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파가 되다
[아빠의 현대사44] "우리는 동지 이전에 형제였다..."
    2012년 12월 04일 01: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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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든 크든 / 저 나무가 저토록 잎 푸른 것은/ 뿌리가 아팠기 때문일 게다/ 보이지 않는 곳의 뿌리/ 물을 찾아서 땅 깊은 곳으로/ 돌을 스쳐 바위를 피해/ 아프지 않은 곳으로 가기 위해/ 뿌리는 많은 날을 참았을 게다/ 자기만이 아는 겹겹의 아픔을…”
(이승하 시 [회복기의 아침에] 중에서)

중앙파, 국민파, 현장파

노동자대회를 끝으로 나는 2001년 3월 민주노총을 떠나 연맹으로 복귀했다. 바로 그 직전인 1월 18일 열린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는 단병호, 유덕상, 강승규 등 3개조가 출마하여 3파전으로 치러졌다.

민주노총 안의 정파조직을 흔히 ‘중앙파’ ‘국민파’ ‘현장파’로 구분하곤 하는 데 바로 그 첫 모습이 나타난 셈이다. 중앙파는 주로 연맹이나 산별연맹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국민파는 민주노총을 만들 때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주장했다고 해서, 현장파는 주로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중심으로 활동한다고 해서 붙여진 듯하다. 이 선거 이후로 본격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걸로 기억된다.

1차 투표에서는 국민파인 강승규팀이 42%를 받고, 중앙파인 단병호 팀은 31%밖에 받지 못했으나 결선에서 25%를 얻었던 현장파로 불리는 유덕상팀의 표가 단병호위원장에게 몰리면서 역전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냉탕에서 온탕으로 마구 옮겨 다닌 기분”이라고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단병호 체제 출범을 알리는 노동과 세계 기사

선거가 끝나고 단병호 위원장은 계속 민주노총에서 일하자고 했지만 나는 연맹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민주노총 활동도 재미있고, 의미도 있긴 했지만 주로 상대하는 것이 산별연맹 위원장들이나 실무자들뿐이었다. 나는 현장의 노동자들을 더 만나고 싶었다. 공공연맹으로 돌아 온 나는 교육선전실장을 맡았다.

단병호 위원장과 민주노총에서 일하면서, 그리고 복귀하여 공공연맹에서 양경규 위원장과 일하면서 나는 어느새 중앙파가 되었다. 아니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중앙파가 되고, 무슨 행동을 하든 중앙파로서 규정되게 되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건 자연스런 흐름이었다.

지난 2010년 대전지역으로 옮겨 활동할 때 누군가 내게 “중앙파의 괴수가 여기는 웬일이냐?”고 농담할 정도였다. 그 꼬리표는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따라 다닐 것이다.

권력이 된 노동운동과 내부 경쟁

앞서 말했지만 2000년 롯데호텔에 이어 사회보험에도 경찰이 폭력적으로 투입되고, 이에 항의하는 집회가 연이어 열렸었다. 그 와중에 사회보험노조 조합원이었던 최진욱 동지가 깃대로 쓰던 낚싯대를 가지고 집회장소로 오던 중 고압선에 감전되어 사망하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 나는 영안실을 방문, 사회보험노조의 소위 1세대 활동가들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우리는 동지 이전에 형제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가 무슨 파, 무슨 파로 나뉘게 되었냐? 도대체 니들은 무슨 파냐?” 술에 취했음직한 고참 노동자가 큰 소리로 후배들을 꾸짖고 있었다. 신발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

보통의 대규모 사업장엔 각종 파벌은 물론 집행부 기수에 따라 각종 모임이 구성되기도 하고 있었다. 주로 선거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고, 때로는 격렬한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 노동운동을 한다고 울산에 내려가 있던 90년대 초, 현대자동차 노조엔 4~5개의 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게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나기도 했다.

