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 일상, 예술 - 비판에 답하며
    박노자와 토리의 비판 혹은 비평에 대한 답변
        2012년 11월 19일 02: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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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의 강남스타일 비판 글
    남종석의 박노자 글 비판
    박노자의 남종석 비판에 대한 반론
    토리의 박노자 남종석 글에 대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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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의 이중성

    박노자 선생에 대한 비판 이후 박선생과 토리님이 나의 글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셨다. 나를 포함하여 두 분 모두 진보신당 당원이거나 당원이었고,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계급적 적대와 성적 적대, 지적 차이 등)를 급진적으로 전화시키려는 공통 지반을 갖고 있다는 점을 우선 확인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박노자 선생은 강남스타일이 패러디적 성격을 지녔다는 비판에 동의하면서도 풍자 자체가 상업적 성공을 위한 코드일 뿐만 아니라 이것이 대중들의 시간을 식민화하는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더불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반동적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박노자 선생은 문화운동 일반과 관련해서도 나에게 이견을 제시했다. 내가 대중문화 내에서 전복의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일정 부분 그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보다 근본적으로 상품성이 없는 공간에서 제대로 된 대안적 문화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노자 선생이 제기한 첫 번째 문제는 쟁점이 될 수 없다. 박선생님 주장대로 강남스타일의 패러디는 상업적 성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이것이 강남특별시 피해자들에게 아무런 위안을 줄 수 없으며,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대중들의 수동적 소비 주체로 타락시키는 문화상품이다.

    이 주장은 내가 앞의 글 2절에서 정리했던 내용이다. 강남스타일은 이윤 극대화를 목적으로 한 문화상품이다. 앞의 글에서 썼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문화상품은 성적 대상화를 내포하고 있으며 강남스타일은 아주 노골적으로 그렇게 한다. 더불어 그것은 반자본주의적이기는커녕 순수 자본주의적이다.

    박노자 선생은 이것을 풍자라고 했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풍자는 비판과 해학을 동시에 지녔다. 강남스타일은 세태비판이라기보다 그저 웃겨보자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패러디이자 코메디라고 했던 것이다. 강남스타일의 이런 우스꽝스런 요소가 성공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내가 제기했던 핵심적인 주장은 강남스타일이 스스로 B급을 표방하고 있는데, ‘강남스타일의 본질은 B급이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아무런 ‘비판적 효과’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시키고 있는데 포르노적이라는 비판도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면 이것은 누가 보아도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실관계도 맞지 않는 근거를 제시하면서 그렇게 비판하는 것은 치명적이다.

    덧붙여 나는, 대중들이 일상에서 이런 패러디를 즐기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면 대중들은 싸이가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면서 그들 내면에 있는 욕망을 표현해 준 것을 즐겁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강남특별시 피해자들에게 근원적인 위안이 될 수 없다. 세상의 어떤 코메디도 대중들의 삶에서 근원적인 위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근원적 위안이 될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즐길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노래방에 가서 한곡 뽑는 게 비정규직이 된 어떤 존재의 삶을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분명 그에게 위로가 된다. 그런 재미도 없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가?

    더 나아가 박노자 선생은 소주나 TV축구시청이 여가의 식민화를 만들지 않느냐고 제기한다. 문화산업이 대중을 수동화 한다는 지적이다. 맞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삶의 복잡성을 보지 못하는 단순한 비판일 뿐이다. 노동을 한 후, 혹은 노동조합 회의를 마친 후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못다한 이야기, 마음속의 이야기를 하면서 노동자들은 그들의 유대를 강화한다.

    그들은 또한 집에서 축구시청도 하지만, 주말에는 동료들과 조기축구회에 나가 또 다른 우정의 장을 만들 수 있다. 대중들은 한국 대표를 응원할 때 국가주의에 물들기도 있지만, 축구를 통해 상품화된 관계를 넘어선 우정의 장, 유대의 장을 만들기도 한다. 등산모임이든, 축구든 술자리이든, 대중들은 그들 나름대로 새로운 장을 만들고 있는 것도 함께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대중문화의 모든 장에서 권력에의 의지가 작용하지만 대중들은 또한 그 경계를 초월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어떻게 개입하는가이다.

    욕망을 긍정하자!

    토리님은 나의 글에 대해 대중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에는 동의하더라도 강남스타일에 대한 나의 분석에서는 “유쾌함의 미덕”만을 찬양하고 있을 뿐 그 내부를 균열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욕망의 정치성을 탈각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이 비판의 함의에는 내가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B급 문화텍스트의 미덕만을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부분적으로 옳다. 내가 강남스타일을 일상의 유쾌함으로 즐기면 된다고 했을 때, 나는 분명 이 텍스트에 내재된 남성적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변명할 수 없다. 나는 남성이라는 주체 위치에서 성을 상품화 하는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강남스타일이라는 텍스트를 여성의 시각으로 전유할 수는 없다.

