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왜 김소연을 지지하는가
    [이메일 인터뷰] 내가 지지하는 후보와 그 이유 - 김소연
        2012년 12월 14일 07: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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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대 대선을 전후한 지금 한국사회에서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시대정신이란 시대를 인도하는 공통 감각과 지성일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정신에 비추어 시대의 한계를 조명하고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갑니다. 또한 시대정신이란 한 사람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의 세계관과 연결되어 이루어진 총체로서의 이념적 별자리입니다. 그러나 나는 과연 이 시대에 그러한 이념적 별자리가 존재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저 천상에 존재하는 별빛과 달리 인간 마음속의 별빛은 홀로 빛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기 곁의 친구, 가족, 동료, 동지의 별빛을 흠모하고 따라하며 ‘함께’ 빛납니다. 하지만 인간 마음속의 별빛들이 서로 연결되어 함께 빛나는 거대한 별자리는 우리 시대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독재와 민주주의가 시대정신이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때 한 노동자가 자신의 별빛을 불살랐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별빛은 다른 노동자에게로, 지식인에게로, 시민에게로 전이되어갔습니다. 그 전이가 가능했던 이유는 사람들 마음속에 죽은 노동자의 숭고한 별빛을 이어가고 확장시키려는 작은 별빛들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별빛들이 마음과 마음의 연결을 따라 더 큰 별자리를 빚었습니다. 그 별자리가 바로 반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시대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심각하게 손상됐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별빛이 아예 없다기보다 그것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타인의 별빛을 흠모하고 따라하며 더욱 밝고 크게 빛나던 인간의 별빛은 이제 사람들 각자의 마음속에 고립된 채 희미하게 잔존해갈 따름입니다.

    소위 신자유주의 체제는 단지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고용불안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노동조합의 교섭력 약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회관계와 공동체의 광범위한 파괴를 의미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를 “봉쇄된 사회”의 출현이라고 말합니다. 봉쇄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항상적인 불안 속에서 홀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생존과 가족의 생계만이 문제가 됩니다. 자기계발, 커리어 관리, 재테크, 힐링, 이 모든 말들은 사실 불안한 개인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생존과 생계에 대한 강박을 좀 더 세련된 용어로 표현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불안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봉쇄된 사회에서 국가와 자본의 지배가 훨씬 더 수월해진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들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제 일 원인인데도 말입니다.

    봉쇄된 사회의 개인들은 심지어 안정적이고 행복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지배자들의 삶을 흠모하고 따라합니다. 그들로부터 퍼져 나오는 강력한 선망의 써치라이트는 사람들 마음속의 희미한 별빛을 압도하고 압살합니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으로 수많은 노동자들과 철거민들이 죽고 다치는 데도, 불평등이 더욱 강화되고 부정의가 더욱 판을 치는데도 사람들은 선망의 써치라이트에 눈이 멀어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아니 그것들을 눈앞에서 보고도 공감을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일그러지지 않습니다.

    불평등과 부정의는 이제 감추어지거나 외면됩니다. 따라서 불평등과 부정의는 그 실체가 파헤쳐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파헤쳐진 후에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심보선 시인

    이 시대에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바로 공통적인 감각과 지성에 비추어 불평등과 부정의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시대정신이 부재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 마음속의 별빛들은 잔존하지만 서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더 밝고 강력한 외부의 빛에 의해 가려집니다. 우리는 이 엄연한 현실을 인정한 연후에야 비로소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3가지를 꼽는다면?

    나는 이번 대선의 3대 이슈를 ‘노동’과 ‘정치’와 ‘삶’으로 봅니다. 모든 대선 후보들이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문제, 일자리 창출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대선 후보들이 정치 쇄신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후보들이 국민들에게 행복한 삶을 약속합니다.

