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공산당 그들도 우리처럼...
    총선승리 후 정파갈등, 부패로 참패
    [현대 인도인민의 역사] 께랄라, 공산당 정부 세우다 ③
        2012년 11월 26일 03: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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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인도 총선은 몇 가지 중요한 정치적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가장 큰 의의는 한국인들에게는 브릭스(BRICs)라는 이름으로 신흥 경제 대국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그 ‘빛나는 인도’의 경제 발전을 국민들이 거부했다는 것이다. 경제 발전도 좋지만 신지유주의 때문에 생긴 사회 양극화가 더 심각하니 후자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자를 거부한다고 국민들이 판단한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인도국민당이 강하게 밀어붙인 힌두 근본주의 정치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선교사 가족을 살해하고, 무슬림을 집단 학살하고, 기존의 역사 교과서를 공산주의에 물든 것으로 치부하여 힌두 민족 정신을 살려야 한다면서 교육 체계를 힌두화 하려는 우익 반동의 역사를 국민들이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세 번째의 의미는 이 두 가지 의미를 추동하는 힘으로 공산당 계열의 좌파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노력을 국민들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2004년 총선에서 좌익 정당들은 독립 이후 최다 의석을 확보하였다. 비록 좌파들이 사분오열 되어 있지만, 분열 그 자체를 실패의 원천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각자도생 하면서 큰 틀에서 연정을 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분열이라는 게 꼭 좌파 진영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좌파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투쟁을 할 것인지가 아니고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인가이다.

    선거 내내 공산당(M)을 비롯한 전국의 좌익 정당들은 각 지역에서 회의당과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정책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고, 그 비판의 수위는 매우 높았다.

    하지만 선거가 끝난 후 그들은 회의당이 새로 정부를 구성하는 연정에 적극적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새 정부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단지 외부에서 지지하기로 했을 뿐이다. 지역 주민의 정서를 통한 대중 기반을 고려한 정치적 결정이다. 이러한 정치적 결정이 중요한 것은 차기 정부가 정책을 만드는데 자신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겠다는 의도를 갖기 때문이다.

    사실, 좌익 정당들은 경제 부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부문에서 회의당과 매우 큰 정책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2년 뒤에는 가장 중요한 지역인 께랄라와 서벵갈에서 주 의회 선거가 치러지게 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회의당과 피 말리는 경쟁을 해야 한다.

    따라서 연정은 구성하되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여 비판의 입장을 계속 가져야만 한다. 좌익 정당들은 연정에 대해 책임은 지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최대한 행사할 수 있는 절묘한 정치적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정을 구성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좌익 정당들과 회의당 그리고 그외 연정을 구성하는 모든 세력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장치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최소강령(Common Minimum Programme)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 장치를 통해 좌익 정당들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 하려 할 것이고, 그러한 입장은 다른 정당에게도 똑같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 자체를 만들어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최소한의 장치에서 결정적인 현격한 차이는 경제 정책에서 발생한다.

    회의당은 이전의 인도국민당의 신자유주의 경제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폐기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좌익 정당들은 회의당이 추진하려는 경제 개방 및 민영화 그리고 기본적인 반(反)노동자 시각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거둘 수는 없다. 양자가 충돌할 수밖에 없지만, 서로 충돌하여 연정이 깨지면 양 쪽 다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고, 그 사이에서 힌두 근본주의와 더 강력한 신자유주의를 추동하는 보수 반동 세력만 이득을 챙기기 때문이다.

    회의당은 경제 개혁을 원하고, 공산당은 정부 통제를 원하는 사이에서 양자는 정치적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양자만 있는 게 아니고 하층 카스트를 주요 기반으로 하는 정당 등 여러 세력들이 모두 합의해야 한다. 인도라는 나라가 안정된 것은 이렇듯 정치가 절묘하게 전개되면서 그렇게 복잡한 상황에서 뭔가가 도출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인도는 한국과는 그 수준이 다른 정치 선진국이다. 그들이 ‘모두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하는 문서’로서 만든 공동최소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사회적 조화를 유지, 보호하고 증진시키며 사회적 우호와 평화를 방해하려는 모든 반(反)계몽주의적, 근본주의적 요소들을 다루기 위해 편파적이지 않게 법을 집행한다.

    2. 앞으로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매년 최소한 7~8%의 성장률을 유지하고 또한 모든 가정이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는 생활을 보장하도록 고용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경제가 운영되도록 보장한다.

    3. 농민, 농업노동자 및 근로자들, 특히 비조직 부문 노동자들의 복지 및 행복을 증진시키고, 모든 측면에서 그들의 가족에게 안전한 미래를 보장한다.

    4. 여성들에게 정치적, 교육적, 경제적 및 법적으로 완전한 권능을 부여한다.

    5. 지정카스트(=흔히 말하는 불가촉천민. 정부에서 지정하여 여러 가지 부문에서 쿼터(quota)를 주어 보호한다. 이른바 보호를 위한 차별 정책에 따른 것이다.), 지정부족민, 여타후진계급(=과거의 슈드라 즉 불가촉천민 위에 위치해 있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차별을 크게 받아 온 계급을 정부가 보호하기 위해 지정한 것이다) 및 종교적 소수자들에게 교육 및 고용을 비롯한 각 부문에서의 기회 균등을 완벽하게 부여한다.

    6. 기업인, 사업가, 과학자, 기술자 및 기타 모든 전문가들의 창조적 힘과 사회적 생산력을 최대한 나타내게 한다.

