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명동성당으로
    [아빠의 현대사45] 잊을 수 없는 2001년 경찰의 폭력 만행
        2012년 12월 14일 01: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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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도 이제 노동일은 않을 테야/ 일해 봐도 보람도 없는 그런 일은 않을 테야/ 겨우 연명할 만큼 주면서 생각할 틈조차 안 주다니/ 진절머리가 난다네/우리도 햇빛을 보고 싶다네/ 꽃냄새도 맡아 보고 싶다네/ 하느님이 내려주신 축복인데/ 우린들 아니 볼 수 없다네/ 우리는 여덟시간만 일하려네/ 조선소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점포에서/ 우리는 힘을 길러 왔다네/ 이제 우리 여덟시간만 일하세/ 여덟 시간은 휴식하고/ 남은 여덟 시간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세” (1886년 미국노동자들이 5월1일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부른 노래 중에서)

    주5일 근무제

    지금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선배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들이 많다. 위의 노래는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해 싸운 미국노동자들의 노래다.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해 수많은 노동자가 사형까지 당해야 했다.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노동절’ 즉 메이데이는 이를 기념하는 날이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하는 게 좋겠다.

    얼마 전 오랜만에 ‘파업전야’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노조를 만든 사람들의 명단을 노동청에서 회사에 알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잇따라 해고가 되는 사람들이다. 당시에는 30명 이상이 있어야 노조를 만들 수 있었다. 지금은 2명이상이면 되고, 혼자라도 산별노조에 가입할 수 있다. 모두 선배들의 지난한 노동법 개정 투쟁의 결과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곧 노동시간 단축투쟁의 역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 시행되고 있는 주 40시간의 노동시간 역시 기나긴 투쟁의 결과다.

    민주노총은 2000년 5월 31일 총파업투쟁을 시작으로 ‘근로조건 저하 없는 주5일 근무제’ 투쟁을 본격화한다. 결국 수많은 노동자들의 구속과 수배, 그리고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투쟁의 결과로 2004년 7월 마침내 1,000명 이상 사업장부터 시행하여 2011년 20인 미만까지 적용됨으로서 전국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다, 이 투쟁은 2001년 들어서 더 격하게 진행되는 데 그 얘기를 해 보자.

    경찰이야 조폭이야?

    “김대중 정부 4년이 노동자에게 준 것은 오직 고통밖에 없습니다.” 2001년 6월 12일 공공연맹의 총파업을 앞두고 내가 쓴 기자회견문의 첫 문장이다. 과거의 민주투사였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대통령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했지 싶을 정도로 노동자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에 노동자는 없었다. 대통령 선거를 바로 앞 둔 지금, 문재인 후보가 소속되어 있는 민주당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보내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김영삼 정부는 1993년부터 1997년까지 5년 동안 노동자 투쟁과 관련 총 507명을 구속하여 1년에 100명꼴로 감옥에 보냈다. 반면 김대중 정부는 1998년부터 2001년 6월 22일까지 3년 6개월 동안 총 575명을 구속, 1년에 160여명 꼴로 노동자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내가 민주노총을 떠난 직후 조직쟁의실장을 한 네 학교 후배인 주협이 아빠 신언직도 감옥을 피할 수 없었다.

    “국민의 정부 들어서 합법화되고 권리를 보장받은 노조가 가장 강력하게 비합법적 투쟁을 하면서 사회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크게 보면 건전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노동운동 방향을 따라가지 못하는 극렬세력이 이번 파업을 하고 있다.”고 김대중 대통령은 말했다. 정부의 일방적인 구조조정 정책으로 공공부문에서만 13만명이 거리로 쫓겨났는 데 말이다.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해서는 탄압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대우자동차에서 벌어진 살인적인 폭력이었다.

    2001년 대우차노동자에 대한 폭력만행(사진=대우차노조 영상패)

    얼마 전 상영된 영화 ‘부러진 화살’에 그 장면이 삽입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에선 당시 금속연맹 소속이었던 박훈 변호사가 받았던 깊은 충격을 보여준다. 경찰은 1,750명의 정리해고에 대해 투쟁하던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짓이겼다. 무력충돌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윗도리를 벗은 채 평화적으로 앉거나 누워있던 대우자동차 70여명의 노동자들을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팼다. 4월 10일의 일이다. “경찰인가, 조폭인가?”라는 기사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고도 경찰은 이를 은폐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 조합원이 카메라 동영상을 촬영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 충격적인 영상은 사흘간 접속수가 284만회를 기록했다. 다시 보아도 끔찍하다. 이 사건으로 인천경찰청장과 부평경찰서장이 직위해제 되고, 김대중 대통령이 나서서 사과를 하지만 뒤이어 울산 효성공장에서도, 여의도 건설일용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진압작전에서도 계속적인 경찰폭력이 이어졌다.

    결국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으로 방침을 정한다. 운동권 일각에서 ‘비판적으로 지지’했고, 한 때 군사독재정권을 물리치기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이 노동자들을 그렇게 대접했다. 당시 집회현장에서 노래를 부르던 혼성 5인조 댄스그룹인 젠(ZEN)은 [그날 그 자리에서]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4월 10일 화창한 봄날에 미친 개가 사람을 물었어..몇 년을 못 물었대. 참고 또 참았대. 노벨상 받겠다고 꾹꾹꾹 참았대…명령하는 그 놈들은 너희가 미쳤대….” 그런 세상이었다.