    경제민주화를 강조하는 문재인 후보는 노동자들을 이명박 정권의 대표적인 피해자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그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까지도 노동자들의 가해자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문재인 후보는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심리 치료를 받고 있는 ‘와락’ 센터에 방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들이 싸움을 하고 있는 장소인 송전탑은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피해 노동자 앞에서 눈물을 흘렸지만 투쟁 중인 노동자와 함께 싸우겠다는 결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를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문재인 후보의 한계인 동시에 득표수로 선거에서 승리를 해야 하는 정당정치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정당정치의 한계 안에서 정치쇄신이란 박근혜건, 문재인이건, 안철수건 동일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정치 쇄신을 말할 때, 그 대상은 정치인과 관료의 정치에 국한됩니다. 그들이 말하는 정치 쇄신은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정당, 국회, 정부의 자기 혁신에 불과합니다.

    정치 쇄신이 엘리트 조직의 혁신을 의미하는 정치공학의 등식은 프레임의 마지막 축, 삶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나는 앞서 봉쇄된 사회에서 생존과 생계에 연연하는 불안한 개인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문재인 후보는 재벌개혁, 일자리 창출을 이야기하며 불안한 개인들에 대한 ‘멘토’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습니다. 그리 보자면, 문재인 후보가 행복한 삶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은 1% 멘토의 리더십과 전문성으로 99% ‘멘티’들의 불안을 덜어주겠다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개인들은 봉쇄된 사회 자체로부터 해방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봉쇄된 사회 내부에서, 그 사회가 자신에게 할당한 자리에서 보살핌을 받는 객체인 것입니다.

    노동, 정치, 삶의 프레임 안에서 가장 진정성이 부족한 후보는 말할 것도 없이 박근혜 후보입니다. 그녀야말로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안과 제도적 절차에 제동을 걸어온 당사자입니다. 부패하고 비양심적인 정권의 파트너인 새누리당이 정치 쇄신과 국민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뿌리 깊은 친자본적 입장, 권위주의적 성향, 무식하기 그지없는 지적 수준을 보건대 그들이 집권을 하면 또 다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노동, 정치, 삶이라는 프레임에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본질적 차이는 크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 둘의 사소한 차이가 그리도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사소한 차이가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정권교체를 원하고 문재인 후보를 지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보다 사람이 다치고 죽으면 안 되니까요. 그런 절박함으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문재인 후보가 썩 맘에 들지 않아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문재인 후보를 소위 ‘비판적으로 지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판적 지지란 말은 사치스럽게 들릴 지경입니다. 차라리 사람들은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에 대한 ‘필사적 거부’로 문재인 후보가 썩 맘에 들지 않아도 그를 지지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3. 그래서 나는 이번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하는가? 지지의 이유는?

    내가 김소연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선의 이슈 프레임-노동, 정치, 삶-에서 김소연 후보는 그 프레임을 활용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김소연 후보에게 노동이란 그저 생존과 생계를 보장하는 수단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모두가 ‘함께 잘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토대이자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희생자와 피해자에 머물지 않습니다.

    김소연 후보는 노동자를 정치의 주체로 내세웁니다. 노동자는 그저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는 경제적 행위자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노동자는 그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층에 위치한 계층의 일원이 아닙니다. 노동자는 역사적으로 볼 때, 경제적 계약과 사회적 위계로 이루어진 체제에 이견을 제기하고 행동을 통해 그 체제를 변화시켜온 가장 중요한 주체입니다. 다른 대선 후보가 말할 수 없는 그 사실, 말하지 않는 그 사실을 김소연 후보는 당당히 발언하고 있기에 나는 김소연 후보를 지지합니다.

    둘째, 김소연 후보에게 정치는 관료와 정치인의 정치, 국회, 정당, 정부의 공공 서비스가 아닙니다. 김소연 후보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표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세상을 바꾼다.” 김소연 후보는 그들에게 의존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 세상을 바꾸자고 주장합니다.

    김소연 후보가 선거운동을 선거투쟁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김소연 후보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위기의 현장을 방문하여 그곳의 투쟁 주체들과 연대하고 행동합니다. 그렇게 김소연 후보는 선거유세와 직접행동의 경계를 지우고 넘나듭니다. 따라서 김소연 후보에게 선거란 정치인들이 표심을 공략하고 득표수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게임이 아닙니다.

