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살, 22살 어머니 아버지의 혼례
        2012년 12월 18일 11: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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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 12월 2일 어머니는 어머니 고향인 경북 군위군 소보면 사리 2동 새기터에서 혼례를 치렀다. 어머니 나이 열아홉, 아버지 나이 스물 둘이다.

    어느 날 외증조할아버지께서 어머니 보고 물을 떠오라고 했다. 어머니가 물을 떠 와서 방에 들어가려는데 외증조할아버지가 외할아버지한테 말씀하셨다. “뒷집에 군대 갔다가 휴가 나온 아이가 있는데 괜찮더라. 아범이 가서 한 번 보고 와라. 금선이를 그리 시집 보냈으면 하는데?” 며칠 뒤 외할아버지는 그 집에 갔다 오더니 어머니를 불렀다. “금선아, 내가 보니 뒷집 총각이 눈이 짝 찢어져서 여자 하나 굶기지는 않겠더라. 너 그 집으로 시집을 가라.”

    어머니는 어른들 결정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따랐다. 외증조할아버지께서는 낮에 늘 뒷집에 놀러 가더니 아버지가 마음이 들었나 보다. 아버지 누님, 내 새기터고모 소개로 혼례를 치렀다.

    혼례 얘기가 오고간 뒤 어느 날 어머니 시누이 남편이 돼지 뒷다리를 하나 들고 왔다. 그것을 보고 외할아버지는 어머니 보고 “금선아, 이게 니 약혼식이다. 앞으로 어디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마라.” “아버지, 약혼식이 뭐 이래요. 그리고 밖에 나가지 말라 카몬, 우물물을 누가 떠 와요?” “그래 물만 길러 오고 아무 데도 나가지 말그라.”

    이렇게 어머니와 아버지는 혼례를 치렀다. 어머니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버지만 어머니가 물 긷는 모습을 담 너머로 봤다고 했다. 추운 겨울에 초례청을 차리고 혼례 잔치를 했다. 수탉 두 마리 놓고 맞절을 했다.

    1950년대 농촌의 결혼식 모습

    어머니는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 헝겊으로 얼굴을 가렸다. 앞을 볼 수 없어 누군가가 어머니를 부축하고 혼례식을 했다. 첫날밤을 자려고 방에 들어갔다. 동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락 껍데기를 마구 뿌렸다. 왕겨가 까칠까칠하니 밤에 자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고 그렇게 했단다. 어머니는 그래도 남편을 생각해서 시집살이 때 가지고 갈 이불로 남편을 덮어 주었다. 다음 날 외할머니한테 혼났다. 혼수 이불을 쓰면 어떡하냐고. 사람들은 침으로 창호지 문구멍을 뚫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첫날밤을 자고 다음 날 아침에 마당에 나왔는데 친구가 왔다. “야, 저기 니 남편 있네!” 어머니는 친구가 뜨락에 두루막을 입고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내 남편이라고 하자, “아니야! 저 사람 내 남편 아니야!” “얘는 어제 니 저 사람이랑 하룻밤 잤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 사람이 남편이었다.

    아버지는 군대 생활을 하다 와서 얼굴에 기미가 잔뜩 끼여 있었다. 어머니는 밝은 곳에서 본 아버지 모습에 실망했다. 하지만 이젠 어디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냥 이 사람이 내 남편이구나 내 운명이구나 하며 살았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키가 조그만해서 어디 일이나 잘하려나 싶지만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그냥 혼례를 치렀다. 그날 뒤로 어머니 아버지는 지금껏 60년 가까이 살았지만 크게 다투지 않고 살아 오셨다. 연애를 오래도록 하고 살아도 금세 헤어지는 요즘 사람들과는 달랐다.

    혼례를 치르고 나서 일주일 뒤에 아버지는 다시 군대에 갔다. 어머니는 1년 뒤인 1956년 10월 19일에 신행을 나섰다. 신행이란 친정에서 살다 시댁으로 시집살이를 가는 일이다. 어머니, 외할아버지, 작은 외삼촌이 함께 갔다. 외삼촌은 어머니 나이 열세 살 때 해산바라지를 했던 사람이다.

    시댁은 경북 군위군 소보면 위성1동 화실이다. 새기터에서 걸어서 1시간 반쯤 걸린다. 소를 가지고 갔다. 소엔 이불이랑 어머니 옷가지를 실었다. 시댁에 다다랐는데 혼례하기 좋은 날이 아니라고 대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한쪽 흙담을 허물고 마른 짚을 태운 자리를 밟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열다섯 명쯤 되는 시댁 식구들 시집살이를 했다.

