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의 '기억상실'에 대하여
        2012년 12월 18일 03: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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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대 서영표 교수가 <레디앙>에 투고 글을 보내왔다. 대선과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또 대선 이후의 전망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아니, 대선 이전에 진보세력과 좌파가 가져야 했던 그러나 잃어버리고 있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서 교수는 구체적인 무엇을 하자는 제안보다는 무엇을 잊어서는 안될 것인가 라는 점을 제기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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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를 가나 선거 때만 되면 사람들이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것 같다. 오바마에 그렇게도 열광하던 사람들이 오바마에 실망했지만 선거 때가 되니 그래도 오바마라고 외치며, 그리고 그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 중대한 정치적 행위인 것처럼 과장한다. 미트 롬니가 너무 싫어서.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좌파라고 자인하는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천명할 만한 입장은 아니다!

    3년 전 일본의 민주당 하토야마 정권이 출범했을 때는 또 어땠나? 한국에서도 새로운 정치 모델이라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제 자민당 극우파들에게 정권이 ‘되돌아’ 갔다. 왜? 민주당이라고 다르지 않았으며, 게다가 무능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국민정서의 우경화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인들과 학자들은 참 편한 사람들이다. 국민 탓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니까? 질문해야 할 것은 불과 3년 전에는 민주당의 ‘진보적(?)’ 노선에 표를 던졌던 일본 유권자들이 왜 마음을 바꾸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오바마와 하토야마, 그들의 민주당은 과연 달랐는가

    남의 얘기로부터 시작했지만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 일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 있다. 무엇일까? 비판적지지? 단일화? 그렇다 그런 말을 지겹도록 들어 왔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지겨운 말은 ‘이번 선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이번만은, 이번만은! 그리고 2012년 12월, 이번 대통령 선거가 가장 중요하단다. 왜? 이명박이 싫어서, 박근혜가 싫어서라네.

    그러면 당신들의 주장은? 딱히 큰 차이를 찾기 어렵다. ‘민주주의’라는 공허한 주장이 차이일까? 재벌을 개혁할 의지도, 빈부격차를 해소할 계획도 없다. 인권을 주장하지만 표를 얻기 위해서 성소수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비판적인 지지를 호소하면서 정작 자기네들끼리는 싸운다. 권력을 갖기 전에는 권력 앞에 분열되었고, 요행히 권력을 갖고 나니 거기에서 생겨나는 이권을 가지고 싸웠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권력투쟁 하느라 날 샐거라는 새누리당의 비판이 ‘흑색선전’일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민주당의 정치인들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고 있을까? 아니다. 그들은 10년 동안 누렸던 달콤한 권력의 맛을 잊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인가?

    누군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고함칠지도 모르겠다. 이명박 5년을 당하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고?

    솔직히 말해보자.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주역이 누구였는지. 그건 김대중-노무현 정부였다. 민주주의는 돈 가진 자들의 힘의 논리일 뿐이라는 것, 그래서 차라리 민주주의보다는 성장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것이 누구인가? 온 사회를 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 누구인가? 그리고 보면 한나라당(새누리당) 사람들이 제일 똑똑한 것 같다. 자기네들이 하면 욕먹었을 ‘짓거리’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대신해주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좌파’로 낙인찍고 그것을 ‘무능’으로 상징화하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민주주의나 도덕성보다는 능력이 우선한다는 극단적인 시장논리를 공식이데올로기로 전파하는 ‘문화전쟁’의 최첨단에 섰던 사람들을 좌파로 낙인찍으면서 그것의 과실은 챙긴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명박 정권도 실패한 정권은 아닌 것 같다. 정권을 떠받치고 있었던 집단들은 이미 챙길 만큼 챙겼으니 말이다. 이명박과 그 측근 몇 명 감옥가고 지탄받는 것이 뭐 대수이겠는가? 대세는 변함이 없다.

