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벵갈, 공산당 34년간 통치(3)
    한국에 주는 함의...왜 34년 집권 공산당은 몰락했나
        2012년 12월 17일 04: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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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서벵갈의 공산당 정부는 침체된 주 경제를 살리기 위해 획기적인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따따자동차 공장을 서벵갈 주에 유치하여 250만원 짜리 자동차인 ‘나노(Nano)’를 생산하겠다는 것이었다.

    공산당 정부는 따따자동차에 공장 부지를 제공하기 위하여 싱구르(Singur)의 약 1천 에이커의 농지를 강제로 수용하였다. 싱구르는 꼴까따에서 40km 떨어져 있는 교통의 요지이면서 비옥한 농지로 이루어진 작은 농업 도시이다.

    공장 부지를 위한 토지 수용이 전개되면서 해당 농민들의 반대가 들끓기 시작했고, 야당인 뜨리나물 회의당이 마마따 바네르지 (Mamata Banerjee)를 선봉으로 가열차게 저항했다.

    따따 측이 부지를 이곳으로 정한 것은 이곳이 철도와 항만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 수송비를 포함한 여러 간접 비용을 줄일 수 있는데다가 공산당 정부가 유치를 위해 많은 특혜를 주면서 사업 성공을 위해 사활을 걸고 있기 때문이었다.

    CPI(M)의 반대파 보수정당 지도자인 마마따 바네르지

    그런데 문제는 일자리였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만5천명이 농업에 종사하는데, 따따자동차가 일자리를 보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은 1천명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농민들은 목숨을 걸고 땅을 지키기 위해 싸움에 나선 것이다. 싸움은 날이 갈수록 과격해졌고, 그 과정에서 공산당 정부의 진압이 갈수록 폭력적으로 거세졌다.

    그러면서 이와 똑같은 성격의 또 다른 사건이 2007년도에 터진다. 꼴까따 남서부 외곽의 난디그람(Nandigram)에 특별경제구역을 설치해 다국적 기업인 살림그룹(Salim Group)이 허브 화학 공장을 세우는 것을 허가한다는 것에 대해 마찬가지로 농민들과 뜨리나물 회의당이 사생결단으로 저항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서도 경찰은 폭력적으로 농민을 진압하였고 그 과정에서 농민이 14명이나 죽어 나갔다.

    토지 개혁을 통해 그 동안 가난한 농민의 벗으로 30년 가까이 집권해 온 공산당이 이제 신자유주의의 선봉에 서서 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모든 규제를 철폐하여 대기업의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앞장선 형국이다. 그들은 농민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반면에 그 동안 번갈아 가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앞장서서 끌어온 회의당과 인도국민당 연립 정부에 기회만 되면 참여해 온 전형적인 기회주의 보수 정당인 뜨리나물 회의당과 그 당수 마마따 바네르지가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여당의 정책에 온 몸을 던지면서 반대한다. 실로 웃지 못 할 블랙 코미디가 서벵갈에서 벌어진 것이다.

    2006년 공산당 정부가 따따자동차 유치 계획을 발표하자 뜨리나물 회의당 당수인 마마따 바네르지는 계획 철회를 외치며 25일간 단식 농성을 하였고, 그 지지 세력이 꼴까따의 따따자동차 전시장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이후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데모를 진압하려 하였고 그 사이 폭력 충돌이 격화되면서 여러 형태의 협상을 벌였으나 중재가 이루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2008년 따따자동차가 나노 공장의 철수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공장을 구자라뜨 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공산당 정부 정책에 대한 지지와 반대 성명이 잇달아 나왔는데, 보수 진영의 기업인이나 유명인들은 공산당 정책을 지지하고, 진보진영의 정당이나 시민 단체 혹은 지식인은 모두 뜨리나물 회의당을 지지했다는 사실이이다.

    공산당 계열인 사회주의통일센터(Socialist Unity Centre of India, SUCI)와 무장혁명을 주창하며 인도공산당(M)에서 분당해 나간 마오주의자들의 정당인 인도공산당(ML)이 보수 정당의 편에 서서 공산당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대부분의 시민운동가와 인권 단체들은 정책을 기준으로 보수정당의 편에 섰으나 당내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해 온 교수와 여러 지식인들은 공산당(M) 편에 서 진보진영의 분열 또한 심각하게 벌어졌다. 한국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좌파 경제학자인 아마르띠야 센은 공장 설립에는 찬성하나 토지 강제 수용에는 반대한다는 원칙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인도공산당(M)은 이 지역에서 30년이 넘게 권력을 유지해왔다. 조직의 힘은 그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막강하게 퍼져 있었다. 지식인은 두말 할 필요도 없고, 노조와 농민 단체를 비롯한 모든 기구들은 손아귀 안에 들어 있을 정도로 막강하였다. 여기에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공장 유치를 앞장서야 한다는 논리 또한 정당하게 이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정책의 정당성 또한 충분하였다.

    하지만 공산당은 한 가지를 간과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인 농민들의 의사를 철저히 무시하였다. 진보진영이 자주 저지르는 계몽주의에 함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결국 그 정책이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를 위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지지자들은 무조건 희생하고 자기들을 지지해야 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야당은 기회주의자이고, 그래서 그들은 절대로 농민과 노동자 편에 서지 않을 사람들이라고 말하면 그 진정성이 통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는 진정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들은 몇 년 전부터 그 무능함이 드러났고, 그 결과 지지 기반의 이반은 눈에 띄게 두드러져 있었다. 이제 기회주의 보수정당의 약삭빠른 정치 행각의 승리와 진보진영의 무능함으로 인한 패배만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2009년은 인도에서 좌파들에게 아주 잔혹한 한 해였다. 바로 직전인 2004년 총선에서 서벵갈과 께랄라에서 공산당이 일약 대성공을 거두면서 향후 제3정당으로 우뚝 서지 않을까 하는 성급한 예단까지 할 정도로 성과를 보았고 2년 뒤에는 주 의회 선거를 통해 모두 공산당 정권을 세울 정도로 찬란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3년 뒤 인도공산당(M)은 양 쪽에서 동시에 무너져 버렸다. 께랄라에서는 회의당과 뺏고 빼앗기는 접전이 50년 넘게 진행되고 있었으니 그런 주기 가운데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지만, 서벵갈에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할 수 없는 문제다.

