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계적 중립 넘어, 진짜 중용을 찾아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장정일의 '공부'>를 다시 생각하며
        2012년 11월 20일 09:45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장정일은 세상이 다 아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 시인이요 소설가요 논객이다. KBS가 방영한 바 있는 책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로서도 그가 1980년대에 출간한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나 1990년대에 쓴 소설 <아담이 눈뜰 때>와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지금도 선명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연전에 시리즈물로 출간한 바 있는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그의 변신을 예고한 야심적 프로젝트였다고 할 수 있다. 거기서 그는 지식인들의 현학적이고 전문적인 독서 방법과 대중들이 취하는 반성 없는 독서 방법을 동시에 넘어서는 성찰적이고 폭 넓은 책의 횡단법을 풍부하게 보여주었다. 이 책이 ‘책’을 고르고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일대 화제가 됨은 물론 인문학 쪽의 스테디셀러가 된 것은, 장정일이라는 브랜드가 독후감 양식과 결합하여 나타난 결과라 할 것이다.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코리아)는 앞선 <독서일기>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책이다. 여기서 그는 좀 더 본격적인 독후감을 제시한다. 가령 그는 동서양 양서들을 소개하면서 우리 사회의 금기에 도전하기도 하고, 그동안 중립의 처세로 일관해온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허위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셈이다.

    나아가 그는 ‘기계적 중립’이 얼마나 잘못된 중용이고 무지의 산물인지를 비판한다. 본래 ‘중용’이란 깊은 사유에 바탕을 두고 칼날 위에 서는 것인데, ‘양비론의 천사’들은 그런 것들이 없는 채 무난하고도 덕망 있게 습관적 중용을 취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흔 너머 새삼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우선 내 무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극단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머리말」, 6쪽)라고 말이다. 우리 사회의 모순이나 활력의 근원을 찾아가지 않고, 이는 구조적 문제라느니 여야는 물론 언론에게도 책임이 있다느니 하는 진단들이 무책임한 ‘양비론의 천사’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데 대한 근원적 비판인 셈이다. 그야말로 ‘진짜 중용’은 극단과 편견을 통과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 나라와 동서양에 걸친 방대한 시공간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충실하게 섭렵하고 그것들을 때로는 친화적으로 때로는 비판적으로 리뷰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중용’의 지혜를 발휘하여, 우리가 ‘무지’ 상태에서 판단하지 못했거나 전혀 엉뚱하게 알고 있는 부분을 명쾌하고도 설득력 있게 해부하고 교정한다. 이 점에서 그는 명료한 계몽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취한다.

    예컨대 그는 ‘시오니즘’의 실체를 밝혀가면서, 그동안 우리가 거꾸로 알고 있던 신화들을 하나하나 벗겨낸다. 헐리웃 영화인 「영광의 탈출」을 보았을 때 유태인 국가 건설 과정을 매혹적으로 경험했었다는 저자는, 그 유태인 건국이 “실은 2천 년 동안 그 지역에 살아왔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추방과 박해의 시발점”(215쪽)이라고 갈파한 후, 일종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인 시오니즘의 추악한 과거 역사를 추적하는 지적 치열성을 보여준다.

    랄프 쇤만이라는 사람이 쓴 <잔인한 이스라엘>을 인용하면서, 시오니즘이 근대사 내내 제국주의의 하수인으로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자신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받아온 역사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바로 이 ‘중동’의 역사를 다루었다는 점을 발견하면서, 국내 학자들이나 비평가들이 책도 안 읽고 ‘동아시아’의 대안적 담론으로 사이드를 인용하는 탈(脫)맥락의 독서 관행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마치 이승복 이야기가 반공주의 교육에 이용되었듯이(비록 실화라고는 하지만), 유태인들이 건국 과정에서 보여준 애국심을 우리 애국심 발흥에 원용한 교육의 한 장면을 비판한다. 읽는 나도 전율에 빠진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1974년 4차 중동전이 일어났을 때, 담임선생님이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해주면서, 중과부적으로 보이는 아랍과 싸워 세 번이나 통쾌한 승리를 얻어냈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설명해주던 모습을! 검은 안대를 한 애꾸눈 장군 모세 다얀이며, 단 6일 만에 끝났던 3차 중동전. 그리고 아랍 국가들의 전투기가 뜨지 못하도록 이스라엘 공군이 활주로부터 기습 공격했다는 전술과, 조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전 세계의 유태인들이 귀국하기 위해 다투어 공항으로 몰려든다는 이야기들은 어린 학동들의 가슴을 얼마나 뛰게 했는가? 아아, 그때 우리는 모두 시오니시트였다.(굵은 글씨 인용자 강조, 229쪽)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멀쩡한 원주민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그 원주민을 쫓아내고 박해하며 나라를 세웠을 뿐인데, 그 사건을 마치 유태인이 자신의 땅을 되찾은 독립 운동인 것처럼 이미지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유태인은 애국심과 두뇌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고, 우리 나라도 그 유태인의 역사와 유비(類比)되는 것처럼 그들의 건국 신화를 모범적으로 내면화했다.