    나의 내면적 욕망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 거짓말일 것이다. 왜냐면 나는 살아 있고 에로스적 육동은 내가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다만 공개적인 장소나 공적 만남의 장에서 나의 욕망은 억압될 뿐이다. 당연하지 않는가? 만약 공적 공간에서 어떤 대상에게 나의 욕망을 마음대로 표현했다면 나는 바로 퇴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의 억압이 그것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적으로 이뤄지는 대중문화의 소비 과정에서 나는 여전히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볼 것 같다. 예컨대 나는 소시와 카라를 나의 성적 환타지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다. 나는 그녀들의 음악은 좋아하지 않는다. 더불어 이런 성적 대상화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다.

    테리 이글턴이 썼듯이, 정신분석학이 욕망하는 존재인 우리에게 주는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죄책감을 덜어 준다는 점이다. 박노자 선생은 이런 나의 욕망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겠지만, 나는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것이라고 답변하겠다.

    토리님은 강남스타일에 대한 나의 논의에서 욕망의 정치학이 결여되었다고 했는데, 나는 남성적 위치에서 대상을 욕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차피 ‘싸이의 시선’을 공유하는 위치에 있는데, 토리님이 그것을 문제 삼는다면 어떻게 답해야할지 막막하다. 솔직히 난 박노자 선생이 그렇게 분노한 싸이의 그 “노골적인 시선”이 부럽고 재밌다. 남성인 내가 싸이의 시선이 아니라 여성의 시선 혹은 다른 어떤 욕망의 정치를 꿈꿀 위치는 아닌 것이다.

    강남스타일이라는 텍스트에 나타난 성적 대상화를 전복시킬 주체는 내가 아니라 토리님과 같은 여성이나 다른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여성들 또한 그들의 위치에서 그들 나름의 욕망을 표현함으로써, 기존의 대중문화 텍스트를 전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적 욕망으로.

    토리님은 내가 강남스타일에 대해 “유쾌함의 매력만 찬양”했다고 했는데,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내가 박노자 선생을 비판하면서 대중문화 내에서 전복의 가능성을 말했을 때, 이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길로 나타날 수 있었다. 하나는 텍스트 내의 주체들의 상이한 욕망을 발본화 시킴으로써 내적 갈등을 폭발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생산물의 장치를 그대로 가져오되 내용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후자의 전형적인 형태가 패러디이다. 나는 분명 앞의 글 말미에서, 운동권들이 강남스타일을 패러디 하는 것을 예로 들었었다. 강정스타일, sjm스타일, 진보스타일 등. 이는 강남스타일을 유쾌하게 전유하는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토리님 말씀대로 비록 그 글에서 나는 내재적인 욕망의 갈등은 보지 않았지만, 다른 형태의 전복에 대해서는 소박하게나마 제시했다고 판단한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서

    박노자 선생은 대중문화에 대한 대안으로 상품화된 세계 밖에서 “지속적으로 상품성 없이도 인간의 고통에 대한 동감과 연대의 메시지가 담겨진 진짜 문화”를 대중화시키고자 한다. 말하자면 문화산업이 지배하는 공간 외부에서 급진적인 대중문화를 만들어야만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이다.

    사실 박노자 선생이 제기하는 쟁점은 너무나 오래되고 근본적인 문제라 간단하게 답변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내가 이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이는 문화운동에 종사하는 분들의 개입이 필요한 지점이겠다. 다만 논쟁을 제기한 입장에서 이에 대해 간단히 답변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민중문화와 대중문화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를 두고 문화운동 내부에서 수많은 쟁점이 있었다.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퍼져 있던 풍물, 집체극, 노래패운동, 걸개그림, 판화와 같은 민중예술은 분명 대중문화나 주류 예술계와 독립적인 하나의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박노자 선생은 일본과 중국의 예를 들지만 한국에서도 이런 문화적 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90년대 대학가의 시위문화, 운동권 문화가 사라지면서 민중예술의 전통은 대학가에서 급속하게 단절되었으며 노동운동 주변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민중문화운동 진영은 운동의 축소와 함께 지속적으로 위축되었으며, 대학사회는 한국 주류사회보다 더 노골적으로 주류화 되었다. 이후 급진적인 예술운동은 대개 새로운 양식들과 가치들에 적응해 가면서 대중문화와 직간접적으로 대결하며 비주류문화로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앞의 글에서 나는 대중문화 내에서 전복적 가치를 실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이미 그 자체로 대중문화와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면 어떤 급진적인 대안도 만들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대중을 동질화 시키고, 그들의 의식을 노예화하며, 실험적 사고를 억압하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대중문화를 통해 개입하는 것은 늘 주류적 질서에 포섭되거나 포섭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급진적인 문화가 직면하게 되는 고유한 한계이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박노자 선생의 주장처럼 외부에서 독립된 진지를 꾸릴 것인가 내부에서 이를 내파시킬 것인가의 선택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나의 소견으로는, 이런 궁지를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중예술과 예술의 대중화’를 적극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예술은 개체의 고유성과 실험정신이 대접받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 되었다. 개별적인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유일한 장소가 예술이다. 더불어 예술은 통념화되고 속류화되는 세계에 대한 개별자의 저항의 장소이기도 하다. 동질성 복제야 말로 예술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아도르노가 왜 예술에 집착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개체의 고유성은 사고한 반면 이의 대중화에 대해서는 극도로 부정적이었다. 우리는 아도르노처럼 개별자가 보편성을 갖고 대중화 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일 이유가 없다. 우리는 새로운 저항문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개별자들의 고유성을 보존하면서도 보편적인 연대와 연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적 실험성과 대중적 전유가 함께 전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스튜어트 홀 등이 만들어낸 대중예술이라는 개념은 이 문제의식을 잘 포착하고 있다. 대중문화도 싸이처럼 B급으로 아주 잘나갈 수 있지만 다양한 실험정신을 통해 체제에 대해 문제제기 할 수 있다. 음악을 통해서도, 영화와 사진과 같은 다른 장르를 통해서도 이런 실험적 도전은 가능하다.

