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토론회, 이정희가 남긴 것
    [말글 칼럼] ‘싸가지’로 ‘싸가지’를 폭로하다
        2012년 12월 05일 05: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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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정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까닭은 배신감 때문입니다. 이정희가 한참 ‘잘 나갈 때’, 제 주변 사람들은 의구심을 품었지만, 저는 그가 진심으로 진보의 대표선수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후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실망으로 바뀐 거죠.

    그 때문인지 좌파진영이 둘로 쪼개진 탓인지는 몰라도 이번 토론회가 그저 시큰둥했습니다. 본방은 아예 보지도 않다가, 그래도 싶어, 막판에 봤지요. 마구 쏟아내더군요. 재방송을 모니터했습니다.

    처음엔 결과부터 따졌더랬습니다. 이게 대선판에 어떻게 작용하려나, 누구한테 이익이려나, 뭐, 이런 거였죠. 나름 계산으로는 그리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다 싶더군요.

    이정희 문재인 박근혜 후보의 첫 TV토론회(사진=국회사진기자단)

    그러는데 퍼뜩 ‘내가 왜 이걸 계산을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새 모든 걸 지금 당장의 손익을 따지는 쪽으로 생각이 굳어져 버린 거죠. 우리 정치문화, 특히 대중이 정치를 바라보는 데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데로도 생각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중적으로 돋보인 이정희

    전체적으로는 이정희가 돋보였습니다. 아니, 판을 자기 중심으로 끌어들였다고 해야겠죠. 그런데 돋보인다는 건 이중적입니다. 상대를 압도한다는 뜻과 좀 많이 튄다는 뜻으로요. 이정희는 둘 다였습니다. 이 ‘돋보임’의 효과도 이중적입니다. 누구는 열광하고, 누구는 거슬려한다는 뜻으로 말이죠.

    압도하여 열광할 만한 대목으로 저는 단연 ‘한미FTA’ 관련 발언을 꼽고 싶습니다. 평소 연구가 많이 되었고, 그만큼 자연스럽게 구체적인 말이 나옵니다. 박근혜가 제법 공부한 티낸답시고 ‘론스타는 한미FTA와 무관하다’며 은근 자랑스러워할 찰나, 곧장 ‘한미FTA를 활용할 수 있다’면서 체코 사례를 들지 않던가요. 보면서 어찌나 시원하던지요.

    그런데 그것보다 튀어서 거슬릴 법한 장면이, 조심스레 봐선지 몰라도, 더 많았습니다. 쏟아내는 말들, 당장은 알아먹기 힘든 용어들, 박근혜의 답변을 ‘됐습니다’ 한 마디로 까뭉개는 장면, 다카키 마사오,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러 나왔다는 말, 예사로 시간을 넘기고 제지 발언을 묵살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 태연함이란, 문재인이 ‘제 공수처가 박후보 방안보다 더 낫지 않냐’는데 한 마디로 ‘네’ 할 때, 문재인에 대한 태도와 박근혜를 대하는 태도의 극단적 대조, 아이한테 설명하듯이 제법 웃어가면서 타이르듯 대하는 태도…….

    아, 신이야 나지요, 후련하지요. 근데 그건 나같은 사람이나 그렇지, 이것 보는 대다수 사람들도 그럴까? 외려 시건방지다고 생각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쉽다 못해 이정희의 태생적 한계 같은 걸 느낀 건 북한 미사일 관련한 내용이었습니다.

    “북한은 실용위성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남쪽 정부, 아, 대한민국은’…”

    이라는 무의식적인 ‘실언’하며, 통진당이 ‘북한도 위성 발사의 자유 있다’고 발표한 데 대해 물었는데 10.4 선언 이행으로 뭉개고 들어가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아이고, 저게 뭐여?’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간단한 계산

    문재인에게 목숨 건 사람들 처지에서는 거의 고문과 같은 시간이었을 것 같았습니다. 이 아자씬 그저 점잔만 빼고 앉았지, 편드는 것 같은데 묘하게 우리 표 갉아먹으면서 별로 보태주는 것 같지도 않지. 안철수 눈치 보랴, 이정희 입 쳐다보랴, 참말 딱하게 됐다 싶더군요.

