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스타일 현상’과 대안문화 모색
    [기고] 박노자, 남종석, 토리님의 강남스타일 토론에 대한 보론
        2012년 11월 28일 10: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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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고백한다. 이미 다른 분들이 일장연설을 하고 내려간 연단, 그러니까 홍세화 선생의 표현을 빌면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뒤따라 오르는 기분이다. 예기치 못한 소환에 응하고 쭈뼛거리는 이유가 둘 있었다.

    첫째 이유는 박노자, 남종석, 토리님은 강조점을 달리 찍었을 뿐 대의에는 동의하고 있으며, 흔한 말로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박한 세뇌”를 시작으로 “욕망의 구조”를 거쳐 “대안문화”로 전개된 마당에 각주 하나 보태는 셈치고 보론 하나 얹는 일이 무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자주 등장하는 ‘문화’와 ‘예술’의 자리에 다른 단어를 넣어 읽으며 사유할 수 있는 논의이기도 하다.

    ‘강남스타일’보다 ‘강남스타일 현상’을

    발단이 된 ‘강남스타일’의 징후 혹은 위험성, 그리고 의미 혹은 무의미에 대해선 다양한 시각에서 충분히 이야기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의아하게도 아직 언급되지 않은 측면이 있는데, 바로 ‘현상’이다. ‘강남스타일’이 세계적 화제가 된 이유는, 긍정의 의미든 부정의 의미든, 에너지와 유머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자기희화에도 불구하고 강남 부잣집 도련님인 싸이가 월드스타가 되어 ‘국민’의 응원을 받고 있다. 얼마 전까지 병역문제로 공적이 되어 두 번이나 군대를 다녀와야 했던 싸이는 돌연 영웅이 되어 시청 앞 광장으로 초대받더니 훈장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노래와 뮤직비디오보다 이 ‘한국적 현상’이 더 우습지 않은가?

    더 많이 회자되는 현상은 다음이다. 현재 ‘강남스타일’의 유투브 조회수가 8억 하고도 수백만 회에 이르렀다. 박노자 선생의 아들까지 가사를 외워 불러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는 지경이다.

    얼마 전에 노르웨이의 테러용의자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가 한국을 이상적인 보수사회이자 민족주의 국가라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명박씨를 만나고 싶은 인물들 중 한 명으로 꼽아 대통령까지 한류스타 대열에 동참시켜준 그가 싸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은 ‘강남스타일’의 성공이 한류산업의 플랫폼을 발판으로 삼기는 했으나 자본의 파상공세와 유력 미디어의 세뇌공작으로 촉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강남스타일’ 자체의 내용보다 현상이 주목받았고, ‘강남스타일’은 싸이가 주인공이 아니라 SNS를 이용하여 확산과 공유의 놀이를 즐긴 다중이 주인공이었다.

    나도원 음악평론가

    이렇게 운을 떼었으니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새로운 문화의 전유 가능성에 대하여 열띤 주장을 펼칠 차례겠지만, 미안하게도 논지는 그 반대이다. 불과 몇 해 전까지, 아니 몇 달 전까지 트위터와 팟캐스트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겸손하게 소리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겸손대로 벌써 수십 년 전의 철 지난 이론처럼 들린다.

    디지털 기반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대한 환상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서울을 사수하겠노라는 이승만의 담화만큼만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새로이 계정을 만들고 끊임없이 ‘새로 고침’을 해도 기성 시스템에 의존하고 기성 시스템이 정한 프레임에 따라 판단하는 정도까지만 허락되는 사이버 민주주의를 사이비 민주주의로 폄훼할 의도는 없다. 다만 마법은 없다는 것이다.

    참여적인 놀이문화의 가능성도 현재로선 유보적이다. 애비 호프만(Abbie Hoffman)과 앨런 긴스버그(Allen Ginsberg)가 1967년에 반전운동의 일환으로 행했다는 ‘프랭크스터’는 지금 ‘플래시몹’과 같은 놀이, 그마저도 종종 상품광고로 활용되는 놀이가 되어버렸다. 수동형을 양산하는 소비문화시대에는 무언가 새롭고 핫한 것들도 적극적 소비자주의 안에서 맴돌고 만다.

    앞서 논의된 ‘욕망’을 이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요즘 혼용(혹은 혼동)하여 자주 쓰이는 단어가 욕망이다(대개는 욕구가 적절해 보인다). 한때 욕망을 긍정하자는 주장이 있었고, 지금도 주변에서 욕망을 긍정하겠노라는 좌파를 보곤 한다.

