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벵갈, 공산당 34년간 통치 (2)
    [현대 인도 인민의 역사] 서벵갈 토지개혁의 의미와 한계
        2012년 12월 10일 01: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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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당의 중농과 빈농의 연대 전술은 장기적으로 볼 때 지지 기반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전술은 서벵갈이 아닌 께랄라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적인 정책으로 판명되었는데, 그것은 서벵갈에서 농민은 께랄라에서와 달리 농민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빈곤이 매우 심하여 하층 농민에게 사회 정치적으로 권력을 부여해주지 않는 한 그들이 중간층 농민에 대해 독립적 위치를 차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서벵갈에서 공산당은 중농과 빈농의 연대 전술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연대 전술의 혜택은 중간층 농민에게로만 돌아갔다. 가난한 농민들로부터 비판적 지지를 받은 중간층 농민은 그 권력이 더욱 탄탄해졌고, 상대적으로 하층 농민은 아무 권력도 확보할 수 없었으니 가난한 농민들의 사회경제적 위치는 그 이전과 비교해 볼 때 개선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공산당이 집권하기 시작한 서벵갈 주가 본격적으로 해야 할 일로 삼은 것은 사회 복지의 향상과 잉여 생산을 하는 농민들의 소득을 재분배 하는 것이었지만, 상호 의존적 관계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실패하고 만 것이다. 결국 지지층 동원에 실패하면서 공산당이 세운 애초의 목표는 이루기 어렵게 되어 버린 것이다.

    서벵갈의 공산당이 농촌 개혁 다음으로 중요하게 고려했던 부분은 교육이었다. 서벵갈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침략할 때 처음 들어온 곳이다.

    그들은 이곳을 통해 인도의 부(富)를 유출하여 이곳의 농민들이 다른 곳에 비해 수탈의 고통을 훨씬 많이 받았지만, 근대화도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보급되다 보니 이곳이 다른 곳보다 근대화의 긍정적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인도의 근대화가 다른 곳보다 일찍부터 일어났고, 소위 벵갈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문학과 예술의 큰 진전이 있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교육이 다른 어느 곳보다 널리 보급될 수 있는 토양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이 집권을 한 당시 이 지역은 그러한 전통이 거의 사라진 교육의 불모지와 다름없었다. 그것은 독립 후 회의당이 이 지역을 독점 지배해왔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의 책임자는 회의당의 간부가 차지하였고 그들 주변에는 온갖 비리가 들끓으면서 교육의 독립 운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공산당은 교사/교수 노조를 적극 활용하여 그들이 교육의 현장에 들어가 정치로부터 독립하여 교육을 운영하도록 전폭 지지하였다. 공산당은 하층민들에게 교육을 무상으로 받을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추었고, 비용이 많이 드는 영어 교육을 초등학교에서는 하지 않도록 했다. 물론 부유층 자녀들은 사립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교육 체제는 이중 구조를 갖추게 되었고, 그 안에서 상대적으로 부유층 자녀들은 사교육을 비롯한 비공식 교육이 성행하여 계급 간의 교육의 격차는 줄어들지 않았다.

    교육 또한 농민 문제와 마찬가지로 분명한 계급 문제를 해소하는 기반 위에 시행되지 않고 어정쩡한 두 계급의 연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하층민의 물질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중 교육은 계획했던 것보다 성과가 적을 수밖에 없었고, 상층 계급은 교육을 통한 더 나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가 더 쉬워졌다.

    당연히 문자 해득률 같은 것은 줄어들지 않았고 그 결과 공산당이 세운 애초의 교육 목표는 갈수록 달성하기 어려워져 갔다. 당연히 교육을 통한 사회 개혁을 하려는 공산당의 목표는 실패하고 말았다. 사회에 만연한 부패 구조를 새로 등장한 진보 세력이 뿌리 뽑을 있는 전략과 그것을 밀어붙일 수 있는 구체적 힘을 갖지 못하는 한 새로운 정치를 실현할 수는 없다. 서벵갈 공산당의 패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농민과 하층민이 공산당 집권 이후 그들을 줄곧 지지해준 것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했던 것, 엄밀히 말해 이른바 비판적 지지였을 뿐, 그 지지는 언제든지 회수가 가능한 성격의 것이었다.

    이러한 장면은 한국에서 진보정당이 처한 상태와 오버랩되어 착잡하고 불편해진다. ‘노동자는 하나다’ 안에 들어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 그 안에 숨어 있는 비정규 노동자의 이중 소외, 그 연대를 추구하면서 지지 기반을 넓혀 정권을 잡으려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혹은 진보정의당의 정치 제일주의 등의 모습에서 서벵갈 공산당 정권이 보인다. 다만 다른 것은 한국의 진보 정당은 그 정치 제일주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그런 시행착오조차 한 번 하지 못한 무능함일 뿐이다.

