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성'으로 지어진 집
    [서평]『엄마의 집』(전경린 /열림원)
        2012년 12월 01일 04: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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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에서 ‘여성’ 로 태어나 이십여년간 자라왔다. 엄마-아빠와 두 자식으로 이루어진 ‘정상’ 가족 구성 속에서 막내딸 역할을 불성실하게나마 맡아가며 부모님의 ‘애정’ 이라는 이름의 짐을 어깨에 얹어야 했다.

    스무 살이 넘어서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었다. 관련 수업을 듣고 책도 뒤적거리면서 미흡하게 배운 여성주의는 나에게 ‘화목한 가정’ 혹은 ‘정상가족’은 허구적이라고 속삭였다. 사회를 유지하는 가족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식’ · ‘엄마’라는 역할이 규정되고 그 역할의 수행 정도가 사회의 행복 · 명예 등을 판단하는 사회적 기준이 된다고 알려줬다.

    ‘정상가족’의 특혜와 의무를 양 손에 쥐고 20여년을 살아온 나에게 여성주의의 속삭임은 자유와 죄책감을 동시에 건네줬다. 자유와 죄책감은 ‘모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했다고 알려지나, 세대와 시대를 거쳐 당연히 이어져왔으므로 이제는 ‘천성’이 되어버린 것이 바로 모성이다. ‘모성’은 여성주의적 논의 속에서는 허구적이지만 주변에 ‘존재’한다.

    가족에 관한 개인사를 늘어놓으면서 ‘모성’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은, 전경린의 소설 <엄마의 집>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이혼한 엄마와 함께 살아온 딸 ‘호은’은 대학생이 되자 엄마 ‘윤지’의 집을 나와 대학 기숙사에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은에게 새엄마의 딸 ‘승지’가 배달되고 호은은 친엄마에게 이혼한 남편의 의붓딸을 맡기는 상황에 놓인다. 그렇게 호은은 윤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윤지는 호은, 승지와 애완 토끼 ‘제비꽃’은 짧은 시간 새로운 ‘가족’을 이룬다.

    윤지는 사실상 ‘남의 딸’인 승지의 등장에 당혹해 하지만 자신을 먼 친척쯤으로 생각하고, 친척집에 왔다고 여기라며 승지를 다독인다. 윤지가 승지를 위해 아침밥을 준비하는 것에 익숙해 질 때쯤, 승지는 제 위치로 돌아간다.

    “난 승지의 엄마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제비꽃의 엄마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잠깐의 ‘가족놀이’가 끝난 뒤 각자는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제각각의 삶을 영위하던 어느 날, 호은은 문득 윤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윤지는 “내가 엄마라는 것” 이라고 답한 뒤, 자신은 호은의 엄마일 뿐 아니라 승지의 엄마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노라, 뿐만 아니라 제비꽃의 엄마도 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덧붙인다.

    윤지가 자신의 첫 번째 정체성으로 ‘엄마’를 내뱉게 된 연유는 승지나 제비꽃에 대한 연민과 애정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녀의 정체성에는 ‘엄마’라기보다는 ‘모성’이란 어휘가 더 적절하다. 이혼한 뒤 집을 마련하고 살림을 꾸리기 위해 밥벌이에 헌신해야 했던 그녀의 삶에서 ‘모성’은 삶을 지탱하기 위해 택한 방식에 가깝다.

    자신을 연민하고 긍정하기 위해 모든 생물체와 세상을 긍정하고 끌어안기로 결심한 것이다. ‘시시하고 고약한 사람들’에게나, ‘지리멸렬하고 역겨운 일에 처했을 때’나 그녀는 세상을 이해하고 끌어안기 위해 이렇게 읊조린다. “내가 네 엄마다.”

     “난 타락하지 않을 거야. 그게 내 목표야.“

    자신을 낳은 엄마가 죽고, 가난하고 방랑벽이 있는 의붓아버지와 지내온 승지는 타락하지 않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타락하지 않을거야” 라는 승지의 말은 친엄마의 죽음, 가난한 의붓아버지와의 삶 속에서 ‘그럼에도 생존을 위해 살진 않겠다’는 결심이다.

    어린 소녀는 의붓아버지의 전처의 집에 버려질 때도 반항하는 대신, 학교를 빠지고 서점에서 책을 읽으면서 세상과 거리를 둔다.

    그런 승지의 기준에서 윤지는 ‘타락했다.’ 윤지가 모성애로 세상을 끌어안는 것을 승지는 ‘타락’으로 여긴다. 윤지는 생계를 잇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바람과 먼지를 맞으면서 ‘모성애’로 시련을 덮지만, 이것이 승지의 관점에서는 생존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며 자신을 위안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윤지의 ‘엄마’라는 정체성은 기만적이고 허구적이다.

    부모님이 서로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 후, “너 때문에 산다” 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종종 부담감과 의아함을 느끼곤 했다. 그토록 나를 사랑하지만, 결국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 면서 나의 어머니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 있던 것이다.

    나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세상의 ‘엄마’들은 지구라는 별에 태어나 자라나면서 ‘모성’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믿게 되었다. 윤지가 그러했듯 이 믿음은 세상의 엄마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모성’이 여전히 많은 이들이 삶을 지탱하기에 의 허구성을 지적하기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불현듯, ‘엄마’가 된 승지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타락하지 않은 승지가 품는 ‘자식에 대한 애정’은 무엇이라 불릴까.

    필자소개
    연세편집위원회 summerly@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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