    그러나 식칼을 갖고 노는 아이 같은 현대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욕망에 욕망으로 맞서 해결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러다보면 소·돼지·닭을 먹지 않겠다며 말·사슴·꿩을 잡아먹는 채식주의자가 되어버린다. 남종석 선생의 욕망 긍정 내지 욕망 인정에 반대하여 좌파 수도승이 되자는 말이 아니라,

    혹자들이 구별하지도 않고 남용하는 욕망과 욕구에 대한 문제제기다. 결국 ‘강남스타일’보다 ‘강남스타일 현상’에 주목하는 편이 더 많은 이야기를 던져줄 수 있지만, 재미없게도 미리 결론을 내려버리면 이 역시 현상 파악 이상을 기대하긴 힘들다. 왜냐하면 ‘강남스타일’ 자체가 파악할 현상 이상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대중예술

    이쯤 되면 박노자 선생의 거시적 담론에 동조하는 것처럼 비춰질지 모르겠다. 동의는 하나 미시적인 판결(?)에까지 동조하진 않는다. ‘강남스타일’도, SNS의 한계도, 욕망의 식민성도, 소비군중으로의 난민화도 자본주의가 잉태하고 재생산하는 문제로 귀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환원론에 가까운 근본의 제기는 혹자들에게 구태의연하게 보일 수도 있다. 이 사회의 부조리와 문제 상황을 모조리 신자유주의 내지 지구온난화 탓으로 돌리는 태도는 정말 명확한 설명이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박노자 선생의 ‘강남스타일’ 비판이 정당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하고 있음에도 ‘강남스타일’에 대한 별다른 해석을 제공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대중문화산업의 주류가 인간 내면을 파고드는 시장논리와 감성의 식민화를 완성시킨다는 것은 자명하다. 오늘날의 대중은 소비자를 말하고, 많은 소비자의 선택이 시장성이기에 대중성과 시장성의 등치가 이루어졌으며, 대중성과 상업성은 이음동의어처럼 사용된다는 사실은 끊임없이 환기시켜도 과하지 않다.

    남종석 선생이 지적한 “대량소비를 위한 취향의 획일화”는 적절한 분석이다. 이는 ‘취향의 통합 = 진실의 은폐’라는 등식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동시에 “(대안적) 시도들의 출발점은 바로 기존의 상업적인, 자본 중심의 ‘문화’와의 거리두기이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박노자 선생의 고민 역시 지당하다. 그 대안을 어디에서 찾을지에 대한 의견, 그러니까 현실과 본질 사이에서 무게추를 어디에 걸어두는가에서 나름의 선택을 했다고 본다.

    사실 대학의 청년문화만 상업문화에 종속되고 대중의 문화욕망만이 소비욕구로 대체된 것은 아니다. 노동문화/진보예술의 장 또한 급격히 축소되었고, 창작집단에선 젊은 피의 수혈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으며, 여기에 유통/수용집단의 변화는 결정타를 날렸다. 대형 노동조합들마저 자체 노동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문화행사 하나 스스로 기획하지 못해서 행사기획사에 의뢰하여 ‘액수’에 따라 노래패와 민중가수를 섭외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심지어 민주노총의 문화국에는 장기간 상근자가 공석인 상태여서 보다 못한 문화활동가들이 연명서를 돌리는 판국이다. 어느 진보매체가 민중가요를 무단으로 짜깁기해 판매한 사건은 예술노동과 작품의 가치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희박하고, 문화운동을 여전히 도구화하는 수준에서 낙후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한국의 노동현실과 맞물려 조직된 노동조합 구성원들의 연령대가 높아지기만 하다 보니 새로운 문화자극도 미미해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풀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앞의 글들에선 대중문화와 예술, 대중예술이라는 용어에 위계가 부여되고 있으며, 대중문화와 대중음악이 혼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문화=소비문화’란 인식이 배타하는 태도를 낳은 적이 있다. 문화제국주의의 관점에서 자기검열도 했다. 박정희 정권도 팝과 록을 외래·퇴폐문화라며 정화하려 애썼으니 아이러니다.

    그런데 아직도 대중문화․대중음악이 오해받고 있다. 주류의 문화상품만을 극히 제한적으로 접하는 수동적 소비군중의 수준으로 대중음악을 말하는 경우를 간혹 보게 된다. 그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삼성이 한국 기업문화의 대변자인가. 게다가 음악은 자본주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놓였을 뿐이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발명전부터, 음반의 출현 훨씬 전부터 음악은 있어왔다. 자본주의 하의 현상이라고 모두 그 산물은 아니다. 또한 그중 상당수는 (정치에서처럼) 거푸집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양한 시도를 감행해왔다. 그래서 “대중의 생산 참여와 주체화”와 “대중문화의 가능성”에 대한 남종석 선생의 글은 대중예술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기에 반갑다.