    2004년 총선에서 사상 초유의 승리를 맛 본 인도의 좌파 진영은 2009년 선거에서 인도 전역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

    인도공산당(M)은 께랄라에서 전체 20개 선거구 가운데 단 4석밖에 차지하지 못해 이전에 비해 무려 11석을 잃는 결과를 맛보았다. 그리고 1977년 이래로 단 한 번도 정권을 내주지 않은 서벵갈 주에서는 인도공산당(M)이 참패하고 정권을 내주었다. 좌파 진영이 몰락했다.

    2012년 당대회에서 인동공산당(M) 서기로 선출된 Prakash Karat

    인도공산당(M)이 몰락한 께랄라에서는 회의당이 전체 20석에서 16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011년 4월에 실시한 주의회 선거에서도 공산당(M)이 이끄는 좌파전선은 전체 140 개 의석에서 67석을 차지하고, 회의당이 이끄는 통일진보연합에게 73석을 내줌으로써 주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2004년 총선과 그 2년 뒤 2006년 주의회 선거에서까지 압승을 거둔 인도공산당(M)이 께랄라에서 그렇게 참패를 거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인도가 실로 오랜만에 그 동안 선거판을 흔들었던 3대 이슈가 사라졌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부터 20여년 동안 인도의 선거는 힌두 근본주의를 내걸어 반(反)파키스탄-이슬람의 기치 아래 치러진 종교공동체주의의 선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사이 인도국민당은 과거에는 존재조차 미미했던 상태에서 일약 집권당이 되었으나 계속된 정치 자극에 국민들이 염증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선거 바람이 사라졌다. 한 때 전국을 휩쓸었던 하층 카스트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카스트주의의 선거가 잠잠해진 것이다. 이 또한 자극적 선거에 대한 국민의 염증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와중에 그 두 가지의 현상과 함께 염증의 대상으로 인식된 것이 좌파의 이념 선거였다. 국민들은 공산당의 ‘개혁’에 대한 역설을 종교근본주의나 카스트주의에 기반 한 구호의 주의(ism)적 선거 이슈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2009년 총선에서 회의당이 ‘보통 사람들’이 잘 사는 시대를 구호로 내건 것과 크게 비교되었다. 회의당은 가난한 농민, 도시 서민, 정부와 정부 출연 기관에서 근무하는 급여 공무원을 선거 타깃으로 삼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민생 정책을 내놓았다. 회의당은 농촌고용보장국가프로그램(National Rural Employment Guarantee Program)을 입안하고 신속하게 실행하였으니 가장 구체적인 것이 농민 부채 탕감이었다.

    분명한 것은 이 정책은 회의당이 사회주의 정책에 입각하여 실행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냥 단순한 포퓰리즘의 정책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선거 1년 전부터 신속하게 실행하였으니, 그 효과를 직접 맛 본 서민들에게 그 정책은 만병통치약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2004년 선거에서 좌파가 크게 약진하였던 것은 그들이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보여주어서가 아니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약속함으로서 가능하였다. 그들의 약속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렇지만 회의당은 그들의 약속을 공허한 이념으로, 심지어는 존재하지 않는 좌파의 발명으로 몰아붙였고, 구체적인 민생 정책을 들고 표밭을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도시 노동자와 농촌 서민을 대거 자신의 지지자로 확보하였다.

    하지만 좌파 진영에서는 여전히 이념에 치우친 거대 담론을 주로 내세우면서 상대방을 비판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들은 국민들이 얼마나 개혁에 대해 피로를 느끼는지에 대해 깨닫지 못했다. 선거에서는 항상 옳은 것이 승리의 열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국적 수준에서 좌파 진영이 몰락한 것은 이러한 탈이념 선거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께랄라에서 대패한 것은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계 어디에서고 진보 진영에서 항상 일어나는 그 일이 또 터졌다. 2004년 대승 이후 께랄라 공산당(M)은 정파 간의 싸움으로 날이 새는 줄 몰랐고, 그러한 가운데 연일 공산당 간부의 부패 사건이 터져 나왔다. 주민들은 그들의 정파 싸움을 건전한 노선 투쟁으로 보지 않았다. 진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들의 눈에 비친 정파 싸움은 단순한 권력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여기에 그 동안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웠던 ‘께랄라 모델’이 작동하지 않았다. 서벵갈에서와 마찬가지로 (물론 그 규모와 비중은 다르지만) 공산당이 관심을 가진 것은 더 이상 농업을 통한 농촌 개발이 아니었다. 그들은 쇼핑몰 건설, IT파크 건설, 사립 대학 유치 등에 더 몰두하였다. 토지가 농민의 손을 떠나 도시인들에게 건네지게 된 이상 그 농민들이 더 이상 공산당을 지지할 이유란 없다.

     께랄라는 남한의 1/3 정도 되는 작은 지역이지만 인도에서 교육 수준이 가장 높은 주다. 문자 해득률이 남성 75%, 여성 65%에 이를 정도여서 정치 이해 수준이 높은 곳이다. 특히 여성은 인도에서 가장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어 선거에서 여성 파워가 매우 커 여론의 부침이 심한 지역이다. 이런 눈부신 발전을 이룬 데는 공산당의 기여가 혁혁하였음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언제까지 공산당을 지지하는 세력으로만 있을 수는 없다. 자신의 삶과 유리된 구식 정치를 하는 정당이 자신들의 지지자로부터 버림받는 경우는 세계 도처에서 허다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민생을 소홀히 하고, 이념 선거에 몰두하여 표를 잃는 일은 병가지상사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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