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낙살반군, 체제전복 꾀하다 (1)
[현대 인도 인민의 역사]낙살바리 무장봉기에 대하여
    2012년 12월 24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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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좌파 진영에서는 인도의 공산당에 대해 주로 ‘무늬만 공산당’이라고 평가를 하는 경우가 많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그런 경향은 한국의 좌파 진영이 주로 이념 지향의 태도를 갖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선거를 통해 집권당이 되는 과정에서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고 타협하는 등의 정치 행위를 하는 것은 권력욕에 따른 일신의 영달이다. 진보 진영에서 지유주의 진영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변절이고 그래서 평가절하 하기 일쑤다. 새누리당이 집권을 하든 민주당이 집권을 하든 둘 다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으며 오로지 0.2% 노동자 후보를 지지하는 것만이 미래에 대해 종자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목매달고 죽는 노동자나 농약 먹고 죽는 농민의 고통에 대한 당장의 치유에 대해서는 가슴 아파할 뿐이다.

또 그들에게 공산주의란 러시아와 중국에서 유혈 혁명을 일으킨 주체로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그람시가 2차 세계대전 상황 아래에서였고, 무솔리니라는 군국주의 상황 아래에서였다는 사실은 별로 그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도에 그러한 정치 실천을 중시하는 ‘무늬만’ 공산주의인 공산당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장 투쟁을 통해 유혈 혁명으로 체제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공산당 세력도 엄연히 있다. 그 무장 폭력을 지향하는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은 한국의 진보 진영이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자, 이제 무장 혁명을 지향하는 소위 낙살 반군이라 불리는 인도와 네팔의 마오주의자들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낙살 반군은 의회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정치 체제라면서 철저히 부정하는 세력이다. 그래서 그들은 선거 기간 중에 요인 암살을 비롯한 적극적 테러를 감행한다. 이 무장 세력을 낙살 반군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기원을 1967년 서벵갈의 낙살바리(Naxalbari)에서 일어난 무장 봉기에 두기 때문이다.

사건은 이 지역의 뿌리 깊은 가난과 그 위에서 자행된 지주들의 착취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연방 정부가 토지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토지 소유는 여전히 불평등하고 지주의 착취가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농민이 더 가난해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1967년 3월 3일 이 지역의 농민 150 여 명이 농기구와 무기를 들고 지주의 곡식 창고를 부수고 수백 가마의 식량을 탈취하였고, 그 사태는 3개월 가량 지속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농민 저항 봉기와는 다른 성격을 띠었으니 인도공산당(M) 내에서 줄기차게 무장 투쟁 노선을 주창하던 세력이 조직적으로 벌인 것이라는 점이다.

낙살바리는 서벵갈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인도, 동파키스탄 (현재의 방글라데시) 그리고 네팔의 세 나라 국경이 만나는 곳이면서 산악 지대와 가까운 곳이라서 반군이 세력을 유지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농촌 곳곳에 해방구를 건설하여 새로운 인민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다. 봉기는 처음 주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처한 덕에 3개월 동안 지속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서벵갈 주정부는 7월 5일 경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그들을 진압하였고, 체포된 지도부는 투옥되었고, 공산당(M)에서도 출당되었다. 하지만 봉기 지도부는 진정한 공산 혁명을 목표로 삼아 인도공산당(Marxist-Leninist, 이하 ML)을 창당하였다.

그런데 인도공산당(ML)은 창당하자마자 바로 노선 갈등과 파벌 싸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그 후 인도공산당(ML)이 무장 혁명을 추동하려 하지 않고, 정당 활동을 통해 세력 확장을 꾀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부 무장 혁명 추동 세력이 탈당하여 유혈 혁명을 위한 무장 봉기에 나서면서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그런데 서벵갈에서 세력이 크게 약화된 것과는 달리 낙살과 마오쩌둥을 앞세운 농민의 무장 봉기는 전국의 가난한 농촌과 산악 부족 지역에서 크게 일어나 오늘날까지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들은 서벵갈을 비롯하여 오릿사, 안드라 쁘라데시, 비하르, 찻띠스가르, 자르칸드, 따밀 나두 등 벵갈만 연안의 동부 인도와 동남부 인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인도 내에서는 가장 빈곤하고 낙후된 지역인데다 이 지역은 산악으로 연결되어 피신하면서 게릴라 무장 혁명 운동을 벌이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운동이 농촌의 빈곤층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소외당한 산간 부족들에게도 상당한 지지를 받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무장 혁명 세력이 세력을 크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세력은 현재 네팔까지 연결 돼 그곳에서는 무장 봉기 세력이 2008년 왕정을 무너뜨리고 집권 정당이 되기도 하였다.