    이것이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라 마이크 잡기를 꺼려한 둘째 이유이다. 세계의 대중예술(대중문화 대신 대중예술로 칭하고자 한다) 종사자들이 아무 고민 없이 자본주의와 시장논리에 투항하며 살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자본주의 이전부터 흘러온 피를 이어받은 자들이다. 오래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치열한 논쟁과 연구, 그리고 각자의 고민과 답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현재 대중예술과 노동문화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의 관계일 수밖에 없고,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대중문화-시민문화-지역문화의 상호보완 구도와도 비슷하다.

    제도 바깥의 대안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타자를 부정하는 것은 아주 분명한 해법이지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물론 박노자 선생도 합법-대중운동, 그것도 20년 전에 TV에 출연하고 방송인기곡 상위권에 대표곡들을 밀어올린 ‘노찾사’를 예로 들었으니 근본주의의 입장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반동의 동반자

    실제로 한국에서 콜트콜텍, 4대강사업, 제주 강정, 용산, 그리고 두리반과 명동 마리에서 젊은 대중음악인들을 만나기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듣게 된다면 자신의 변기를 업그레이드 해야겠다고 마음먹을지도 모를 정도로 발칙하고 불온한 음악들도 쏟아지고 있다. 더구나 대중문화라 칭한 대중음악, 한국에서 왜곡된 주류가 아닌 역사적으로는 주류인 록과 포크와 블루스의 전통이 어떠한지는 상식에 가깝다.

    재능농성장에서 공연하는 '콜밴'(사진=참세상)

    문학평론가 김현은 1970년에 “진정한 예술은 삶과 현실의 모순을 제기하고, 그러한 모순을 개인의 의식 속에 존재시킴으로써 그 개인을 고문한다”고 썼지만, 같은 글에 마르크스(Karl Marx)가 “반동적 사고에도 불구하고” 발자크(Honore de Balzac)를 혁명적 작가보다 더 극찬했으며 “작가가 그의 정치적 의도를 숨기면 숨길수록 작품을 위해선 더 좋다”는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말까지 실어 놓는 대담함을 보였다. 재미있게도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이 결성한 밴드인 ‘콜밴’이 연주하는 곡들 중 상당수는 대중가요이다. 그들 역시 환영받는다. 이러한 내용과 활동의 교섭 혹은 배치에도 불구하고 공존하는 상황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있다.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진정한 해악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의 체계적인 분리에 있다. 과거에 예술의 생산자는 특별한 누가 아니었다. 소수에게 그 임무가 주어진 것은 대중예술의 산업화 이후에 생긴 변화이다. 그러면서 많은 것들이 서로 떨어져 나갔다. 분리가속기의 동력은 정치사회권력을 대신한 시장권력이 제공하고 있다. 그렇기에 주객분리를 의심하고 자본의 힘과 시스템에 대한 순응을 강요하는 시장논리를 극복하려는, 다른 시스템에 대한 시도가 존재해야 한다. 여기에 모두 의견이 일치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활동은 여러 방면에서 추동될 수 있다는 데에도 합의해야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 주체와 객체, 현실과 예술이 분리된 시대에 창작의 주체성과 수용·향유의 주체성을 자극하는 시도, (출신성분이 어떠하든) 그것을 가능케 할 시스템 구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 이상의 조건을 위한 최소한의 구체방안들이 ‘4․11 총선 진보신당 문화예술정책공약’, ‘제18대 대통령선거 문화정책 100대과제’, ‘예술인소셜유니온 질문들에 답하다’를 비롯한 ‘예술인소셜유니온’ 관련 발표문들에 삽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나야 한다. 모호한 통합이나 포섭이 아니라 대안을 모색하는, 정치로 말하면 정체성이 분명한 이들을 전제로 한다. 대중예술동네를 애정을 갖고 지켜봐온 사람이라면 그러한 이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강남스타일’에도 토리님의 말대로 “비판적 거리두기”가 가능했다.

    당위와 사명감만 떠안기고 민중예술인을 향한 존중에는 무심했던 운동문화 속에서도 제 자리를 지켜온 이들이 있다. 각각의 움직임이 만날 때에 남미의 노래운동 ‘누에바 칸시온’과 태국의 ‘플렝 푸아 치윗’의 또 다른 버전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무엇보다 대중예술과 대안문화을 만들어갈 ‘사람’을 직시해야 한다. 공적 기반이 제공되어야 생존하면서 가능성을 현실로 바꿀 시간을 벌 수 있다. 착취구조 속의 예술노동의 가치를 강조하고 예술인복지를 주장하는 이유들 중 하나이다. 지금도 ‘소와 바꾼 잭의 콩’은 자라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생기어린 반항과 치열한 저항이 반동의 동반자로 만나 희망을 전망으로 바꾸도록 지지하는 것이다.

    필자소개
    음악평론가. 진보신당 문화예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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