    명동성당 진입작전

    결국 얼마 지나지 않은 2001년 6월 단병호 위원장과 이홍후 사무총장에 이어 공공연맹의 양경규 위원장까지 경찰에 의해 수배되고 만다. 은수가 어렸을 적 빼빼로 아저씨라고 부르던 양경규 위원장은 “공공부문에 대한 무분별한 구조조정”에 대해 대한항공조종사노조를 포함하여 19개 사업장 20,207명이 파업에 돌입하도록 조직했다는 혐의였다.

    전에도 87년 6월 항쟁을 말하면서 명동성당을 얘기했었다. 명동성당은 일종의 치외법권지대로 경찰이 함부로 진입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수배당한 지도부가 들어가기에는 제일 좋은 곳이었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처지도 아니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투쟁을 지휘해야 하는 민주노총으로서는 당연히 제1순위 대상이었다.

    경찰도 그걸 알고 있어서 경비가 삼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들도 프로가 있다면 우리 역시 그런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은 이홍우 사무총장이었다. 무사히 들어가기는 했는데 이후 경찰들의 경비가 더 강화되었다. 경찰은 아예 횡대로 한 줄로 늘어서서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검문할 정도였다.

    그런데 단병호 위원장은 키도 크고, TV 등 언론에 많이 노출되어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어서 더 위험했다. 특히 다른 사람과 확연히 구분되는 외모 때문에 명동성당으로 진입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진입방법에 대해 지혜를 모으고, 모은 뒤에야 무사히 명동성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 실패하면 노동운동의 지도자를 경찰에 잡히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매우 컸을 것이다. 007작전을 무색하리만큼 다양한 변수에 대해 준비하고, 철저히 사전답사를 했다.

    “열 포졸 도둑하나 못 잡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경찰이 아무리 눈에 불을 키고 지키고 있어도 틈은 있었다. 그런데 결국 사고가 나고 말았다. 가뜩이나 민주노총의 지도부가 수배를 피해 명동성당에 무사히 들어가 열이 받아있던 경찰들에게 보란 듯이 이번에는 공공연맹의 양경규 위원장도 삼엄한 경계를 뚫고 다시 또 들여보낸 것이다.

    우리는 양경규 위원장이 명동성당에 무사히 들어 온 직후 그 다음날 공개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들어간 시간을 경찰에서 알게 되면 당시 지키고 있던 경찰들이 문책을 당하기도 하고, 혹시나 진입방법을 알아 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비밀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도착한 후 명동성당 뒷마당에서 서성대고 있을 때 사복경찰 중 하나가 알아본 것이다.

    마침 너도 아는 민길숙 조직부장이 단병호 위원장을 만나러 명동성당에 도착했다. 양경규 위원장이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했는지 검색검문이 유달리 까다로웠고, 영문을 모르는 민길숙 부장은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실랑이가 벌어졌다. 차를 몰고 들어가던 중 경찰이 검문하자 신분증을 보여주고, 절차를 밟아 교통경찰이 올라가라고 하여 1단 기어를 밟았는데 그 과정에서 뒷바퀴 쪽에 검문 중이던 경찰 2명이 부딪쳐서 무릎 등에 타박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결국 곧바로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연행되어 2시간 동안 형사과 벤치에 수갑이 채인 채로 가혹행위 당하고, ‘특수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연행되고 구속당한다. 물론 이후 재판과정에서 집행유예로 나왔다가 결국 무죄가 된다. 3달여를 감옥에서 보내고 무죄로 석방되면서 500여만원의 보상금을 받은 것으로 안다. 명동성당 진입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그러나 그 방법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자. 언제 또 그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는 날이 올지 모르니 말이다.

    사자성어 포스터

    교육선전실장이라는 직책은 한편으로는 조합원에 대한 교육 등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포스터 등을 제작하고, 기자회견문이나 언론의 악의적 기사에 대해 대응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공공연맹이 파업투쟁을 한 6월 12일을 전후하여 마침 가뭄이 심했다. 보수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엎친 가뭄에 덮치는 파업(중앙)’, ‘이 판에 연대파업이라니(대한매일)’, ‘가뭄 속에 명분 약한 연대파업(조선)’, ‘가뭄에 연대파업 겹쳐 경제 상반기 최대고비(동아)’ 등 가뭄과 파업을 억지로 짜 맞추어 파업에 대해 악의적 선동을 일삼았다.

    특히 노골적으로 악성 기사를 써대는 조선일보에 대한 불매운동이 그 때부터 시작되기도 했다. 보수 언론의 날조 기사를 낱낱이 분석해서 언론중재위에 제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는 매우 적었다.

    당시의 사자성어 포스터들

    사자성어로 된 포스터 시리즈를 낸 것이 기억에 남는다. “건곤일척” “임전무퇴” “파죽지세” 등 3종의 선전물을 잇달아 내서 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각종 사자성어 선전물을 제안하기도 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우왕좌왕” “이판사판” “좌충우돌” 등 사자성어로 된 농담을 하기도 했다.

    필자소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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