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성스럽거나 혐오스럽거나...
    레디앙 만평과 홍성담의 '골든타임'에 대한 유감
        2012년 11월 23일 11: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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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연히 거의 같은 시기에 비슷한 주제의 두 칼럼 글이 왔다.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폭력과 차별적 언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고, 그 비판에서 진보진영도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라영씨의 논지와 유사한 칼럼 글을 토리씨도 전해왔다. 같은 날 동시에 두 글을 싣는다. 두 글을 서로 링크한다. 토리씨의 글은 여기.<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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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물학적 성으로 공격하기

    여성의 몸은 수많은 (남성)화가들에 의해 종종 아름다운 누드로 재현되고 조각상으로 탄생해왔다. 그러나 그 몸의 주체가 미의 대상이나 재생산을 위한 생식활동에서 벗어나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위치를 가지려 하면 순식간에 조롱의 대상이 되곤 했다.

    지금도 꾸준히 우리는 매체에서 ‘아찔한 뒤태’와 ‘각선미’를 과시하며 ‘여신’으로 추앙 받는 여자 연예인의 몸이 전시된 사진들을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반면 여성혐오의 대표적 비속어인 ‘보슬아치’처럼 여성의 생식기를 이용한 조롱과 경멸의 언어도 동시에 활개를 치고 있다. 생물학적 여성 그 자체만으로도 성스럽거나 혐오스러운 존재로 재현되는 일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우선 그림을 하나 보자. 한 여성의 치마 속으로 엉덩이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이 그림은 뭘까. 1900년 프랑스에 최초로 여성변호사(잔느 쇼뱅 Jeanne Chauvin)가 탄생하던 시기에 등장했던 여성혐오를 담은 캐리커쳐 중 하나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제한적인 시대이기도 했지만 남성 엘리트로만 이루어진 법조계에 여성이 진입하려 하자 성적 모욕과 조롱이 쏟아졌다. 그러나 1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날이라고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2년 전인 2010년 12월 프랑스 풍자전문주간지인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에 실린 그림이다. 극우당인 국민전선(FN)의 대표 마린 르펜이 아버지 장-마리 르펜을 고스란히 닮은 극우 정치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려진 풍자다. “마린 르펜은 아버지의 사상과 동침한다”라는 자극적인 문구와 함께 두 부녀가 입을 맞추고 얼굴이 뒤섞여있다. 단지 ‘정치인’ 마린 르펜에 대한 조롱이라기 보다 ‘여성’정치인에 대한 조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건 가장 최근이다. 지난 9월 역시 샤를리 엡도에 실린 그림으로 국민전선이 대표의 ‘성sex’을 바꾼 이후(남성인 아버지에서 여성인 딸로) 전보다 더 대중정당이 되었다며 풍자했다. 워낙 노골적 풍자로 종종 화제가 되는 샤를리 엡도이기에 그러려니 하면서도 무심히 넘길 수 없는 이유는, 마린 르펜이 딸이 아니고 아들이었다면 생산될 수 없는 그림들이기 때문이다. 아들이라면 굳이 그 생물학적 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들이었다면 아버지의 정치적 이념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정치인을 두고 아버지와 입을 뒤섞는 그림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와 딸로의 성기변천사를 강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경제위기와 함께 유럽 전역에서 상승한 극우의 위상을 고려하면 프랑스 국민전선의 대중성이 높아진 것에 굳이 대표의 ‘성’을 강조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마린 르펜의 생물학적 여성성은 풍자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진영을 떠나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여성성에 대한 공격을 보는 건 솔직히 참 피곤한 일이다. 웃자고 그렸는데 정색하고 달려든다고 하겠지만 대부분의 풍자와 조롱은 이성애자 남성의 시각에서 만들어지기에 여성이나 성소수자 입장에서는 함께 웃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4월 총선을 앞두고 김용민 후보의 과거 막말 발언이 문제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관타나모의 참상을 지적하며 미국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나온 격한 농담이라고 하지만 여성성에 대한 극단적 폭력인 ‘강간’이 웃음의 소재가 되기는 어렵다. 남성 정치인에게는 하지 않는 ‘강간’ 발언이 특정 여성 정치인에게 향할 때 이미 ‘정치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공격이 된다.

