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살, 남동생 태어날 때 산파노릇
[어머니 이야기④] 초등학교 문턱도 못 넘어본 어머니
    2012년 11월 21일 10: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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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1945년 11월 해방이 되고 한국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일본에 살던 식구들은 모두 내 외할머니 고향인 경북 의성군 비안면 새기터로 삶터를 옮겼다. 그곳에 내 외할아버지가 일본으로 오가며 비단 장사를 해서 땅을 사두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나이 열 살이었다.

내 외할머니는 새기터에 오자마자 아들을 낳았다. 내 큰외삼촌이다. 12년 만에 낳은 아들이다. 그 기쁨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름을 강대수로 지었다. 이제야 대를 잇게 되었다고 대수였다. 처음 난 아들이라 다른 사람들은 만지지도 못 하게 하고 외할아버지만 늘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열 살 나이에 아기를 돌보며 밭일과 빨래, 밥을 했다. “아니, 야는 아까 밭일 하드만 언제 밥을 해 가지고 왔누.” 하며 동네 아주머니들이 기특해했다.

어머니는 나이가 열다섯이 되서는 낮에 누에도 치고 밤엔 명주 비단을 짰다. 어머니는 베틀질을 혼자서 배웠다. 어머니는 그때 짠 베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난 어머니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일과 놀이와 배움이 함께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살아오신 것이 그러네요?” “아니다. 니 에미는 놀 녘이 없었다. 평생 놀아본 적이 없다. 늘 일을 했고 지금도 일을 한다.” 한참 동무들과 산과 들로 뛰 놀 나이에 집안 살림을 했다니 어머니 하시는 말에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어머니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기쁘다고 담담하게 얘기할 뿐이었다.

베틀 짜는 농가의 어머니를 담은 일본어로 된 엽서

외할머니는 큰아들을 낳고 나서 아들만 내리 셋을 더 낳았다. 하지만 둘째는 두 돌이 되기 앞서 죽고 셋째는 낳자마자 죽었다.

어머니 나이 열두 살 때 초등학교에 가고 싶어 했다. 다른 동무들은 모두 학교에 가는데 어머니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않아 꼭 학교에 가고 싶어 했다. 바로 위 언니는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한국 와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늘 부러웠다.

어느 날 아침에 외할아버지가 집에 안 계신 것을 보고 어머니는 검은 천을 허리에 두르고 비안소학교로 갔다. 그때 아이들은 학교에 갈 때 검은 천으로 책보퉁이를 하고 갔다. 물론 어머니 허리에 두른 검은 천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산을 넘고 넘어 비안소학교에 가서 운동장을 한 번 밟아 보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낮 2시가 넘었다. 학교에 갔다 온 것을 안 외할아버지는 대문도 없는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고무신을 벗어 마구 때렸다. 한번만 더 학교에 가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금선아, 니는 눈구덩이에 들어가도 기어 나와서 먹고 살끼라. 뭔 지집아가 학교에 가고 싶어 하노. 니 밑으로 동상이 둘이나 있고 니 엄니 뱃속에 아이가 있는데, 니 어쩔라고 학교에 가고 싶어 하나. 니 언니만 다니면 됐째. 니까진 배우게 할 수 없다.” 하고 딱 잘라 말했다. 어머니는 잘못했다고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외할아버지는 그래도 딸이 불쌍했는지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금선아, 니 시집 갈 때는 이 아비가 송아지 한 마리 팔아서 해 주꾸마. 그러니 울지 말아라.” 이렇게 송아지를 팔아서 시집갈 때 해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했지만 내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19살에 혼례를 치를 때 쥐새끼 한 마리도 안 팔았다고 어머니는 늘 한탄을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렇게 울며 달래는 내 외할아버지가 불쌍해서 그 뒤로는 학교 앞에 얼씬도 안했다. 어머니는 비안소학교에 한 번 가면 쭉 갈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해서 내 어머니가 배우고 싶은 마음은 무참히 무너졌다.

한 해 뒤 1월에 어머니 막내 남동생이 태어났다. 위로 남동생 둘이 죽고 태어나서 그 기쁨이 아주 컸다. 어머니 나이 열세 살에 동생 해산구완을 했다. 다시 말하면 아기를 받는 산파노릇을 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어머니 셋이서 남동생을 받았다.

어머니는 그때 기억을 또렷하게 했다. 아기 탯줄을 끊는데 먼저 산모와 아기에 달린 탯줄 끝에 질긴 실을 세게 동여 매놓고 그 탯줄 가운데를 외할아버지가 이로 잘랐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당신 아들들 넷을 낳을 때 꼭 가위를 미리 준비했다. 어머니는 우리 사형제를 모두 집에서 낳았다.

