 일약 집권정당이 되기까지 했으나 여전히 기득권자들의 두꺼운 방호벽을 뚫지 못하고 있다. 네팔에서는 인도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제도권 정치계 안에서 그들이 얼마나 초심과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헤매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다. 안타까운 실정이다.

네팔은 히말라야 산맥과 인도, 방글라데시 등에 둘러싸여 폐쇄되어 있는 전형적인 산악 국가로 세계에서 가장 개발이 안 된, 그래서 세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낮은 나라 중의 하나다. 그 위에서 100 여개의 카스트와 종족 집단이 있고, 100여 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있어 국민 통합이 매우 어려운 상태다.

오랫동안 힌두 왕국이었지만, 1950년대부터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세력과 국왕 사이의 각축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60년에 당시 왕이던 마헨드라(Mahendra)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한 후 모든 정당과 의회를 해산하고 그 위에 빤짜야뜨(Panchayat)라는 회의 기구를 도입하였다.

빤짜야뜨는 같은 이름으로 인도에서는 지방 자치제의 최하 단위로서 전형적인 민주주의 의회 자치를 구성하는 기구인데 반해 이곳에서는 그 이름을 도용하여 ‘국왕의 지도에 의한 민주주의’를 이행하는 독재를 위한 첨병 역할이었다.

굳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 말하자면, 박정희 정권 시절에 유신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기구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들어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할 수 없도록 만든 것과 동일한 맥락의 산물이라 하겠다.

그러나 마헨드라 왕의 뒤를 이은 비렌드라 왕의 독재는 영원하지 못했다. 1990년에 네팔 역사상 처음으로 인민들의 봉기에 부닥쳐 권력이 무너진 것이다. 여러 공산주의자들이 주도 하여 일으킨 이 인민 봉기는 나중 2006년 다시 일어난 다른 인민 봉기와 비교하여 제1차 인민운동(Jana Andolan)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네팔 인민봉기의 모습

왕은 인민 봉기에 굴복하여 빤짜야뜨를 폐지하고 의회 군주제를 도입하는 등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고, 여러 분파로 나뉜 공산주의자들은 네팔공산당(통합 마르크스 레니니스트, 이하 ML)으로 합당하였다. 그리고 네팔공산당은 숙의 끝에 무장 혁명 노선을 폐기하고 의회 민주주의에 참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어 1991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네팔공산당(ML)은 기득권자들의 지지 정당인 네팔회의당과 함께 양강 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의회 민주주의가 도입된 이후 계속해서 기득권자들의 방해로 인해 헌법 제정이 유보 되고,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서 불만이 축적되었다. 그리하여 네팔공산당(마오주의자, 이하 M)이 1994년에 창당되었다.

당수인 쁘라짠다(Prachanda)와 네팔공산당(M)은 1996년 왕에게 인민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 후 2008년까지 내전은 계속되었고, 네팔공산당은 전체 국토의 80% 정도를 차지하는 전과를 올린 상태에서 2008년 제헌의회 구성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다수당의 위치에 오르고 다른 군소 세력과 연정을 통해 집권 정당이 되었다.

공산당이 유혈 무장 내전을 거쳤으나 협상 끝에 의회 선거에 참여하여 집권을 하는 세계사 상 가장 특이한 공산당 정권이 탄생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쁘라짠다 정권은 기득권자의 방해를 뚫지 못하고 2009년 5월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공산당 정부는 아무런 개혁도 하지 못한 채 일단 막을 내였다. 절반의 공산 혁명을 이루었으나 정치적 능력을 갖지 못한 세력이 기득권을 당해 내지 못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정치는 이념이나 완력으로 혼자서 할 수 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인민이 뒤를 받친다고는 하나 그 인민같이 이해 불가하고, 방향 파악할 수 없는 존재도 없다.

네팔이 이렇게 오랫동안 내분을 겪는 것은 오랫동안 만연한 빈곤과 불평등이라는 사회경제적 요인에서 비롯된다. 그 가운데 우선은 극심한 빈곤이고 그와 동시에 힌두교 카스트 체계에 의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만연하여 인민의 불만이 팽배해 있다. 대부분의 권력과 부는 종족과 카스트에 따라 소수에게 집중된다.

그런데 그 집중은 결정적으로 마헨드라 왕이 도입한 빤짜야뜨 체계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빤짜야뜨는 ‘한 국왕, 한 나라, 한 언어, 한 의복’을 표방하는 전형적인 국가주의 독재를 표방하는 정치 기구였다. 그런데도 표리가 부동하게도 마헨드라 국왕은 카스트, 지역, 여성, 언어, 종교 등에서 소수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집단에서 엘리트를 뽑아 관료로 임명하거나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전형적인 분리 통치 기술이었다.

