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김근태의 삶 소설로 그려내
    [책소개]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방현석/ 이야기공작소)
        2012년 12월 22일 10: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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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존재의 형식’으로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한 방현석이 9년 만에 발표하는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는 2011년 12월 13일 작고한 故 김근태씨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최근 고인의 수기를 바탕으로 한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영동1985’가 개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삶에 다시 한 번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 바 있다.

    영화 ‘남영동 1985’가 고문실의 풍경과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영혼을 지켜내려는 한 인간의 사투에 초첨을 맞추었다면 방현석의 소설은 실제 우리 현대사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김근태가 실명으로 등장해 흥미를 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김근태의 개구쟁이 유년 시절과 학생운동이나 정치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학창 시절의 모습, 대학생이 된 후 역사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는 계기 등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으며, 소설 중간 중간 삽입된 인터뷰 형식의 증언들이 사실감을 준다.

    논픽션의 반대편에 소설이라는 픽션이 서 있는 게 아니다. 논픽션 너머에 있는 게 픽션이라고 생각한다. 픽션은 논픽션의 불완전한 감동을, 완전한 감동으로 만든다. 이 소설에서도 논픽션이 가지고 있는 것을, 사실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좀 더 잘 보여주기 위해 픽션이 동원됐을 뿐이다. 나는 이 소설이 백 퍼센트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방현석 (저자, 기자간담회에서)

    2012년, 한국 현대사의 빛나는 이름들이 다시 호명된다.

    1988년 <실천문학> 봄호에 생동감 있는 노동현장을 그려낸 「내딛는 첫발은」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방현석은 『내일을 여는 집』 『십년간』 『당신의 왼편』 『아름다운 저항』 등 우리 현대사에서 노동자의 숨결과 헌신, 민주화 운동 세대의 빛나는 순간들을 포착해 왔다. 그런 그의 시선이 고 김근태를 주목한다.

    고인이 된 김근태가 주인공이자 실명으로 등장하는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에는 가까운 현대사에 실존하는 인물이자 소설 속의 김근태라는, 한국문학사에 이전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느낌이 있다. 체포되기 전에도 늘 그랬다. 내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도 있고, 하지 못하게 한 이야기도 있다. 여전히 하지 말아 주기를 바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제는 이것도 내 몫이 아니게 된 것 같다.”

    대학병원의 한 병실에 누운 화자로부터 누군가가 이야기를 옮겨 적는다. 이어 화자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시인한다.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넘나들던 ‘남영동’에서조차 아득하게 떠올리곤 했던 유년에 대한 회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화자는 다름 아닌 김근태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교장 선생님 댁 막내인 꼬마 근태는 교사의 닭장에서 달걀을 훔쳐내 고구마과자를 사 먹자는 꾀를 내어 누나와 함께 일을 저지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에게 들켜 벌을 서게 된다.

    누나가 자신을 대신해 잘못을 뒤집어쓰고, 아버지는 달걀과 고구마과자를 바꾸어준 학교 앞 털보 할아버지에게 찾아가 사과를 한다. 어린 근태는 자신의 잘못으로 누나가 벌을 서서 미안했지만, 털보 할아버지에게 사과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근태의 유년은 아버지를 따라 관사에서 관사로 옮겨 다니는 연속이다. 친구를 사귈 만하면 이어지는 이사와 전학 때문에 근태는 공부보다는 친구를 사귀는 일에 더 열심이다. 그럼에도 성적에는 늘 자신이 있는 근태였지만 원하는 중학교 시험에 떨어져 의기소침하게 되고, 이때부터 근태는 공부에 열심히 매달리게 된다. 두 번 실패하고 싶지 않았던 근태는 경기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공부한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이후 갑자기 바뀐 정년제도 때문에 퇴직하게 된 아버지가 퇴직금을 사기 당하고, 집안 살림이 거덜 난다. 그런 와중에 근태는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집안 살림에 부담을 덜기 위해 근태는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입주 과외 교사가 된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해의 4월, 경기고등학교 학내 서클들은 박정희 정부가 추진하는 한일협정 반대 토론이 벌어졌다.

    그러나 근태는 빌리기보다는 받아야 할 보상금을 먼저 받아서 사용하자는 생각이 왜 나쁜지 이해할 수 없다. 고등학생 근태의 모습은 학생운동이나 정치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사회 부조리를 해결하고 경제성장을 이루는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한다.

    경제학을 공부해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가난 때문에 무시당하고 모욕당하지 않는 세상을 설계하는 일에 기여하겠다는 막연한 꿈도 키운다. 빗물에 집이 무너져 내리고, 대학 등록금을 낼 길이 없어 방황하기도 하지만 근태는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바꾸게 되는 경제복지회와의 만남. 근태가 가졌던 역사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뒤집히고 자신의 운명 또한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 김근태의 삶은 바로 우리 현대사의 민주주의가 걸어간 길, 고독했지만 당당했고, 슬프지만 찬란했던 역사 그 자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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