    레디앙 만평 <수염난 여성> 유감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방식의 공격을 지난 13일 레디앙 만평을 통해서도 발견했다.  <수염난 여성>이라는 제목의 상당히 반여성적인 만평을 보고 당혹스러움이 밀려왔다. 유신에 참여한 ‘정치인’을 비판한다기 보다 ‘여성’정치인을 비판한 그림이다.

    이런 그림이 나오는 배경에는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이 남성보다 평화적이고 부드럽다, 혹은 그래야 한다는 관념이 있다. 그 관념은 결국 은근한 ‘압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박근혜와 싸우기 위해 자꾸만 야권에서는 ‘여성대통령의 덕목’이라는 틀을 만든다. 그런데 그 틀을 만드는 것 자체가 이미 성평등과 거리가 있다.

    ‘평등, 평화 지향성, 반부패, 탈권위주의’는 여성지도자에게 ‘특별히’ 요구될 덕목이 아니라 모든 정치인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일이다. 여성에게 더 높은 수위의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의 사회 진입을 막는 위선적 태도다. 게다가 생물학적 여성성을 공격하며 그녀는 생물학적 여성일 뿐이기에 여성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모순을 품고 있다. 오히려 이런 식의 유치한 공격이 등장할수록 박근혜가 생물학적 여성이기에 감수하는 면이 있다는 걸 역으로 보여주는 꼴이 아닌가.

    성스러운 어머니, 혹은…

    ‘생식기’ 발언을 하며 생물학적 성만 여성이기에 여성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황상민 교수의 주장도 재생산을 하지 않은 여성(혹은 여성의 생식기)에 대한 차별의식이 담겨있다. 그의 발언이 가진 문제점은 ‘생식기’라는 단어를 꺼냈다는 점이라기보다 ‘생식기’의 역할에 대한 유별난 집착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잘못된 표현이 아니라 잘못된 의식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이의 ‘의식의 반영’을 ‘말실수’라고 한다. 하지만 말실수가 아니다. 여성의 존재를 어떻게 여기는지 그 의식이 드러났을 뿐이다.

    그는 박근혜가 결혼하지 않았고 애를 낳지 않았기에 ‘여성의 역할’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이는 지독히도 가부장제의 틀 속에서 사유한 결과다. 출산과 육아를 하며 ‘한 남자의 아내이며 어머니 노릇’을 하지 않았기에 여성의 사명에서 벗어났다는 얘기다. 그는 그것이 곧 ‘여성’으로서 결격사유인양 몰아갔다.

    이렇게 여성을 (사랑과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가정에만 묶어두려는 사회의 암묵적 동맹은 그 방법들도 다양하게 펼쳐져 왔다. 1955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미네소타 출신의 미국 연방의원으로 당선된 민주당의 코야 커눗슨Coya Knutson은 1958년 재선을 앞두고 상대 후보의 모략에 휘말렸다. 공화당은 이미 사이가 좋지 않았던 코야 커눗슨의 남편을 이용해 공개적으로 그녀에게 편지를 쓰도록 했는데, 그 안에는 “코야, 나와 아이들을 위해 집에 돌아와줘. 당신은 너무 많은 시간을 다른 남자들과 보내고 있어. 나 몹시 힘들고 아퍼. 제발 돌아와줘. 사랑하는 남편이” 이와 같은 내용이 있었다.

    이 편지가 공개되자 커눗슨은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여성’정치인의 낙인을 벗기 힘들어졌고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 이는 미국 현대 정치에서 성차별의 예로 종종 언급되는 대표적 사건이다.