그런데 그 분리 통치술이라는 것은 항상 시간이 걸리면 그 집단의 대표로 뽑힌 엘리트들이 자각을 하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큰 저항을 하기 위해 더 큰 집단을 만들려고 한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마헨드라 국왕은 그것을 간과했고, 그 엘리트들은 그 위에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1990년의 일이고, 그 세력들을 모으는 일을 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였다.

네팔의 인민들은 1990년 봉기를 일으켜 빤짜야뜨 체제를 붕괴시키고 민주주의를 복원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가면서 그 동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온 여러 소수자 집단들에 대한 고려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크게 카스트, 종족, 성(性), 언어 등의 차원에서 억압받던 사람들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런데 선거를 통해 양대 정당으로 성장한 네팔회의당과 네팔공산당(ML)은 그런 소수자 문제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네팔 사회가 갖는 근본 문제는 토지를 둘러싼 수탈과 빈곤의 문제와 소수자 배제의 문제인데, 공산당(ML)은 전자에 관심을 주로 두면서 점진적 개량을 주장한 반면 공산당(M)은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일대 변혁을 기도하였고, 그 방식으로 무장 혁명을 주장하였다.

마오주의 공산주의자들이 전개한 내전은 철저한 게릴라전으로 전개되었다. 그러자 정부는 2001년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기존의 경찰 대신 군대를 투입하였다. 그렇지만 마오주의자들의 게릴라전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은 채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교착 상태가 200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자 갸넨드라 국왕이 2005년 2월, 군부와 짜고 국회를 해산하고 국정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민 사회 및 정당 세력들이 2006년 거리로 뛰쳐나오면서 제2차 인민 봉기가 터졌다.

그리고 2006년 양자 사이에 포괄적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2008년 제헌 국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마오주의자들은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공산당(M)이 주도하는 연립 정당이 과반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때 공산당(M)이 차지한 의석수는 전체 602석에서 229석이었다. 하지만 연립 정부는 반군을 정규군으로 전환시키는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다 분열되었고 결국 내각 총사퇴가 일어나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아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2006년 평화 협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전 국토의 80% 정도를 점령했던 공산당(M)이 왜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을까 하는 점이다.

공산당(M)은 그 이름이 내건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정치 집단이다. 따라서 공산 혁명을 통해 기존의 경제 권력을 쫓아내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것보다는 연방제 국가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지역이나 카스트 등의 차원에서 소수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의 평등한 처우를 위한 싸움에 더 몰두하였다.

그것은 네팔의 마오주의 공산주의가 처음에는 동부 네팔을 통해 인도의 낙살 마오주의의 영향을 받아 강력한 토지 개혁 등 농민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서부 네팔을 중심으로 종족 운동 차원에서 평등성을 더 중시하는 집단이 세력을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공산당(M)이 선거를 통해 집권을 하는 전략을 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네팔의 다민족 사회의 성격 때문이었다. 마오주의 공산당이 사회 경제적 이념을 통해 만든 계급이라는 것으로 서로 다른 모든 소외된 정체성 집단을 포용할 수는 없다.

2006년 이후 종족, 언어, 카스트, 종교 등에 기반을 둔 다양한 정체성 집단이 새로운 네팔을 건설하기 위해 갈등 중이다. 민주화와 사회적 포용은 이 과정에서 구심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부 남부 지역은 민주화와 사회적 포용의 개념을 자신들의 자치권 확대 차원에서 해석할 정도다. 그들에게 계급 의식은 매우 희박하다. 그래서 공산당 반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은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거 식민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만든 민족/국민 차원의 민족주의나 농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계급주의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곳 네팔이 그렇고 아프가니스탄이 그렇고 버마가 그렇고 이라크가 그렇다. 그 외에 많다. 그들 나라에서는 그 어떤 이념의 정체성보다 종족의 정체성이 강하다. 그 정체성은 인종, 언어, 종교, 카스트 등이 이질적으로 결합되면서 나타난다.

공산주의와 같은 사회 경제적 이념은 포스트 식민 시기에 아시아 곳곳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정체성의 정치를 하나로 통합할만하거나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불가촉천민이나 소수 부족, 혹은 여성이나 차별 지역의 입장에서 볼 때 공산주의가 자신의 차별을 풀어줄 수 있는 이념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은 찾아볼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기존의 진보 진영에서 내세우는 정치로 자신들의 사회 경제적 위치가 바뀔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진보 정치는 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교수 즉 시간강사도 마찬가지의 입장이다. 진보적 교수 단체들이 왜 한진중이나 쌍용차 문제에 대해선 그렇게 열을 올리면서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시간강사들은 진보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자신들의 소외된 위치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을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가?

또, 다른 각도에서 한 번 생각해보면 진보 진영이 애지중지 하는 그 민중이나 인민들 대부분은 진보 진영을 같은 편으로 생각지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여전히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를 주장하는 그 진보 진영에게 보수 진영은 말할 것이다. ‘바보야, 이제는 공감이야’라고.

필자소개
이광수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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