    그냥 얼핏 봤을 땐 안철수 지지자 중 상당수가 이정희 쪽으로 갈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니터를 하고 보니 별로 그럴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나마 진보적이면서 대선판에 염증 같은 걸 느끼던 사람들 표가 좀 몰릴 수는 있겠지만, 그 표야 어차피 문재인 표지요. 확장성 측면에서는 이번 토론회가 별로 효과를 발휘할 것 같지가 않다는 겁니다.

    토론회 직후에 다소 비판적인 글을 올렸더랬는데, 달린 ‘좋아요’ 120여개 중 49개가 페친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달린 사진을 훑어보니 대체로 젊은 분들이더군요. 제 경험상 이분들은 거개가 안철수 지지자들입니다. 나이든 안철수 지지자들은 신이 난 듯싶은데, 이들은 미안하지만 결국은 문재인 찍을 거라 봅니다. 요는 젊은 안철수 지지자들이 이정희 덕분에 문재인 쪽으로 갈 것 같지는 않다는 거지요.

    이정희가 남긴 것, 내파(內破)

    제 반성은 페친 이윤호님의 소감문을 보면서 시작됩니다. 이 글은 아래 글이 더 널리 공유되기를 바라서 썼습니다.

    “(…) 안철수 사퇴 이후 우리 모두는 이제 ‘정치적 개혁’의 의미는 뒤로한 채 오직 ‘부동층 흡수’라는 문제만이 의제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무엇이 개혁인가를 논하는 시민의 공론은 사라지고 부동층을 흡수해야 하기에 ‘쉬쉬’해야 하는 재미없는 노예적 선택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정희 후보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이 제도적 프레임을 도저히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대의제 자체가 이미 ‘귀족정’과 결코 다르지 않은, 대표자가 아닌 지도자를 뽑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가장 큰 공헌은 그 프레임을 내파시킴으로 또 다시 공론장을 만들어냅니다. 시민들이 떠들 거리, 시민들이 논할 거리를 만드는 모습을 봅니다. 싹아지 없는 도도한 젊은 여자가 나와서 많은 문제들을 던져냅니다.

    1987년 ‘백기완’후보의 TV연설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 백후보의 의도는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대통령을 만드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진정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은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와 그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는 새롭고 합리적 제도의 구축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기에 그 과정에서 시민적 공론장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그 말속에서 우리의 의구심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박근혜 후보의 저급성에 대한 폭로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곤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당신들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떠도는 말들을 봅니다. 제가 몸 사렸던 바로 그 말들,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 ‘6억원’, ‘장물로 월급 받다니’ 들이 발 없이 온갖 데를 돌아다닙니다. 퍼뜩 한밤중에 제 옆에서 이것저것 모니터하던 아들놈이 키득거리며 한 말이 떠오릅니다.

    “아빠, 애들이 이정희더러 가미가재 특공대래.”

    거기 묻어 울산과 평택과 밀양과 유성의 송전탑 농성이, 강정마을이, 강원도 골프장이, 부산 사상의 도매시장 상인의 아픔이 전해졌기를 바랍니다.

    겉으로만 멀쩡한 것 따지느라, 멀쩡하지 않은 것을 멀쩡하게 봐버리고, 거기 발맞추지 못한다고 나무란 격이 아니었던가, 반성합니다. 우리 운명을 특정 후보에게 다 맡겨 놓고 계산만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정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우리 스스로 하는 행위임을 놓친 거지요.

    진흙탕에 같이 맘껏 뒹굴어서 이곳이 진흙탕임을 밝혀준 이정희 후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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