어머니 남동생은 낳을 때 피가 많이 나왔다. 어머니는 그 피 묻은 헝겊을 들고 얼음 얼은 못으로 가서 손이 하나 들어갈 만큼 깨고 헝겊을 흔들어 씻었다. 그렇게 피 묻은 헝겊을 씻다보니 피가 손등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어머니는 당신 나이 열세 살에 동생 해산바라지한 일을 두고두고 말씀하셨다. 그 일이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뒤에 당신이 아들들을 낳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어머니는 남동생을 낳고도 동네 사람들한테 딸을 낳았다고 속였다. 위로 남동생이 둘이나 죽어 잡귀가 또 동생을 데려갈까 봐 거짓말을 하며 돌아다녔다. 집 앞 금줄에 고추 대신 숯과 솔잎을 매달았다.

동네 사람들은 아이 낳고 일주일 뒤에 미역국을 먹으러 어머니 집에 왔을 때야 딸이 아닌 아들인 것을 보고 어이없어 했다. 그래서 어머니 보고 “저런 지집아가 있나, 감쪽같이 속았지 뭐야!” 하시면서 어머니를 더욱 귀여워하셨다.

어머니 어릴 때 살던 새기터는 서른 집이 채 안 되는 산골짜기였다. 어머니는 친한 동무가 한 명도 없었다. 늘 일을 하느라 바빴다. 그래도 가끔 밤에 목욕을 하러 논두렁 귀퉁이에 있는 웅덩이에 가면 동네 동무들이 오는데 어머니가 알몸이 되면 달빛에 비친 몸이 하얘서 멀리서 봐도 금선이 왔네 하고 바로 알았다.

어머니는 피부가 좋아서 여드름 한 번 나지 않았고 땡볕에 일을 해도 금세 살갗이 하얘졌다. 그래도 그 시절엔 동무들과 봄에 들일 나갔다가 배가 고프면 산에 핀 참꽃을 따 먹기도 하고 찔레 순을 꺾어서 먹기도 했단다.

어머니가 살던 마을에도 한국전쟁 기운이 돌았다. 워낙 산골이라 국군과 인민군이 직접 총을 쏘며 마을에 들어오진 않았다. 먼 산에서 총소리가 심하게 나긴 했지만. 어머니가 살던 마을은 작아서 지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배를 곯아서 못 먹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전쟁이 주는 아픔은 있었다. 어머니 옆집에 내 고모가 사셨다. 나중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혼례 시켜준 새기터 고모다. 내 아버지 집에 큰 황소가 있었는데 그 소를 지키려고 내 아버지는 산 깊숙한 곳에 일주일을 숨어 지냈다. 그곳에서 먹고 잤다. 근데 집에 있는 소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모두 죽여 버린다는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소를 가져다주었다. 하루만 더 산 속에 숨어 있으면 소를 뺏기지 않았다며 어머니는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어머니는 그 무시무시했던 해방 정국을 별 탈 없이 피해갔다. 한국전쟁도 마찬가지고.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남북이 다른 나라를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좌우대립으로 죽어갔는가. 배고픈 사람을 도와주었다고 빨갱이로 몰리고 지주들과 가까이 지냈다고 서로 죽고 죽였다. 그 수가 200만 명이 넘는다.

어머니 살던 고향은 가난하지만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편안하게 살았다. 그런 세상이 다시 오면 좋겠다. 얼마 앞서 한겨레신문을 보니 어머니 고향 비안면이 우리나라에서 노인 자살률이 제일 높다고 했다. 외로움과 가난으로 칠 팔십 된 어르신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있을 때는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그리고 박정희가 태어난 선산 가까이 있어서 풍요함을 누렸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 새마을운동으로 농촌 공동체는 깨졌다. 그땐 똥거름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이젠 비료값을 대기도 힘들다. 자식들만은 농사꾼이 되지 말라고 도시로 보내 공부를 시켰다. 그 아들 딸들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농촌에 남은 사람들은 버려졌다.

전쟁은 멈췄다. 1953년 여름이다. 어머니는 옆 집 사는 내 고모 중매로 혼인을 했다. 내 아버지 이름은 은상기. 내 어머니 나이 열 아홉, 내 아버지 나이 스물 둘이다.

2012년 11월 17일 토요일
가을비가 이틀 내린 뒤 쌀쌀한 아침에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필자소개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 93년부터 일하고 있다. 두가지 꿈을 꾸며 산다.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날과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날을 맞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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