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투고] 비판적 투표가 필요하다
        2012년 12월 13일 04: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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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최지미씨가 <레디앙>으로 투고 글을 보내왔다. 글의 주장은 독자의 의견이라는 점을 알리며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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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 계급의 투쟁을 위해, 대중들에게 개혁주의의 본질을 폭로하기 위해, 비판적 투표를 합시다.

    이번 대선, 지난 몇 번의 대선과는 확연히 다른 양강구도로 치러지고 있습니다.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보수 세력들이 명실 공히 ‘대연합’을 이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진보 정치 세력의 존재감이 미미하다는 것.

    97년, 김종필은 김대중과 손잡았고 이인제는 이회창과 분열했습니다. 02년, 정몽준은 노무현과 단일화를 이뤘고 박근혜는 이회창을 흔쾌히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이명박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07년에도 박근혜와 이회창은 이명박과 한 편에 서지 않았죠. 하지만 이번 대선은 다릅니다. 박근혜와 이명박, 이회창, 이인제, 정몽준, 전두환, 유신 잔당, 거기에 김대중의 휘하에 있던 한화갑, 한광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 배를 탔습니다.

    보수 세력이 유래 없는 대연합을 이룬 와중에, 안타깝게도 진보 세력은 전에 없는 분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선 후보만 세 명. 세 명이 상징하고 있는 세력 이외에 대선 판에 오르지 않은 장외 세력까지 치자면, 진보 세력은 그야말로 ‘난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입니다.

    민주당. 현재 제 1 야당이자 뿌리 깊은 부르주아 야당의 역사를 가진 민주당은 사실 그리 한 게 없습니다. 이명박 5년 동안 이렇다 할 대안도 비전도 보여준 바가 없고 거리에서의 운동에서도 뒤통수나 치기 일쑤였죠. 과거 노무현의 당선에 일조했던 대선 후보 경선도 이번에는 영 흥행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민주당은 보수 세력의 재집권을 막을 유일한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보수 세력에 비해, 민주당의 왼쪽에 자리한 진보 세력은 지리멸렬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과거 같았으면 진보 정당에 적을 올렸을 민주노총의 상층 리더들도 줄줄이 민주당 캠프에 승차했습니다.

    게다가 새누리당의 박근혜는 어떤가요. 군사 쿠데타를 ‘구국의 결단’이라고 묘사하는 그. 그리고 ‘이명박이 촛불 시위를 초장에 진압하지 못한 게 한심하다’고 꾸짖는 그의 보좌관. 알만하지 않나요. 이명박보다 더한 자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치러지는 대선. 좌파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개혁주의 세력에게 비판적 투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께서 이런 결론이 탐탁찮을 것입니다. 저도 썩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극우 정권이 아니라 개혁주의 정권을 원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문재인, 그리고 민주당. 경제민주화니, 사람이 먼저라느니 좋은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선거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후보시절 했던 말과 집권해서 했던 행동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했던 그의 집권 시절,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급증했습니다. 곳곳에서 투쟁이 벌어졌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다치고, 갇히고, 죽어갔습니다. 그의 재임 시절 돌아가신 열사가 스무 명이 넘습니다. 김진숙 동지가 살아 내려온 그 크레인에서 목을 맨 분도 계시고, 서울 도심에서 자기 몸에 불을 붙인 분도 계십니다. 경찰에게 고립된 채 당뇨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못해 돌아가신 분, 진압 경찰의 살인적인 폭력에 문자 그대로 ‘맞아서’ 돌아가신 분도 있습니다.

    그 시절을 겪었던 우리가 노무현의 후예인 문재인과 민주당의 말을 그대로 믿고 그들을 찍는다면, 그건 단순한 무지를 넘어서 차라리 범죄에 가까운 짓입니다.