    또한 2006년 <경찰학연구>에 실린 <가족 구성원 간 살해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보면 실제 가족 살인의 경우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높은 형이 선고되는 것으로 분석되어 있다. 이는 가족을 돌보는 역할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중요한 임무라는 관습적 사고 때문이다. 즉 여성은 성스럽고 희생적인 어머니일 때는 숭배의 대상이 되지만 그 가정의 틀에 머물지 않으면 남성보다 훨씬 더 가혹한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표현은 자유이나 명백한 성차별…홍성담의 <골든타임> 유감

    그런데 갈수록 가관이다. 유신체제를 상징하는 박근혜를 조롱하고 풍자한다는 홍성담 화가의 그림이 서울에서 전시중이다. 사진을 통해 작품을 보니 성차별의 압축파일처럼 보인다. <골든타임>이라는 제목의 그림 속에는 박근혜가 분만대 위에서 출산을 하고 있는데 갓 태어난 아이는 박정희를 상징하고 있다. 박근혜가 유신을 낳았다는 표현이다.

    한겨레에 실린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 “박 후보를 분만대 위에 올려 그는 신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란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는 “박근혜 출산설에서 착안한 그림이다. 박 후보의 처녀성, 몰지각한 여성의 가면을 벗겨내고 싶었다”라고도 했다. ‘어머니’가 아닌 한 여성정치인은 졸지에 처녀성을 검증 당하고 있다. 경악할 노릇이다.

    게다가 작가는 “미술사에서도 고대 벽화부터 페미니즘 작가들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출산 장면을 그렸다”며 자신이 박근혜를 풍자하기 위해 ‘출산’을 끌어온 것이 문제없다고 변호한다.

    하지만 문제는 출산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출산 장면을 어떤 맥락에서 사용했느냐가 중요하다. 많이 알려진 프리다 칼로의 작품 <나의 출산>은 그녀의 개인적인 유산의 아픔이 담겨 있다. 실제로 칼로는 무척이나 아이를 원했지만 사고를 겪은 몸이라 임신과 출산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의 그림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의 몸은 여성성에 대한 공격이나 조롱도 아니고 여신 같은 미를 뽐내지도 않는다. 여성이 표현하는 여성의 몸을 통해 그 동안 외면되어온 몸의 고통을 까발리고 대상화된 미가 아니라 살아있는 주체적 한 생명을 표현한다.

    하지만 홍성담은 풍자의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정치인의 출산 장면을 그리면서 ‘처녀성’을 운운하며 생물학적 성을 조롱했다. 앞서 보았던 샤를리 엡도의 그림처럼, 마린 르펜이 아들이 아니고 딸이기에 아버지와 입을 뒤섞는 그림이 생산되듯이, 박근혜도 아들이 아니라 딸이기에 그의 아버지를 낳는 그림이 그려진다. 이것은 정치적 풍자라기 보다는 ‘여성’정치인을 조롱하는 성차별적 표현물이다.

    뿐만 아니라 “박 후보가 정치인으로서의 특별한 철학과 사상을 보여주었다기 보다는 그를 둘러싼 검은 세력들이 그를 조종해 당선시켜 이익을 얻어내려는 것처럼 보였다”는 작가의 말은 여성정치인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박근혜를 스스로 생각하며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라 누군가가 ‘조종해 당선’시키는 지극히 수동적 존재로만 보는 것이다.

    몇 달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에게 기자는 “남편이 멘토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남편이 어떻게 멘토가 되죠?”라는 김재연의 대답은 차라리 통쾌하다. 남편이 멘토가 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어느 남성 정치인에게도 “아내가 멘토냐?”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걸 떠올리면 이미 질문 자체가 차별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생식기에 대한 사회의 넘치는 관심에 비하면 그녀들의 주체적 사고에는 무심한 채 누군가에 의해 ‘조종’ 당한다는 생각을 참 쉽게 한다.

    물론 이처럼 논란의 소지가 있는 작품이지만 이를 두고 법적 대응을 운운하는 새누리당의 태도에는 반대한다. 이는 엄연히 권력을 이용한 억압이기 때문이다. ‘쥐그림’으로 유죄를 받았던 박정수나 북한 트위터를 리트윗해서 결국 유죄를 선고 받은 박정근과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오기를 원치 않는다. 법으로 대응하는 건 사회에서 풍성하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골든타임>과 같은 창작물에 담긴 여성성에 대한 공격은 분명히 비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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