    새벽 동트기 전에 일어나 시아버지가 쇠죽을 끊이는 아궁이에서 불씨를 댕겨 와서 아침상을 차렸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에겐 꼭 쌀밥을 해 드렸다. 어머니는 윗동서와 부엌에서 보리밥을 먹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부엌에서 고등어 대가리를 먹고 있었다. 고등어 몸통은 시어른들 드리고. 이것을 시어머니가 보시더니, “야야, 정지꾼은 부엌에서 그런 것 먹는 것 아니다” 하시면서 혼냈다.

    어머니는 그 말에 눈물이 나왔다. 고등어 머리를 개에게 주고 서럽게 울었다. 시골살림이라 고기 구경은 못하고 고등어 머리를 시어른 밥상에 올리기 뭐해서 부엌에서 몰래 먹었다고 구박을 받다니. 군대 간 남편 생각만 났다.

    어느 날 남편이 오나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어머니 손아래 시누이가 하는 말이, “아니 올케는 얼굴도 예쁘고 다 좋은데 눈매가 가늘어서 무섭네. 눈 좀 아래로 뜨고 있어요.” 어머니는 속으로 남편 오나 안 오나 밖에 한 번 보고 있는데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서운했다.

    화실로 시집살이를 오고 나서 열흘 뒤에 남편이 군복무를 마치고 왔다. 이제야 든든했다. 화실에서 2년 넘게 살았다. 근데 어머니 몸에 아기가 들어서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어머니가 듣지 않는 곳에서 넋두리를 했다. “어느 집 아이는 얼굴은 멀쩡하게 생겼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아기를 못 갖는다.” 그래도 어머니는 ‘나는 아기를 가질 수 있어’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도 아기를 못 갖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는 살림을 알뜰하게 잘했다. 쌀이 한 말 있으면 제사를 지낼 때까지 갖고 있어야 되는데 어머니가 부엌살림을 하면서는 늘 쌀이 남았다. 어머니가 살던 곳은 비가 많이 안 와서 쌀이 귀했다. 어느 날은 비가 많이 와서 쌀밥을 많이 먹을 때도 있었지만 그런 해는 드물었다.

    어머니가 아기를 못 가지자 시아버지는 집 뒤에 난 익모초를 잔뜩 잘라 와서 손바닥만 하게 잘라서 가마니에 담았다. “야! 아가야 이것 친정에 가져가서 먹어라” 하셨다. 어머니는 그것을 푹 고아서 초청으로 만들어 먹었다.

    또 시어머니는 벌을 길러서 벌꿀을 작은 항아리 가득 담아 주셨다. 어머니는 그것을 들고 친정에 왔다. 친정어머니는 그 꿀을 호박 속을 빼고 넣어서 한 번에 먹으라고 했다. 물을 못 먹게 문 밖에서 방문을 걸어 두었다. 어머니는 그 꿀을 한 숟갈 한 숟갈 다 먹자 꿀에 취해서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아무튼 아기를 가지려고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했다. 그래도 아기가 들어서지 않았다.

    이렇듯 어머니는 시어른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다. 시골살림이라 일이 많았지만 동서들과 시누이들이 일을 도와주어서 별 어려움이 없이 시집살이를 했다.

    그러던 어느 늦여름 날 할머니가 밭에서 무 두 개를 뽑아 오셨다. 어머니 보고 물었다. “야야, 어느 짝 무가 더 커 보이노?” “와요 어무이! 그게 그거구마. 와 그러는데요” “아니, 좀 잘 봐라. 이 짝 게 더 커 보이지 않나? 큰 거를 니 대구 시숙에게 줘야 한다.” “아니 그냥 두 개 다 주이소 마.” “야는 그런 소리 마라. 니 시아버지 알면 난리 난다, 난리 나!”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화실에서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나중엔 아버지까지 해서 무를 세 개 가지고 와서 큰 것을 고르는 모습을 생각하니 어서 시골에서 떠나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때에 어머니 외숙모가 오셨다. 서울에서 기름 장사를 하고 계셨다. 참기름과 덴뿌라 기름을 섞어서 팔았다. 어머니에게 서울 가면 남편이 버스 회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밥 짓는 일을 하면 되고. 어머니는 서울에 가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안 된다고 펄쩍 뛰셨다. “이 어린 것을 어떡해 서울에 보내노. 절대 남의 집 부엌살이를 시킬 수 없다.” 어머니는 말했다. “어머니, 무슨 걱정이 많으세요. 남편 가는 데 어디라고 못 가요. 바늘 가는데 실 가는 거예요. 남편이 있는데 뭐가 겁나고 무서워요.”

    어머니는 할머니 손을 뿌리 치고 서울로 떠났다. 할머니는 눈 감으면 코 베 간다는 서울에 도저히 보낼 수 없다고 눈물바람으로 막았지만 어머니 아버지는 기어코 서울로 떠났다.

    2012년 12월 15일 혼자 집에서 책을 읽으며 지낸 날 저녁에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필자소개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 93년부터 일하고 있다. 두가지 꿈을 꾸며 산다.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날과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날을 맞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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