    때문에 만약 투표만이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민주당의 문재인 이외의 진보적 후보는 당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상황이라면, 그리고 당선 가능성을 떠나서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압박을 할 수 있는 득표도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이민을 가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선거와 투표로 바뀌지 않습니다. 세상은 노동자/민중의 운동과 투쟁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엄혹했던 군부 독재 세력이 청와대에 있을 때도 정치적 민주화와 민주노조의 탄생을 성취했던 것이고, 신자유주의 세력이 집권하던 시절에도 노동자 민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투표를 투쟁에 종속시켜야 합니다. 투표 자체에 거창한 명분이나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투쟁을 위한 최선의 조건을 만드는 수단으로서 투표를 활용해야 합니다.

    가슴 아프게도 진보 후보들의 당선 가능성, 적어도 수십만의 득표를 통해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거나 사회적 압력을 형성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보수대연합의 수장인 박근혜의 집권 가능성이 만만치 않은 상황입니다. 박근혜의 집권을 허용하는 것이 향후 5년 간 노동자들이 투쟁을 건설하기에 이로울까요.

    만약 박근혜가 집권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명박이 5년 동안 자행했던 탄압이 그 연속성을 보장받을 것입니다. 쿠데타를 구국의 결단이라 칭송하는 자들, 제 나라 사람을 도륙하고 정권을 잡은 이들이 목소리를 키울 것입니다. 이런 정권을 등에 업은 자본은 더욱 광포하게 굴 것입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민주당은 야당이 될 것입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내내 노동자들을 때려잡았던 그들이, 지난 이명박 정권 5년 내내 그러했던 것처럼 정의로운 야당행세를 할 테지요. 그들은 박근혜의 노동 탄압을 지켜보며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할 겁니다. 청와대도 박근혜가 접수했지, 이미 국회의 다수도 새누리당이 차지했지,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느냐는 시늉을 하겠지요.

    그러다가 그들은 결정적 순간에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노동자들의 저항에 뒤통수를 칠 것입니다. FTA 반대 투쟁이 벌어졌을 때도, 해군기지 건설반대 투쟁이 벌어졌을 때도,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 때도, 민주당은 언제나 요구 조건을 낮추거나 투쟁의 김을 빼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나라는 삼성 공화국, 비정규직 천국이 되어버렸고, 노동자들의 파업에는 손배가압류와 경찰 폭력이 뒤따랐습니다. 자본가 계급에 기반한 그들은 근본적으로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는 자본의 공세에 맞서 싸울 수 없습니다. ‘부르주아 야당’은 설령 ‘야당’일지라도 ‘부르주아’ 야당일 뿐입니다.

    하지만 진보 세력은 지리멸렬 사분오열된 상황. 5년 더 권력을 보장받은 세력들은 더욱 거세게 몰아치는 상황. 청와대도 국회도 새누리당에게 넘어간 상황. 이런 상황은 개혁주의 세력이 자신들의 기만적 본질을 숨기고, 어쩔 수 없이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이미지를 연출할 여지를 줄 겁니다. 다시금 개혁주의 세력은 극우세력의 악랄함을 이용해서 자기 정체를 숨기고, 그들에게 못이기는 척, 노동계급에게 경제위기로 인한 고통을 요구하는 역겨운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만약 진보/좌파가 경제 위기의 원인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하고 투쟁의 전망을 세우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노동 계급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개혁주의 세력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에 마주할지 모릅니다.

    이미 오랜 시간 군부독재의 집권과 극우 세력의 횡포를 오랜 기간 경험한 바 있는 대중의 의식은 개혁주의에 보다 종속될 수도 있습니다. 민주당 캠프에 몸을 실은 전현직 노동관료들과 몇몇 진보적 인물들은 이런 경향을 부추기겠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투쟁에 나서는 노동자들은 밖으로는 더 강력해진 박근혜를 상대하면서, 안으로는 민주당과 애매모호한 개혁주의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겁니다. 안에도 밖에도 적이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할 자들과 함께 투쟁에 나서야 하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문재인이 집권한다면 어떨 까요. 집권 초기에는 일련의 유화적 조치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조치는 어쨌든 지난 5년의 집권 세력을 교체한 데 따른 성취로서, 노동계급의 사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문재인도, 박근혜와 마찬가지로 결국 노동계급을 향한 공격에 나설 것입니다. 세계 경제 위기는 여전히 진행형이고, 한국도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08년 미국 발 경제 위기가 터졌을 때, 중국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로부터 원자재를 수입했고, 독일이나 한국 같은 공업국으로부터는 고급 자본재를 수입했습니다. 그리고 값싼 소비재를 생산해 미국 등의 시장에 제공했습니다. 아마존의 밀림이 지구의 공기를 정화시키는 것처럼, 중국의 거대한 시장과 노동력은 세계 경제 위기의 완충제 구실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녹록치 않습니다. 한 때 20퍼센트를 웃돌았던 중국의 성장률은 한 자리대로 추락했고, 내년에 하락세는 더 심해질 것입니다. 유로존은 붕괴 직전이고 미국은 3차 양적 완화에도 불구,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재정 절벽을 걱정해야 할 지경입니다.