    이쯤해서 코미디가 시작된다. 이명박 정권 출현에 일등공신이었지만 자신들의 과거를 망각한 채 자신들이 정말 ‘진보’라도 되는 것처럼 ‘민주주의’ 투쟁에 나서는 사람들이 이 희극의 주인공이다. 새누리당이 ‘좌파’라 불러주니 정말 좌파가 ‘되어 버린’ 사람들, 하지만 도저히 좌파가 될 수 없는 사람들. 이쯤 되면 자기 정체성에서 심각한 분열을 겪어야하겠지만 이 사람들의 목적은 오직 ‘권력’이기에, 그리고 거기에 딸려 나오는 금전적 보상이기에,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달콤하기에 그런 자기혼란의 ‘성찰적’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다.

    하지만 이 희극의 진짜 주인공은 민주당 사람들이 아니다. 정체성의 혼란 없이 스스로를 좌파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진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 사람들은 논외로 하자. 최소한 그들에게는 일관성이 있으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이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은 한국사회의 근본적 변화가 아니었다. 비판적 지지를 통한 민주정부의 수립. 이제 그들은 자기 정당을 가지고 있고, 한국 정치에서 일정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아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가장 한심한 사람들, 스스로 3류 코미디의 주인공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동안 정말로 한국사회의 좌파라고 자임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문재인을 (비판적이 아니라) 적극 지지한다고 선언한다.

    누구라고 지칭하지는 않겠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문재인과 악수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좌파’ 정치인들, 그들은 왜 스스로를 좌파라고 자임하는 걸까? 정권교체가 그렇게 절체절명의 과제이고 따라서 좌파도 그것에 일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일본과 미국,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한 값비싼 학습의 효과는 어디로 간 것일까? 거기까지는 똑같은 과정을 공부하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도 있을 수 있으니 살짝 눈감아 준다고 치자.

    하지만 도대체 이런 ‘몸 대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설혹 정권이 교체된다고 해도 ‘좌파’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이다. 답은 간단하다. 전혀 얻을 것이 없다! 그렇다면 문재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소위 좌파 정객들의 정체는 둘 중에 하나다. 좌파이기를 포기한 자들이거나 아둔한 바보이거나.

    좌파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나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좌파는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계급적 성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문재인마저 1대 99의 사회라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 체제는 곳곳에서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회적 문제들을 발생시키고 있다.

    그런데 좌파는 더 이상 계급정치를 주장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물론 구호로 외치기는 한다. ‘신자유주의 반대!’ 진보정당의 강령에는 자본주의와 시장에 대한 비판이 담겨져 있다. 그렇게 따진다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헌법도 훌륭하다! 1대 99 사회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좌파의 구호는 너무 멀리 있다.

    시민들에게 대한민국 헌법이 멀리 있듯이. 구호는 외치지만 소위 좌파라는 사람들의 정치는 99가 있는 곳이 아니라 1이 있는 곳, 그래서 지배적 게임룰이 관철되는 곳에 있었을 뿐이다. 아주 손쉬운 선택지를 선호했다. 스타정치인을 키우고 그들을 통해 ‘말싸움’하는 것. 사람들은 처음부터 좌파의 주장보다는 몇몇 정치인의 이미지를 보고 진보정당에 표를 던졌다.

    대중을 탓하지 말자. 진보정당 스스로가 그것밖에 보여주지 못했으니까. 그런 상태에서 대중이 진보정당에 대해 실망하고 마음이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잠시 진보정당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기대감은 산산이 조각나서 개별화되고 고립된 무한경쟁과 성공을 향해 돌진하는 신자유주의적 정글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정글에서의 생존투쟁이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는 좌절과 고통은 정치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통로를 잃는다.

    그 통로 역할을 해야 할 좌파는 스스로 그 임무를 포기했으니까. 좌파들이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은 ‘나에게 표를 주시오’였을 뿐이다. 몸은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이미 체화했지만 바로 그 몸이 신자유주의적인 경쟁을 견뎌내지 못하는 현실, 하지만 견디기 힘들 현실로부터 생겨나는 고통과 좌절을 표현할 정치적 통로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의지하고 소비할 수 있는 상징을 찾아 헤맨다.