    인도공산당(M)의 의석은 전국적으로는 59개의 의석에서 22개로 줄어들었는데 특히 서벵갈에서 26석이 9석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2011년의 주의회 선거에서는 전체 294석 가운데 62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당수인 붓다데브 밧따짜리야마저도 의석을 잃었다.

    직전 선거에서 차지한 233석에서 무려 171석을 잃은 대참패를 당했다. 무려 34년을 집권한 정당의 결과다. 그 결과를 보면 ‘물러난’ 것이라기보다는 ‘쫓겨난’ 것이라고 보는 게 더 분명한 느낌이 든다. 왜 공산당은 서벵갈에서 쫓겨날 정도로 대참패를 당했을까?

    가장 우선적인 원인은 아무래도 서벵갈 주의 사회 경제 상태의 악화일 것이다. 서벵갈 주는 같은 공산당이 집권한 께랄라와는 달리 공산당 집권 후 경제는 매우 침체되고 사회 복지 수준도 크게 떨어졌다.

    1970년대만 해도 서벵갈 주는 인도에서 공업이 가장 발달한 주의 하나였으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는 공업화가 가장 처진 주로 전락하였다. 서벵갈의 주내총생산(state domestic product)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제조업 분야 종사자 수를 보면 서벵갈은 공산당 집권 34년 만에 인도에서 최하위에 놓이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그렇다고 농업 부문이 성장한 것도 아니다. 성공적인 토지개혁에도 불구하고 농업 생산이 뒤처지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더군다나 초지 개혁과 함께 공산당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문인 의료와 교육 부문에서조차 성장은커녕 후진을 면치 못하게 되면서 주민들의 공산당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구 십만 명 당 병원 침상 수는 인도 평균이 17.5인데 비해 서벵갈은 고작 3.8밖에 되지 않았다. 학생 탈락률은 인도 평균이 60%인데 서벵갈은 76%나 되었다.

    서벵갈 꼴까따에서 열린 CPI(M)의 대중집회 모습

    불만은 서벵갈 주의 주도인 꼴까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공산당 집권 기간 동안 꼴까따가 인력거(릭쇼), 테레사 수녀 등의 이미지로 고착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꼴까따 하면 빈곤, 부패, 착취를 떠올리는데 대한 불만을 크게 가졌다. 그들은 공산당은 외부 세계에 비친 꼴까따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공산당 정권이 전통적 인식에 빠져 도시 쇠락에 일조했다는 의식이 주민들 사이에 팽배했던 것이다.

    서벵갈에서 공산당이 결정타를 맞은 것은 그들이 가진 스탈린주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벵갈의 공산주의는 스탈린 시대에 소련 공산당이 했던 것처럼, 오로지 당의 결정이 모든 행동의 기반이자 근거였다.

    당의 결정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의견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으니, 싱구르와 난디그람에서 터진 농민과 진보운동가들의 저항을 경찰력을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짓밟은 것은 그들의 스탈린주의에 기반 한 전체주의 때문이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당에 위해를 가한다고 판단할 때는 다른 어떤 부르주아 정당보다 더 과격한 폭력으로 그들을 진압하였다. 일국 사회주의와 전위주의에 대한 맹신의 결과다. 당이 결정하면 무조건 복종해야 하니 당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는 민주주의가 침해되는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사고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진보정치인이 아닌 그냥 정치인이라고 보게 한다.

    이것은 비단 서벵갈의 공산당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2012년 한국의 통합진보당 사태에서도 발생한 일이다. 한국의 통합진보당이나 서벵갈의 공산당이나 모두 당이 민주주의에 우선하고 그래서 모든 것은 당을 보호하고, 세우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때는 감쪽같이 숨겨지지만, 위기가 발생해 그 고유의 성격을 노출할 수밖에 없게 될 때는 모두 극심한 시대착오적 보수 집단으로 여겨지고, 결국 주민들의 지지를 한 순간에 모두 상실해버린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패인으로 그들이 성공리에 완수했다고 하는 토지개혁의 본질적 한계를 들 수 있다. 서벵갈에서의 토지개혁은 인민이 사회 혁명을 이루어낸 후 그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단순하게 말하면, 집권에 성공한 공산당 정부가 지지 확보를 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토지개혁을 시행하면서 소작농을 소농과 자작농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소작등재제라는 것을 도입하였다. 토지를 잘게 쪼개 등재하는 체제를 만들다보니 빈곤을 타파하는 계기가 되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토지를 너무 잘게 많이 쪼개다 보니 농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 대규모의 기업농으로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그 제도에 의하면 토지를 주정부가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전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주정부 입장에서는 공유지를 확보하지 못해 정부 차원에서 뭔가를 새롭게 시도해 볼 수조차 없게 되는 근본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주정부가 주도하여 특별경제구역을 만드는 일도 실패하고. 외부 기업을 유치하여 공단 조성을 하려는 것도 실패하였다. 이것이 싱구르와 난디그람에서 일어난 사태다.

    사태가 터지면서 공산당 정부는 무능을 감추지 못했고, 오로지 한 일이라곤 폭력 진압밖에 없었다. 34 년간 집권한 진보진영의 몰락은 한 순간에 현실이 되었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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