    스튜어트 홀 등은 대중문화의 이런 특징을 대중예술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해 내었다. 대중문화 내에 있지만 급진적이고,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도전을 대중예술이라는 개념으로 적극적으로 사고한 것이다. 대중문화 속에서 대중과 함께 하되 대중문화의 지배적 요소를 해체시킬 수 있는 도전들. 대중문화와 예술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것.

    문화 산업의 유통구조 내에서 대중의 수동성을 해체하는 또 다른 작업은 대중들 스스로 문화 생산자로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노래패를 만들 수 있고, 합창단을 꾸릴 수 있으며, 밴드를 만들고 드로잉 작업에 참여할 수 있다. 대중들이 문화를 소비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생산함으로써 대중문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만남, 유대, 가치를 만들 수 있다. 이 또한 대중문화 내에서 대중문화를 전복하는 하나의 양식이다.

    '엘 시스테마'의 실험과 과정을 다룬 영화의 포스터

    더불어 예술의 대중화도 함께 사고해야 한다. 나는 앞에서 대중이 대중문화 밖에서 살 수 없다고 했지만 이 주장이 대중과 예술이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누군가 나의 글을 이렇게 이해했는데, 나는 그의 가독성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예술은 소수의 엘리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아이들도 말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가는 지휘자 바렌보임의 구호처럼 “모두를 위한 베토벤”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는 중동의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청년 오케스트라 웨스트-이스트 디반을 이끌고 오늘도 새로운 신화를 써 나가고 있다.

    예술의 대중화, 예술을 통한 공동체의 치유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는 아마 베네주엘라의 ‘엘 시스테마’ 일 것이다.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사이몬 래틀경은 “클래식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여기 베네주엘라를 보라”고 했다. 베네주엘라에서는 ‘엘 시스테마’를 통해 청소년들의 심성을 치유하고, 재능의 나눔을 실천하며 ‘아름다움을 향한 경쟁’을 만들어 내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박노자 선생은 상업화된 영역 밖에서 새로운 문화의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것보다는 대중문화의 생산물들을 적극적으로 전유하면서, 그 내부에서 새로운 실천들을 이끌어 냄으로써 급진적 요소들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본다. 더불어 예술의 대중화를 통해 대중의 고양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이런 급진적 기획을 위해서는 부르주아 제도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본다. 예술교육의 확대, 대중문화에 대한 지원, 노동조합과 연대를 통한 새로운 문화의 창조, 민중의 집과 결합된 급진적인 문화적 시도 등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본다. 우리는 제도 안에서 제도 밖을 상상해야 하며, 대중문화와 제도적 예술의 경계 자체를 가로질러 나가야 한다.

    미래를 위해

    이 글은 박노자선생과 토리님의 문제제기에 대한 내 나름의 답변이다. 대중문화를 유흥으로서 유쾌하게 전유하는 것에 대해 나는 여전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순결한 삶을 살 수 없다. 불금을 불금으로 보내는 것은 그 자체로 나무랄 게 아니다. 나무란다고 들을 사람도 없다. 현실은 현실로 인정하고 그 위에서 이를 전화시킬 것을 사고해야 한다. 도덕적 훈시보다 비판적 거리와 즐거움을 동시에 가지도록 하는 것이 좌파의 성장과 변혁에 더 이롭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대중문화의 지배적 프레임에 들어가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비판적 거리를 갖고, 새로운 문화적 실천들을 통해 지배체제가 포획하려 하는 질서에 마땅히 저항해야 한다.

    이 글에서 나는 몇 가지 지점에서 그런 가능성을 제기해 보았다. 위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해 보다 심층적인 토론은 내 능력을 벗어난다. 그리고 내가 정리한 내용에서도 많은 모순점이 있을 것이다. 문화 연구 분야의 다른 토론자들이 더 심층적인 토론을 이어가길 바란다.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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