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의 좌파' ①
    맑스주의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
    [비판과 비평]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2012년 12월 31일 04: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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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종석씨가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그의 최후의 저작을 읽고 비평문을 보내왔다. 단순히 홉스봄의 글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는 홉스봄의 창문을 통해 20세기 맑스주의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정리한 글이다. 맑스주의, 홈스봄식의 맑스주의, 21세기 맑스주의에 대한 필자의 고민이자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짜여진 틀 속의 글이라기보다는 고민의 쟁점과 실천의 고민점에 대한 필자의 고백이기도 하다. 글을 2회(2년^^)에 나누어 게재한다. 이 글은 또한 사회진보연대의 기관지 <사회운동>에 기고한 글이기도 하다. 오프라인 매체와 온라인 매체의 특징을 고려하여 사회진보연대와 필자의 동의를 얻어서 <레디앙>에 먼저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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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정세의 역설

    이미 수십 년간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장애는 지속되고 있다. 미국 금융위기와 유럽국가들의 재정위기는 자본주의의 중심부의 경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뚜렷한 신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하고 있다는 말이 체제가 붕괴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당분간 자본주의 체제는 지속적인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윤율의 저하, 경제의 금융화와 벨에포크의시대, 그에 이어지는 금융과 산업의 동시적 위기. 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확히 예언했던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경제구조는 내적 동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위기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기술편향적 축적과 이로 인한 자본생산성 하락이 위기의 내적 원인이다.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제도적인 혁신이 부재할 때 위기는 지속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가르침이다. 이윤율저하 법칙은 이를 간단히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위기가 반체제운동의 성장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가 위기 상태에 놓여있지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견고한 성을 구축하고 있으며, 이념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아무런 동요도 없다. 세계변혁을 주장했던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운동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에서조차 점차 주변화되고 있다.

    노동자운동과 급진주의 이데올로기와의 해후의 시간은 도래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자계급 운동을 대표했던 사민주의 정당들은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수용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체계적으로’ 배신했다. 우리의 시대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반체제운동의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시대이다. [극단의 시대]에서 홉스봄은 이를 두고 ‘산사태’라고 표현했고, 윤소영 선생은 이를 ‘현정세의 역설’이라고 했다.

    좌파의 위기는 한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90년대 한국 민중운동을 이끌던 민주노총은 2000년대에 들어와 심각한 부침과 투쟁력 약화, 건강한 조직문화를 상실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노동자운동을 대변하며, 제도 공간에서의 급진주의를 실현하려던 일련의 정당운동들은 주류화와 분파주의, 고질적인 노선상의 갈등으로 인해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경제위기의 국면에서 부르주아들은 더 공격적으로 노동의 안정성을 파괴하고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킨다.

    한국의 변혁적 분파들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 운동을 자임함에도 불구하고, 90년대의 볼세비키적 노선에서 단 한 발자욱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정세 분석에서도, 주체적 대응능력에서도 그들은 퇴행하고 있다. 반면 진보신당과 같이 신좌파를 선언한 일부 집단들은 이념과 노선, 정세분석에서 무능력을 보일뿐만 아니라 활동 자체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직 문화조차 확립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최근 타계한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제목의 책의 출판은 특히 적절하다. 이 책은 그가 지난 수십 년간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와 그를 계승한 후예들의 이념적, 정치적 실천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의 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마르크스에게 이행은 무엇이었고, 지난 한 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무엇을 목적으로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볼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나 그 후예들의 실천이 당장의 한국 사회주의 운동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홉스봄이 책에서 누차 강조하는 것이다.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통해 현 정세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사고하도록 문제의식을 던져준다는 점이다. 그 이상의 몫은 우리 자신의 과제이다.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 Ⅰ: 역사론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책 전체의 총론격으로 제시된 1장의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하여, 이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와 그 후예들의 마르크스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학술적인 논의는 최소한으로만 다룰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글의 목적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현 정세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라고 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마르크스주의다. 많은 학자들이 엥겔스의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의 그것을 구분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두 창시자들이, 각론에서 차이가 있다 해도, 큰 범위에서 공동작업자라는 입장에 동의한다.)