    여기 딱 들어맞는 기호(sign)가 있었다. 안철수! 다른 한편에서 좌파지식인을 자임하는 일군의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포스트모던 주체성’이라고 멋들어지게 ‘찬양’한다. 능력은 있지만 이명박처럼 부패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기존 정치권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 하지만 일단 ‘상징’이 부착되는 대상이 생겨나면 그 자체가 가지는 성질과는 무관한 이미지들이 거기에 투사되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혀 새롭지 않은 주류집단의 대표 중의 한 사람에게 ‘새로움’의 이미지를 덧붙이고 거기에 만족하게 된다. 선거연합과 의회 안으로 스스로를 가둔 진보정당, 파업현장에 결합하는 것을 실천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좌파, 그러나 역설적으로 계급성을 상실하고 반자본주의적 실천의 현장으로부터는 멀어지고 있는 좌파는 지난 20년간의 진보정당에 쏟아 부었던 무수히 많은 동지들의 열정과 에너지를 공기 중으로 날려 버리고 고작 ‘안철수’라는 ‘합리적’ 자본주의의 상징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쯤 되면 좌파는 생존 자체를 고민해야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진행형인 동북아에서의 군비경쟁과 조만간 다가올 통일 정국에서 이처럼 무능하고 내용 없는 좌파는 그 흔적조차 사라질 수 있다.

    좌파의 교두보는 어디에, 우리의 진지는 어디에 있나

    이번 선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권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통일+포스트신자유주의적 재편+동북아시아의 권력관계 재편의 소용돌이 속에 자본주의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최소한의 생존권을 얻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인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참호가 필요하다. 엄청난 물량적, 이데올로기적 ‘공습’과 ‘폭격’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진지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좌파는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미약한 진지마저 스스로 소진하고 말았다.

    그리고 대다수 좌파는 진지를 구축하기보다는 전투의 완충지대에 놓인 이미 지어진 건물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기 위해 애를 쓴다. 진지에는 사람이 있고, 실천이 있고, 조직이 있지만 거기에는 자기 한 몸 누일만한 공간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답이란다.

    생존 자체가 절체절명의 과제이고, 생존하기 위해서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면 그 다음 질문은 어디에다 진지를 만들 것인가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축된 진지들에서의 투쟁이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 보여줄 깃발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인간의 생존보다는 이윤을, 사회적 유용성보다는 성장을 추구하는 지속불가능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사람들의 삶과 멀리 떨어진 공허한 구호이기를 멈추어야 한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사교육비 투자와 복권열풍으로 왜곡되어 드러나고 있는 사람들의 열망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는 삶을 원하지만 세상은 ‘모 아니면 도인 것’을 어찌하랴! 낙오자가 되거나 무한경쟁에 뛰어 들거나!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부당함과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일확천금을 바라거나 자식에게 투자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부당함과 불평등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부당함과 불평등의 근저에 놓인 자본주의적 논리를 비판하고 너무나도 익숙해진 부와 권력의 세습에 대해서 문제제기 해야 한다. 그 자체로 불평등과 착취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극복 없이는 인간답게 사는 것은 불가능함을 주장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느끼고 있다. 경험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또 다시 자본주의적 경쟁의 정글 속에서의 욕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게 하는 장벽에 가로막히고 있을 뿐이다. 앞에 놓인 장벽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인정하는 대신 거기에 구멍을 뚫고 허물 수 있다는 희망과 상상력을 자극해야 한다.

    세상물정 모르는 이야기라고? 여전히 공허하고 추상적인 주장이라고? 문재인 지지하면서 ‘좌파’를 자임하는 사람들보다 더 세상물정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기에 가깝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덜 공허하고 덜 추상적이다. 누구의 눈에는 자본주의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이 곧 현실의 전부일지 모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자본주의의 희생자들이 겪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이 현실이다.

    실천이 있어야 한다. 정책도 있어야 한다. 전략과 기획도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좌파는 구체적 현실로 돌아가 사람들의 삶 속에서 표출되는 불만과 좌절을 느끼고 공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실천으로 표출될 수 있는 통로를 끊임없이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생존을 위한 ‘좌파’의 진지이다. 진지는 전면적인 투쟁으로부터 후퇴해서 투항할 기회를 엿보는 장소가 아니다. 진지는 적을 포위 섬멸하기 위한 투쟁의 근거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 여기가 출발점이다. 이 새로운 전제 위해서 이야기하자!

     

    필자소개
    제주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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