“파로 나눠지는 게 문제가 아니다. 예전처럼 노조 집행부가 되는 게 구속을 각오하고, 희생이 되는 시기가 아니다. 노동조합은 권력이 되었다. 이 권력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노조의 미래는 물론 사회를 바꾸는 방법이 달라진다. 따라서 이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있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룰(rule)을 만드는 거다. 때론 경쟁하고, 대결하고, 협력하면서 그 권력이 노동자 전체를 위해 쓰이도록 만드는 룰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라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열심히 말했지만 그다지 깊은 이해를 구하지 못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는 정파(政派)를 ‘악의 축’이라고도 했다. 선거 때 아예 정파 청산을 공약으로 내건 후보도 있을 정도다. 이해가 되는 측면이 많다. 노동현장은 갈가리 찢겨지고, 공통의 이익보다는 정파의 이익을 앞세운 활동으로 인해 진보정당도 망가졌다. 민주노총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모든 원망과 비난이 정파로 돌아가는 게 자연스럽다. 대중적으로 볼 때 큰 차이도 없는 조직이 ‘현장’을 앞세우고, 오로지 권력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될 때 조합원의 마음은 그로부터 멀어진다. 당과 총연맹의 성장보다는 자기 조직의 이익을 우선할 때 많은 무리가 생기고,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생길 때 정파는 악의 축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정파를 모두 없앤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아니 없어지기나 할 까? 각 정파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다시한번 하기로 하자.

한국통신 투쟁,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연맹으로 돌아오기 전에도 많은 투쟁이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2000년 말에 있었던 한국통신의 4박 5일 명동성당에서의 총파업이었다. 정부와 사측이 3천여명 이상을 정리해고하려는 등 구조조정에 나서자 조합원 7천여 명이 총파업에 돌입 저녁 8시부터 명동성당으로 집결했다. ‘강제 명예퇴직과 일방적 구조조정 중단, 완전민영화 반대’를 요구하는 총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경찰은 명동성당을 완전 포위하고 난방용 천막을 물론 심지어 간이화장실조차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 겨울추위를 비닐 한 장에 의지하며 투쟁을 해야만 했다. 특히 여성 조합원들은 경찰의 비인간적인 처사로 생리현상 해결을 위해 1~2시간씩 줄을 서야 하는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간이화장실이 반입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며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다. 인간적인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한편 이즈음 한국통신계약직노조도 투쟁에 돌입했다. 한국통신은 구조조정을 조속한 시일 내에 마무리하고자 전화국에 근무하는 계약직노동자들을 6000여명을 대상으로 계약 해지를 통보했던 것이다.

비정규직 투쟁의 본격적인 서막을 연 투쟁은 전국 각지에서 해고통보를 받은 조합원 2000여명이 12월 4일 오전 신설동 서울 번호 안내국 앞에서 집회를 하고 동대문전화국까지 가두행진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한겨울 한파 속의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사진=참세상)

그 이후부터 517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의 투쟁이 시작된다. 말이 517일이지 근 1년하고도 반 정도를 투쟁한 것이다. 한국통신노조가 명동성당 파업에 들어가자 비정규직노동자들도 연대하기 위해 찾았지만 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를 거부하기도 했었다. 정규직노동자들이 연대를 거부한 셈이다. 나중에 비정규직노조 홍준표위원장은 회고를 통해 이때의 기억이 ‘가장 큰 아픔’이었다고 했다.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처절했다. 마침 16년 만에 엄습한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본사 앞 노숙 투쟁으로 인해 대전충남본부 이동구 조합원이 추위에 쓰러져 오른팔과 다리 등 반신마비 증세를 보여 후송되기도 했다. 한강대교 5M 난간 위를 올라가서 현수막을 펼치기도 했고, 새벽 3시 조합원 180여명이 목동 전화국을 점거하여 농성하기도 했고,

한강철교 부근 데이콤 용산지부 앞에서 8차선을 횡단하는 광케이블에 매달려 “비정규직 양산하는 진자유주의 구조조정 반대”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내리고 목숨을 건 고공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본회의가 진행 중이던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에서 “한국통신계약직노조 현안문제, 정부는 즉각 해결하라”라고 적힌 현수막을 걸고 1층 본회의장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투쟁과정에서 언어장애가 발생한 사람도 있고, 돌아가신 분도 있다. 이 투쟁은 2002년 5월 4일 회사 측의 보상액 지급, 도급업체 취업, 3년간 고용보장 등의 내용으로 끝난다.

이후 2007년 철도노조가 비정규직인 KTX 승무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투쟁을 한 데 비해 한국통신 정규직노동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결국 한국통신은 KT로 이름을 바꾸고 민영화되었다.

장기투쟁을 두고는 무엇이 이긴 것이고, 무엇이 진 것인지를 얘기하긴 어렵다.

다만 십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여전히 그렇게 투쟁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음을 기억해두자. 혹은 투쟁이 승리하고 있다면 앞서 투쟁한 수많은 선배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음을 잊지 말자. 네가 만약 비정규직이 되었을 때 조그만 권리라도 주어진 게 있다면 누군가 앞서 간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자.

 

필자소개
이근원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을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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