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출발? 과거의 답습?
    중국공산당 18차 대표대회 결산
    [중국과 중국인]당 서기,국가 주석,군사위 주석 모두 사퇴한 후진타오
        2012년 11월 27일 10: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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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5일 중국의 향후 5년을 책임질 새로운 지도부가 선출되었다. 굳이 5년이라고 언급한 것은 시진핑과 리커챵을 제외한 다섯 명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당의 직무에 관한 연령 규정에 의해 5년 후에 개최될 19차 당 대회에서 모두 은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당초 시진핑과 리커챵의 쌍두마차를 지원할 젊고 개혁적인 인사 한 두 명이 더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해 시진핑-리커챵 체제의 10년을 함께 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이들이 모두 탈락하고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이도 많고 보수적인 인물들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대거 선출됨으로써 시진핑-리커챵의 적극적인 행보에도 적지 않은 부담을 주는 동시에 이제 막 출범한 시진핑-리커챵 체제가 10년 동안의 장기적인 계획과 집행보다는 단기 목표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연초의 보시라이 사건과 이와 관련된 중앙정법위 서기 조우용캉의 권력 축소로 인해 후진타오의 공청단이 중심이 된 개혁파가 정치국 상무위원의 다수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이런 결과를 두고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는데, 쟝쩌민 개인의 정치적 승리라기보다는, 특히 보시라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개혁파의 지나치게 엄격한 책임 추궁이 보시라이의 부친 보이보(薄一波, 혁명에 참가했고 건국 후 부총리를 지냈으며 2007년 사망)와 함께 활동했던 당 원로들의 반발을 유발했으며, 그 결과 현재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혁명 유가족들에 대한 개혁파의 공세를 차단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인물들이 개혁파를 밀어내고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분석이 더 유력하다.

    후진타오 전 서기와 시진핑 서기

    정치 분야에서 후진타오에게 가장 큰 타격은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있다가 최근 통일전선부 부장에 임명된 최측근 링지화(令计划)가 정치국에도 진입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17년 동안 후진타오의 그림자가 되어 그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했고 엄격하고 치밀한 일처리로 정평이 난 링지화는 올 해 초와 중반에 진행된 당내 투표에서도 상위권에 진입해 정치국상무위원 진입도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았지만, 아들의 교통사고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의 실수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정치국 진입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정치국 상무위원의 역할 분배에서 특이한 점은 중앙기율검사위(中央纪律检查委员会, 중국공산당의 최고 사법감찰 기구) 서기에 왕치샨(王岐山)이 임명된 점인데, 경제부총리로서 금융과 경제정책의 전문가인 그가 이제까지의 경력과 전현 무관한 중앙기율검사위 서기에 임명된 사실이다.

    여전히 중국공산당이 여러 세력 간의 타협에 의한 정치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점인데, 그의 임명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전임 부총리(야오이린-姚依林)의 사위여서 태자당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의 경력을 살펴보면 파벌 색채가 뚜렷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주롱지(朱镕基, 쟝쩌민 시대의 총리)에 의해 경제 관료로 발탁되어 능력을 인정받은 왕치샨은 2003년 사스(SARS)가 베이징을 강타했을 때 책임을 지고 사퇴한 후진타오 직계(멍슈에농-孟学农)의 후임으로 베이징에 입성한 후, 베이징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관리해 후진타오에게도 신임을 얻었으며 그로 인해 2008년에 금융과 경제정책을 책임지는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과감한 추진력을 갖춘 그가 경제부총리 신분으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면 상대적으로 일처리가 조용한 총리 내정자 리커챵과 마찰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관측이 존재했다. 따라서 그의 직무 전환은 정치국 상무위원회 내부에서의 이런 예상 가능한 충돌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수 있다.

    둘째, 기율검사위는 지난 10년 동안 샹하이방 인사들이 독점해 왔지만 급증하는 고위층의 부정부패는 민중들의 불만을 심화시켰으며 따라서 강직한 성격에 추진력까지 겸비한 왕치샨을 반부패 투쟁의 책임자로 임명해 반부패 투쟁을 강화하여 민중들의 불만을 불식시키고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분석이다.

    시진핑에게 당 중앙군사위 주석까지 함께 넘겨준 후진타오의 전면 퇴진이 이번 18차 중국공산당 대회의 가장 큰 화제가 되었다.

    정치 분야와는 달리 최근 군부의 동향은 후진타오가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었다. 최고위 지휘부의 충성 선언이 잇따랐고, 당 대회 개최 직전에 진행된 몇 차례의 군부 인사(과거와 달리 당 대회 개최 직전 두 명의 신임 부주석이 임명되었고, 이로 인해 비록 며칠 동안이기는 했지만 전례 없는 다섯 명의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존재했으며, 총참모부, 총정치부 등의 요직에 전격적으로 자신의 측근들을 임명)를 후진타오가 주도했기 때문에 쟝쩌민의 선례를 쫓아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2년 정도 더 보유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빠오통(鲍彤, 중공중앙정치개혁연구실 주임 역임. 후야오방(胡耀邦)과 함께 개혁파의 선두 주자였던 짜오즈양(赵紫阳)의 정치비서)은 후진타오의 전면 퇴진(당 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주석)을 중국공산당 창당 이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면서 마오쩌뚱의 혁명과 떵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보다 높게 평가했으며, 적지 않은 중국 전문가들 역시 그의 전면 퇴진이 중국정치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된 당 원로들의 수렴청정에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정치국 상무위원 쟁탈전에서 패배한 후 퇴임 후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그랬든지 또는 쟝쩌민으로 상징되는 당 원로들의 끊임없는 간섭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그랬든지, 후진타오의 전면 퇴진은 중국정치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마오쩌뚱은 죽을 때까지 권력을 쥐고 있었고, 떵샤오핑과 쟝쩌민은 퇴임 후에도 상당기간 중앙군사위주석 직을 갖고 있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이들 최고 지도자들만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아니다. 혁명 1세대들은 당연히 창업주로서의 권력을 죽을 때까지 행사했고 떵샤오핑 시대에는 중앙고문위원회(中央顾问委员会, 1982-1992)가 설치되어 공식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앙고문위원회의 폐지 이후에도, 공식 기구는 없지만 당 원로들의 간섭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했던 인사들은 주요 인사와 정책에 대해 제안 또는 거부권을 행사해왔다. 다만 이번 18차 대회에서처럼 많은 원로들이 공개적으로 서로 다른 견해를 표명한 적은 없었다.

    비록 후진타오가 전면 퇴진했지만 그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면 여러 경로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그는 당 역사상 최초로 권력을 전면 이양했으며, 이러한 상징성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중요하다.

    또 정치국상무위원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상당수의 공청단 출신 인물들이 차기 정치국상무위원 후보에 근접해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들 대다수가 후진타오 집권기에 발탁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최후 보루인 군부에도 그의 확실한 직계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그도 마음만 먹으면 쟝쩌민처럼 여러 경로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전면 퇴진을 빠오통처럼 중국공산당 역사상 가장 위대한 행동으로 평가하는 것에 선뜻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퇴임 후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행동으로 폄하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이미 그가 90년이 넘는 중국공산당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는 점이다. 온전히 지켜내는 것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그의 몫일 것이다.

    필자소개
    중국의 현대정치를 전공한 연구자. 한국 진보정당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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