낙살 반군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인도의 동부 지역은 “붉은 회랑”이라고 불리는데, 인도 연방 정부에게는 국가 안보에 대한 제1의 위협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낙살 반군의 세력이 이렇게까지 성장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독립 후 인도 정부가 지주제 철폐와 토지 개혁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충 얼버무린 토지 개혁의 결과는 대지주의 힘을 크게 약화시키는 데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 혜택이 빈농에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으니 (이 부분에서는 추후 논의하고자 함) 인도의 농촌은 식민 시기 혹은 그 이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불평등 수탈 구조가 여전히 유지되었거나 더 악화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새롭게 형성된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에서는 과거 전통 사회에서 그 나마 유지되던 사회 안전망 (경제적으로는 수탈당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전통적으로 보호를 받는 체계)조차도 사라져버려 전적으로 경제적 이해 관계로 내몰리게 되면서 가난한 소작농들은 아무 데서도 보호를 받을 수가 없게 되었고, 모든 사회 경제 정치적 이득은 중간층 농민이 독점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난한 소작과 임금 노동을 하는 빈농은 공산당의 깃발 아래 중농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저항은 항상 더 큰 앙갚음으로 돌아오는 법, 지주들은 하루가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강간, 방화, 폭력 심지어는 살인 등의 범행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였다. 지주들은 하나같이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정치권과 결탁하여 경찰력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법원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들은 선거철만 되면 사병을 동원하여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를 위해 선거함을 탈취하거나, 반대 편에 선 농민들은 아예 선거를 할 수 없도록 폭력을 사용하여 투표함에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아예 투표 공고를 하지 않아 버리거나 하는 무자비한 방법으로 정치인과 부패의 고리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당의 대표 격인 공산당(M)은 의회 민주주의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기만 할 뿐, 근본적인 구조 개혁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능한 상태에 있었다. 민주주의란 언론에서나 있고, 이론에서나 있을 뿐, 현지 농촌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가난한 농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자리에서 죽든지, 아니면 새로운 공산당 깃발을 세워 무장 투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현재로서는 둘 다 죽음으로 가는 길일뿐이다.

1967년 봉기 세력이 세운 인도공산당(ML)은 서벵갈에서 점차 남동부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농촌과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뻗쳤다. 그들은 의회 민주주의를 철저히 부정하였으니 선거 시에 집중적으로 테러를 감행하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그 가운데 특히 종교공동체주의를 조장하는 힌두 근본주의 세력과 그에 연합 전선의 관계에 있는 작은 정당 정치인을 주요 타깃으로 삼아 살해하였다. 물론 회의당과 인도공산당(M) 또한 그 타깃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남부의 따밀나두 주에서는 주 수상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고, 선거 운동을 하는 조직원들을 납치하거나 살해하여 선거를 마비시키기도 했다.

2006년 인도 중앙정보국은 낙살 무장 반군 전체 조직원의 수는 7만 명, 그 가운데 무장 게릴라 활동을 하는 조직원의 수는 2만 명에 달한다고 보고 있다.

결국 2007년에는 연방 정부 수상 만모한 싱(Manmohan Singh)이 낙살 반군의 세력이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제1의 국내 요인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렇게 큰 국가 존재에 대한 위협이라 할지라도 인도 정부가 그들을 완전 소탕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는다. 소탕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민주주의 정치를 운용하는 기본 정신이 한국과는 다르다. 일단 시간을 두고 본다. 그것이 인도 사람들의 정치를 임하는 태도다.

1967년 봉기가 일어난 지 40여년이 지났다. 낙살 무장 반군 세력이 중앙 정부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 됨에는 두 말 할 여지가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성공을 향해 가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곳에 해방구를 두고 게릴라 투쟁을 하고 있지만, 그들 내부에서나 그들 외부에서나 모두 그들의 운동이 실패한 것이라고 하는 데는 이견이 없다.

산얄의 생전 모습. 산얄은 2010년 3월 자살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처음 낙살바리 봉기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 2인 가운데 한 사람인 (다른 한 사람은 짜루 마줌다르Charu Majumdar인데, 봉기 후 1972년 은신처에서 체포되었고, 투옥 열흘 만에 감옥에서 죽었다.) 산얄(Kanu Sanyal)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게 의미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산얄은 2007년 5월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난한 농민들과 차밭 노동자를 묶을 수 있는 제대로 된 당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초기에 마줌다르 동지가 주창한 ‘계급의 적, 반동 분자 처단’ 노선은 잘못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농민 조직은 필요치 않고 오직 필요한 것은 소규모의 타격대가 적을 섬멸하는 것이라고 했으나 전투를 벌이기 이전에 농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우리 전선에 끌어당기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산얄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한국의 진보 진영이 깊게 생각해 볼 대목이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 진영은 늙고 가난하고 소외당한 자들에 대하 무엇을 했는가? 가르치려 했는가, 위로하려 했는가? 적은 증오와 타도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포섭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적이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 농민 대중 안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전히 우리 앞에 서 있는 빙벽 같이 무거운 질문이다.

필자소개
이광수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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