    홉스봄과 맑스. 사진 이미지 출처는 그린비 출판사

    이 책은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과 경제학 비판을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 책은 ‘세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실천적 문제의식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마르크스 자신의 실천이론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변혁론을 다루기에 앞서 우리는 그의 역사론을 간단히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역사론은 7장 ‘전자본주의 구성에 관한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진다. 우리는 흔히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역사5단계설로 알고 있다. 역사5단계설이란, 모든 사회들이 원시 공산제에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를 거쳐 공산주의에 이르는 사회구성체의 연속적 교체에 관한 이론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는 1930년대 소련의 공식 교과서에서 정립한 교조이지 마르크스 자신의 입장은 아니다.(180쪽)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에서 마르크스가 경제학 비판을 위한 작업가설로 사회구성체의 단계적 이행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이런 관점을 갖고 경제학 비판을 하겠다는 계획이었지 실재 마르크스의 역사서술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사회구성체의 연속적 변화는 1950년대 소련의 교과서조차 유보조건을 달 정도였다.(182쪽)

    실제 역사적 사회구성체에 대한 마르크스의 논의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 책은 [자본] 제 1초고이다.)에 포함된 ‘전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이뤄진다. 이 장에서 마르크스는 사회구성체가 연속적으로 교체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원시공산제가 여러 구성체로 전환된다고 쓰고 있다. 각 지역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마르크스는 원시공산제는 고대노예제, 게르만적 봉건제, 아시아적 생산양식, 슬라브적 공동체 등 상이한 경로로 발전했음을 시사한다.(157쪽) 원시 공산제가 고대노예제로 변동하고, 고대노예제가 봉건제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마르크스가 그렇게 썼다면 그것은 “문자 그대로 비현실적”인 주장이다.(160쪽)

    더불어 고대 노예제조차 로마제국에게 독특한 것이었으며, 다른 지역에는 그와 같은 구성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이 체제가 반드시 봉건제로 이행해야할 필연성도 없었다. 두 구성체는 원시공산제를 대체하는 경쟁하는 사회구성체였다. 더불어 서유럽 봉건제의 확립은 노예제가 봉건제로 이행한 결과가 아니라 노예제가 붕괴하면서 공존하고 있던 게르만적 봉건제가 ‘확산된 결과’였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필연성도 기각된다. 마르크스 자신은, 예상과 달리 봉건제 자체의 역동성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분석하지 않는다.(165쪽) 봉건제의 역동성을 알기 위해서는 마크 블호르와 같은 아날학파의 성과를 읽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봉건제이든 그보다 더 보편적이었던 공납제 양식이든, 어떤 체제도 내적 역동성에서 보았을 때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필연성은 없다.(167쪽) 서유럽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이행했다면 그 이유는 봉건제 자체의 내적 동력이 아니라 독특한 ‘역사적 맥락’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유럽의 후기 봉건제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이유는, 중세 내부의 화폐경제의 발전과 농민층의 분화로 인해 자본주의로의 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전자본주의 체제가 자본주의의 전제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깊이 있게 분석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자본]의 목적은 자본주의 구조의 분석이지 사회구성체의 역사적 이행단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 이행의 필연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이행해야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래한다는 사고를 흔히들 목적론이라고 한다. 목적론이란 역사가 특정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고방식이다.

    마르크스의 저작은,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사회주의의 필연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헤겔법철학 비판]이나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존재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시하는 것은 그가 헤겔좌파였을 때 지녔던 관념론적 유산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126쪽) 에티엔 발리바르가 썼듯이, 마르크스는 역사의 나쁜 방향을 보면서 [공산당 선언]의 목적론을 정정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의 주체로 구성될 수 있지만 그들이 선험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보장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현재의 맥락에서 역사를 예측해 보았을 때, 미래는 사회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언급하고 있던 ‘두 계급의 공멸’로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 경제의 심연이 낳고 있는 세계위기는 두 계급(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파국’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홉스봄은 사회 전체의 혁명적 재구성인가 공멸인가라는 두 전망 중 21세기에 어느 것이 더 우세할 것인가가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이라고 ‘우울하게’ 쓰고 있다.(130쪽) 그의 후기저작 [극단의 시대], [미완의 시대]를 함께 고려해 보았을 때, 그가 예상하는 역사의 방향은 두 계급의 공멸의 가능성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는 사회주의자들, 변혁적 입장에 선 자들로 하여금 더 뚜렷한 역사의식을 갖출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 Ⅱ : 운동론, 조직론.