    이처럼 진실은 정반대로 왜곡되어 구성되고 유포되고 내면화될 때가 많다. 장정일은 거기에 저항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그것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이 책은 그러한 자료들을 우리 근대사는 물론, 동서양의 여러 사건과 저작에서 훑고 요약하고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편력을 매혹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서 그가 다루고 있는 대상은 박정희나 조봉암 같은 현대사의 인물로부터, 모차르트, 바그너 같은 음악가들, 촘스키나 사이드 같은 학자들에 두루 걸쳐 있다. 가령 우리 나라 근대문학의 초창기의 역사를 일본의 사소설 전통과 연관하여 서술한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잘 알려져 있듯이, ‘내면’ 발견을 근대문학의 속성으로 여긴 일본 근대 작가들은 ‘사소설’이라는 일본적 전통을 고안해냈다. 하지만 그것을 사숙했던 우리 나라 근대문학의 초기 작가 이광수는 사소설 전통을 이입하지 않고 계몽주의를 통해 친일로 나아가는 도정을 보여준다. 이를 두고 저자는 “이광수는 일본의 사소설로부터 한국의 근대문학을 방어했다”(120쪽)고 쓰고 있다. 절묘한 해석이다. 이광수가 사소설 맥락을 벗어나 계몽주의자로 그리고 친일문학가로 나아갔지만, 그 덕분에 한국 근대문학은 사소설의 감염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촘스키와의 대담집을 통해서, 미국의 언론과 지식인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는 물론 장정일의 시선과 촘스키의 시선이 겹치는 대목이다.

    소위 민주주의 국가의 통치 계급은 무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민의 자발적인 동의를 구하거나 온갖 정책으로부터 국민을 소외시키기 위해 선전이라는 방법을 동원한다. 까다롭고 막중한 선전 사업을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사람들이 학식을 쌓고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다. 다국적기업과 국가가 야합하고 있는 오늘과 같은 형식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신문과 방송, 광고와 예술 등을 통해 체제 선전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체제에 의해 저명한 지식인 혹은 책임 있는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이들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315쪽)

    언젠가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과 ‘지식기사’를 나눈 적이 있거니와, 촘스키가 비판해마지 않는 지식인의 이 같은 처세와 실천은 그야말로 체제 순응적이고 자기 성취적인 ‘지식기사’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이어서 “언론인들 대부분이 시장을 지배하는 다국적기업의 월급쟁이라는 사실, 또 언론계가 이익 충돌의 무대라는 것을 대중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그는 언론은 절대 권력층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318쪽)고 장정일은 요약한다. 우리 나라 주류 언론들도, 한시적 권력을 위임받은 정치권력에는 날선 비난을 마다하지 않지만, 항구 권력인 대기업 총수들의 탈법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눈을 감고 있지 않은가.

    또 이 책은 당대의 소위 ‘왕따’들의 계보를 짜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리 정치사의 미답 영역인 진보 정당의 역사를 일군 조봉암에 대한 저작을 통해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첨예한 진보적 정책의 좌절을 읽고, 모차르트에 대한 네 권의 평전을 통해서는 그의 죽음이 당시 문화적 왕따에게 행해졌던 “사회적 공모에 의한 암살”(149쪽)이라고 해석해낸다. 저자 스스로 우리 사회의 주류로부터 밀려나 주변부 지식인의 목소리를 첨예하게 이어온 이력이 있는 만큼, 이러한 그의 대안적 계보 짜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책의 55쪽에서 미국의 사회 생물학자이자 하버드대학 석좌교수인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통섭(統攝)>에 대해 이야기한다. ‘통섭’은 ‘Consilience’를 번역한 용어이다. 이 책에서 윌슨은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이 모두 인간에 대한 학문이기 때문에 유전학, 진화학, 뇌과학을 기반으로 재해석하고 통합하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장정일은 이 책을 원용하여, 이러한 교양의 통합성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교육의 유비쿼터스 동향을 제시한다. 실로 ‘통섭’의 육화라 할 만하다. 전문인이랍시고 다른 분야에 눈감으면서 잰 체하는 것은 이제 지식인의 태도가 아니며, 깊은 사유를 결여한 채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은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는 범례를 보여준 것이다. 원래 ‘공부(工夫)’라는 것이 스스로 읽고 생각하고 하는 것 아닌가. 그 매개가 ‘책’이 되고 있음은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를 각성시키는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띠를 둘러 거기에 ‘우리 시대의 문화 프로메테우스 장정일’이라고 쓰고 있다. 표지에는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처럼 ‘프로메테우스’와 ‘부활’로 명명될 수 있는 장정일의 횡단적 경험들이 우리 지식계의 양비론적 태도, 어정쩡한 절충을 마치 균형인 듯이 여기는 태도, 학벌 지상주의에 얽매여 그자가 그자 봐주기로 일관하는 태도 등에 역설의 경종이 될 수 있을까?

    그의 생각들이 정말로 대안적 설득력을 인정받아 주류 지식계에서 소통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토록 당연한 명제들도 요원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서는 그 같은 금기와 억압의 견고한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요청을 외면할 수 없다. 그것만이 ‘기계적 중립’을 넘어 ‘진짜 중용’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말이다.

    또한 이 책은 문장의 유려함과 친화력에서도 돋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저자가 촘스키의 저작을 언급하는 곳에서 말한 다음 대목을 돌려주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진실된 말은 꾸밀 필요가 없기 때문에 쉽게 읽힌다.”(321쪽)

    필자소개
    한양대, 국문학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