    김소연 후보에게 선거란 사회적으로 배제된 자들에게 닫혀 있던 정치의 장을 여는 싸움입니다. 배제된 자들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공론장에 개입하는 정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김소연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은 바로 그녀의 싸움, 그녀가 대선이라는 폐쇄적 게임 공간에서 꿋꿋이 열어 나가려 하는 정치를 지지한다는 뜻입니다.

    4.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현재 약점과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한국의 진보세력의 현재에 대한 개인적 평가는?

    이제 이번 대선의 마지막 이슈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지막 질문들에 답하겠습니다. 과거에 ‘비판적 지지’는 민중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야권 후보를 찍을 때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번 대선에서 야권 후보를 찍는 논리는 비판적 지지가 아닙니다. 필사적 거부입니다. 정권교체가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간절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노동과 정치와 삶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노동자 후보를 무조건적으로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김소연 노동자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합니다(노동자 후보에게 비판적 지지라는 용어를 쓰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김소연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김소연 후보에게 삶은 봉쇄된 사회에서 관료와 정치인이 보살펴주고 보장해주는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 김소연 후보 역시 ‘불안 없는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김소연 후보에게 삶은 우리 자신이 주체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삶입니다.

    김소연 후보는 그 행복한 삶을 위해, 재벌을 해체하고 주요 산업의 소유와 운영에서 노동자, 민중이 주체가 되는 사회화를 추진하겠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이 공약을 보고 일단 ‘사회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 구체적 의미를 따지기 전에 공약집 전반을 흐르는 기조는 사회의 주요 시스템을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해방시켜 노동자와 민중의 통제 아래 놓겠다는 뚜렷한 의지였습니다. 김소연 후보의 공약을 두고 지금 사회주의 하자는 것이냐, 구체적 방법론은 부재하고 이데올로기만 있는 것 아니냐, 등등의 비판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현실가능성, 혹은 이념적 지향과는 별개로 나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김소연 후보의 공약을 비판하고자 합니다. 김소연 후보는 시스템의 소유와 운영을 노동자와 민중이 주도하면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시스템을 노동자와 민중이 장악하면, 혹은 노동자와 민중의 대표자들이 장악하면 삶이 행복해질까요? 제가 좋아하는 프랑스의 노동이론가이자 생태주의자인 앙드레 고르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우리가 자유롭게 스스로에게 부과한 목적들을 실현할 수 있는 데서, 우리가 실현하는 행위들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삼을 수 있는 데서 온다”고 합니다.

    이러한 행복관은 그간의 좌파적 사고, 즉 평등과 정의를 언제나 ‘시스템 통제’의 문제로 바라보는 관행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간의 좌파적 사고는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와 민중이 시스템을 완전히 통제할 때까지 행복을 유예시킵니다. 정작 좌파의 기쁨은 저항의 과정에서, 새로운 상상력, 새로운 자율성의 공간,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연대의 판을 짜는데서, 가장 빈번히, 그리고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분출되어 왔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행복한 삶은 저들이 돌봐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젠가 ‘그날이 오면’ 성취되는 머나먼 미래의 꿈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봉쇄된 사회에 갇힌 불안한 개인들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지역과 도시와 학교와 공장과 직장과 거리에서 스스로 목적을 부과하고 그것들을 함께 실현해나가는 장소와 관계와 행동전략들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하면 시스템을 간과하는 아나키적 취향이라고 비판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스템의 변화는 시스템 내부에 시스템 바깥의 활력을 불어넣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문재인 후보 역시 바라보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재벌규제가 곧바로 재벌의 권위주의적이고 비인간적인 조직문화를 바꿀 수 있을까요? 절대로 바꾸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재벌기업의 직원들은 CEO들의 주식 소유양이 아니라 승자로서의 그들의 지위와 라이프스타일을 흠모하고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복지의 확대가 곧바로 개인의 존엄과 사회적 관계망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게 못합니다. 복지가 증대되더라도 인간이 생계와 생존 외에 다른 삶을 꿈꾸지 못한다면, 복지수당과 최저임금이 자아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재투자된다면 복지는 봉쇄된 사회를 양산하고 강화시킬 것입니다. 요컨대 시스템의 기능적 문제는 인간적 삶의 호흡과 흐름과 에너지에 조회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는 있어도) 극복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시스템의 개선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와 개인이 스스로 부과하는 삶의 목적, 그것을 실현하는 자유로운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시스템의 개선은, 앞서 이야기한 별빛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사람들 마음속에 잔존하는 작은 별빛들을 밝히고 서로 연결시키는 데 기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진보진영은 과거 진보정당이 10년 전 내놓은 무상급식 정책이 지금에 와서 제도권에 의해 채택되었다는 사실에 자부할 것이 아니라 무상급식이 아이들과 학부모와 교사에게 어떤 종류의 삶을, 어떤 종류의 관계들을, 어떤 종류의 기쁨을 가져다주었는지, 그들이 세상을 사유하고 감각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게 되었는지, 혹은 그러지 못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김소연 후보는 민중적, 노동자적 입장에서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지극히 모범적인 답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김소연 후보는 민중적 삶, 노동자의 삶, 실은 김소연 후보가 스스로 고통과 절망 속에서 끝내 살아내고 지켜내고 가꾸어온 그 삶에 대해 사람들에게 증언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미래의 세계가 이미 우리의 삶 속에서 조금씩 준비되고 작동되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합니다.