    앞 절에서 다소 학술적인 논쟁들로 비칠 수도 있는 내용을 소개한 것은 우리들의 통념을 수정하기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도 쟁점이지만 붕괴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회주의로 필연적으로 나가야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현재의 위기가 파국으로 간다면 그것은 문명의 붕괴가 될 수도 있다고 홉스봄은 경고한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윤소영 선생이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에서 쓰고 있듯이, 노동자운동과 급진적 이데올로기와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꼭 노동자운동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사회운동 일반이 대안적인 이데올로기와 해후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 나갈 때에만 야만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대만 제기된 쟁점이 아니다.

    홉스봄은 마르크스의 종별성을 경제와 정치를 따로 떼어서 설명하지 않는 데서 찾는다.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위대한 점은 경제적 분석과 정치적 갈등, 사회 문화적 현상을 결합시켜 분석하는 것이다.(23쪽) 심지어 과학의 발전도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하여 분석한다. 이것이 과학사에 남긴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305쪽) 분과학문을 초월하여 사회적 심급들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큰 매력이다. 마르크스는 정치적 현상을 경제적 갈등으로 환원시켜 분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치를 자율적 심급으로 다루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운동론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어떤 상태에 도달하든 ‘상수’로 존재하는 것은 노동자운동이라는 것이다.(412쪽) 사회주의가 지리멸렬하고 마르크스주의가 부재해도 노동자운동은 존재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자본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에 대한 분석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력을 파는 집단을 구조적으로 만들어 내고 이들의 삶의 조건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노동의 불안정성과 불평등이 지속되는 한 노동자운동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자본주의 내에서 구조변동은 노동자들의 상태의 변화를 가져온다. 육체노동자가 다수이던 시대에서 서비스 노동자가 다수인 시대로 전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의 변화가 노동운동, 더 정확히 말해 노동조합운동을 소멸시키지 않는다.

    레닌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자생적 노동자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경우가 있지만 노동자운동/노동조합운동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 토대이다. 신좌파 일부가 노동자운동을 체제와 타협했다고 비판하면서 이의 존재를 상대화시키려고 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홉스봄은 다른 사회주의자들이나 생디칼리스트들,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마르크스를 구별하는 것은, 그가 노동자들의 독립된 정치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라고 지적한다. 노동자운동은 경제적인 요구와 정치적인 요구를 결합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 노동운동의 독립된 정치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70쪽) 마르크스는 노동자운동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연대의식, 계급의식이 만들어내며, 이런 계급의식을 토대로 노동자들의 정치적 조직화가 노동자운동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효과적이라고 보았다.(410쪽) “거대한 다수의 거대한 이해를 대변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독립된 정치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24쪽) 현대적으로 이해하자면 사회운동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조직할 정치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당은, “마르크스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의 독자적 정당”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이 결합된 계급적 대중정당이라면 그것이 꼭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해야만 한다고 보지 않았다. 계급정당이 존재한다면 그 정당의 성격이 마르크스주의적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자는 “노동자운동과 대립되는 독자적인 정당”을 구성하지 않는다고 한 이유이다.

    더불어 언급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가 대중정당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이것은 제2인터네션널의 정당이나 볼세비키 정당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단일한 강령과 사상 통일에 기초한 일원적 조직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다양한 운동들, 대중조직들, 이념들이 공존하는 노동자운동의 ‘정치조직’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전선과 같은 조직으로서 공산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가운데 가장 단호한 분파로 활동하면 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의도했던 것은 운동의 독립성이 유지되는 것이라면 당의 성격에 구애받지 말라는 것이다. 혁명적인 정당만 마르크스주의적이기 때문에 승인하고 그렇지 않은 정당은 기회주의자들이라서 같이 못한다는 사고방식은 ‘적어도’ 마르크스의 생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72쪽) 마르크스주의적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문제가 아니라 운동의 독립성을 유지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쟁점이라는 말이다.

    소위 자신의 변혁적 순수성을 위해 기회주의자들과는 일체 타협하지 않으려는 집단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계속>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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