    이런 비껴갈 수 없는 경제 위기 속에서, 민주당 정권은 자본가계급과 싸울까요, 아니면 노동계급에게 희생을 강요할까요. 결국 민주당 정권은 지난 10년의 집권 때 그랬듯, 노동계급을 향해 칼을 빼들 겁니다.

    민주당 캠프의 노동 관료들과 친 민주당적인 개혁 인사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교란시키는 구실을 할 테죠. 민주당과 공동 정부를 이루기를 간절히 원하는 일부 진보 정당들도 비슷한 구실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당이 야당일 때와 달리, 민주당 정권이 스스로 칼자루를 빼들고 공격에 나서는 이상 이런 교란 요소의 영향력은 보다 제한적일 것입니다. 경제 위기 속에서 개혁주의 정권은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폭로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보/좌파가 경제 위기와 자본주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과 폭로, 투쟁을 위한 올바른 전략/전술을 제시한다면 정권의 공격에 직면한 노동계급은 민주당 정권에 맞선 단호한 투쟁에 나설 수 있습니다. 너무나 오른쪽으로 치우친 나머지, 개혁주의 세력을 좌파라고 인식하는 우리 사회의 정치의식도 보다 왼편으로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일찍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했던 레닌. 그는 유럽에서 혁명의 파고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유럽 각국의 혁명적 좌파들에게 보다 악랄한 우익에 맞서 자국의 개혁주의 정당들과 연대에 나설 것을 주문합니다. 세계 대전 시기, 사회주의적 이상과 가치를 저버리고 자국의 제국주의 전쟁을 옹호했던 바로 그 세력과의 연대를 말입니다.

    대중들이 아직 개혁주의에 치우쳐 있는 상황에서 소수 혁명가의 모험적, 자기만족적 행동만으로는 혁명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러시아 혁명의 과정을 통해 먼저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는 혁명적 상황이 오기 전까지 자본주의의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달콤한 향내를 풍기지만 실은 불합리한 체제의 안전판 역할을 하는 개혁주의를 넘어서지 않고서, 대중들이 어느 날 갑자기 변혁을 꿈꾸게 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자유주의 세력을 극우세력의 그늘 아래로 숨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곰팡이를 박멸하려면 볕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적의 목을 치려면 단두대에 결박시켜야 합니다. 그런 목적의식으로 민주당을 청와대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애매모호한 개혁주의/자유주의의 한계를 폭로하고 진정 노동자 민중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변혁적 대안을 제시하려면, 대중들이 스스로 개혁주의/자유주의의 실체를 체험하고 극복하는 역사적 과정이 필요합니다. 김대중/노무현 10년의 시간이 그런 과정으로 자리매김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진보/좌파가 제대로 구실을 못했기 때문에, 대중은 엉뚱하게 김대중/노무현보다 오른 쪽에 있는 우익들에게로 몰려갔습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상대하기에 더 편한 적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투쟁하기에 더 유리한 환경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주의의 본질을 폭로하기에 알맞은 상황을 선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지난 시기보다 더 거대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될지 모릅니다. 지금부터 준비합시다. 더 큰 싸움, 더 거대한 투쟁을 준비합시다. 그리고 그 투쟁을 건설하기에 보다 용이한 정권을 만들기 위해 투표합시다.

    필자소개
    <레디앙>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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