    서벵갈의 공산당 정부는 하층민과 중산층의 연대를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즉 계급투쟁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태생적인 한계를 가졌다고 한다는 평가는 한 편으로는 맞는 말이면서 또 다른 편으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서벵갈에서 공산당이 34년간 집권을 하였다는 – 그것도 정당한 선거를 통해 – 것은 권력을 목표로 하는 정당으로서는 그 정치적 목표라는 관점 하나에서만 볼 때는 성공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것은 그 권력의 핵심인 하층민과 중산층의 연대 전술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농촌과 도시 깊숙한 모든 지역에 조직이 침투할 수 있었고, 권력 분점을 통해 권력이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기간 동안 당 조직의 확장 위에서 정치권력만 향유한 채 사회 변혁이나 경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민심이라는 것은 어리석어서 무능한 정치권력을 쉽게 내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 민심이라는 것은 무능한 권력이 영원히 가도록 놔줄 정도로까지 어리석지는 않다. 서벵갈의 경우, 민심도 무능했지만, 권력은 더 무능했다.

    서벵갈은 권력을 내주기 직전인 2007-8년대 후반 1인당 국민소득이 전체 28개 주에서 16위로 하위권에 속했다. 공산당 30년 통치 기간 동안 공업이 취약하고 농업이 중심이 되는 전통적 산업 구조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토지 개혁이 상당한 진전을 보면서 농촌과 연계가 강한 섬유 산업이 발전하면서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졌으나 그 대부분이 소규모의 일자리였을 뿐, 대규모의 산업체들은 활성화 되지 못했다.

    사실, 서벵갈 정부는 처음 정권을 잡은 이후 공업화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공산당 정부에 대해 위기 의식을 느낀 회의당 연방정부가 전력, 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에 투자를 허용하지 않고 주정부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서벵갈 지역의 주 산업인 엔지니어링 산업 등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그것은 심각한 실업 문제와 직결되었다.

    여기에는 연방 정부의 정책이 대규모 기업체에 대한 민간의 투자를 이끌어내지 못하게 하였다는 이유도 있었고, 이곳이 조직화된 노조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대규모 기업이 기업 활동을 하기 힘들다는 판단 때문에 대규모의 산업이 들어서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공산당 정부가 가난한 농민과 비조직화 노동자의 지지에 취해 경제 발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도 또 다른 주된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러면서 경제는 계속 침체 일로에 놓이게 되었고 결국 1990년대 들어서면서 도시의 젊은 엘리트를 중심으로 지지표 이탈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지지층의 이탈이 가시화 되자 공산당 정부는 기존의 경제 정책을 포기하고 새로운 경제 정책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인도 연방정부는 국가의 총체적 경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인허가 제도를 폐지하는 등 국가 자본주의 혹은 혼합형 경제 원칙을 폐기하고, 신경제정책이라 부르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때 서벵갈의 공산당 정부도 지지율을 만화하기 위해 신경제정책에 입각한 공업화 정책으로 그 정책을 전환하게 된다.

    그리하여 1994년 이후 서벵갈 정부는 외국인 기술 및 투자 유인, 경제 사회의 균형 성장을 위한 민간 부문의 성장 확대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공업화 정책을 추진한다.

    하지만 공산당 정부의 공업화 정책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사회간접자본 확충의 실패를 비롯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 가운데 하나로 공산당 세력이 모든 관공서와 기관에 침투하여 모든 것을 장악하고, 그 위에서 부패하고, 폭압적으로 권력을 남용하며, 복지부동의 자세로 기회만 엿보면서 주의 정책이 시행되는 혈관을 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공산당(M)지도자이고 전 서벵갈 수상이었던 붓다데드 밧따짜르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벵갈의 공업화에 일찍부터 노력하여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붓다데브 밧따짜르지(Buddhadeb Bhattacharjee)가 주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이전의 바수 주 수상과는 달리 실용주의 노선을 주창하는 인물이었고, 청렴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연방 정부의 비협조와 30년 넘게 막힌 부패와 복지부동의 동맥경화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업화의 실패와 관련하여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다. 서벵갈에서는 공장이 들어설 토지를 확보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공산당 정부가 토지 개혁을 시행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덕분에 농업 생산량은 전국에서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였고 특히 그 가운데 소농과 주변부 농민의 생산량 증가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가난한 농민들의 삶이 개선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나 호주에서와 같이 농업이 상품 생산을 해서 재투자가 이루어지는 경우라면 농업이 전체 주 경제를 선도해가겠지만, 서벵갈의 경우에는 농민이 간신이 먹고 사는 수준인데 그것으로는 경제 발전을 이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괄목할 수준의 농촌 개혁은 제조업 사업 추진에 애로 사항으로 작용하였다. 성공적인 토지 개혁 덕분에 대부분의 토지 지분이 아주 작게 쪼개져 있었고 그래서 넓은 공장 부지를 확보하려 각 농민들과 협상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농민들 입장에서는 토지를 버리고 다른 데로 이주할 수 있는 대안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들은 토지 수용에 완강히 버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산업체가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낮은 가격으로 사들이거나 그것조차 제대로 보상을 하지 않아 농민들의 불만이 쌓이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과감하게 토지 수용을 밀어붙일 수도 없었다.

    문제를 풀려면 공산당 정부가 직접 개입해야하는데, 보수 야당과 연정을 하는 다른 여당의 반대도 만만치 않다. 토지를 둘러싼 공업화 문제가 서벵갈 공산당 정부의 생사를 다룰 첨예한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2006년도의 일이었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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