    내 말은 선거 투쟁에 뭔가 드라마틱한 요소를 집어넣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정치는, 그것이 선거이건, 일상정치이건, 직접행동이건, 결국 삶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그러나 그 삶은 박근혜 후보가 이야기하는 선진국민의 격조 있는 삶도 아니요, 문재인 후보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죽음 직전의 생명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죽지 않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죽지 않는 것은 매순간 삶을 더 높은 곳으로 조금씩 고양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들, 최병승, 천의봉, 한상균, 문기주, 복기성, 홍종인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삶에의 의지입니다. 죽음을 무릅쓴 삶에의 의지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삶 또한 매순간 고양됩니다. 그들이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한 그들은 죽지 않습니다.

    노동자는 정치적 주체인 동시에 보편적 주체입니다. 이 말은 노동자가 시스템의 가장 뛰어난 엔지니어란 말이 아닙니다. 노동자가 이 시대에 가장 고귀한 영웅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노동의 종언을 이미 확정한 듯 무자비하게 질주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도 우리가 보편적 주체로서의 노동자라는 존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나약함과 비참함을 강요받고 그것들과 싸울 때, 바로 그 순간에, 가장 인간적인 상상력과 언어와 행동을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비록 위태롭게 흔들리고 명멸할지라도 그들이야말로 여전히 우리가 흠모하고 따라하고 싶은 별빛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별빛을 보며, 불현듯 우리 또한 스스로의 마음속에 잔존하는 별빛을 기억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별빛을 보며 우리가 아닌 것 같은, 아니 본연의 우리인 것 같은, 아니 둘 다 인 것 같은 어떤 존재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김소연 후보와, 그리고 진보진영에게 감히 말씀드립니다. 시스템의 소유와 운영이라는 말이 가득한 공약집은 잠시 접어두십시오. 조직 운동으로서의 생존과 발전 전략에 대한 고민도 잠시 접어두십시오. 다만 선거투쟁 과정에서 사람들과 뜨겁게 만나고 대화하며 되새겨보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잃어버린, 빼앗긴 삶은 어떤 삶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배자들의 손아귀에서 그 삶의 일부를 어떻게 다시 구해올 수 있었는지, 우리가 지난 투쟁들을 통해 그 삶에 어떤 종류의 새로운 삶을 더해 왔는지, 지금 여기의 한국 사회 곳곳에, 그 삶을 어떻게 미래를 위한 씨앗으로 심을 수 있을지,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라는 말을 다시금 말하고 들을 때, 어떻게 그 익숙하고 빤한 어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희와 감격을 심장의 박동으로 생생히 느낄 수 있을지,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시길 부탁드리고 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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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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