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께랄라, 공산당 정부 세우다②
    [현대 인도 인민의 역사]인도공산당의 분당과 발전과정
        2012년 11월 19일 10: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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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케랄라, 공산당 정부를 세우다1를 보시려면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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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께랄라에서의 공산당 정권 수립은 연방 정부를 이끌고 있던 네루와 회의당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충격에 휩싸인 네루는 공산당 정부 수립 2년 뒤인 1959년에 께랄라 의회를 해산하여 공산당 정권을 무너뜨려버렸다. 헌법이 허용하는 바에 따라서 한 것이긴 하나 졸렬한 정치 행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인도는 연방제를 택한 나라이지만 각 주가 주의 헌법을 지닌 미국과 같은 순수 연방제는 아니고, 연방 정부의 권한이 절대적으로 주 정부에 우위를 차지하는 체제이다. 그래서 연방 정부 집권당의 대표인 수상이 임명하는 대통령은 각 주에 주지사를 임명할 수 있고 그 주지사는 주 의회를 해산할 수 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하나의 국민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한 과업이었던 데다가 파키스탄과의 분단의 비극을 겪었기 때문에 단일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자 만든 장치였다.

    네루가 공산당 정부를 해산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선택한 전략은 이 지역에 본격적인 반공 정서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무슬림이나 기독교도와 같은 종교 집단을 통해 반공 캠페인을 벌이는 것과 상층 카스트를 통해 공산당이 정책의 기반으로 삼는 세속 사회 조성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기조는 네루에게는 매우 모순적인 것이다. 네루는 본인 스스로가 대단한 세속주의자이고 무슬림의 종교공동체주의에 대해 끝까지 투쟁한 정치인이었으나 권력 앞에서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전형적인 정치인 그 자체였다.

    께랄라에 공산당 정부를 세운 1957년은 중국공산당이 혁명을 일으켜 중국에 강력한 공산당 정권을 일으킨 파란의 역사를 세운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때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국가의 틀이 허약한 나라의 수상 입장에서는 공산당의 부상이 매우 큰 불안의 씨앗으로 인식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강력한 단일 수준의 연방 국가를 원하는 수상의 입장에서는 파키스탄의 분단 이후 자칫 국가를 또 다시 쪼갤 수 있는 두려움을 가져다 준 공산당 정권을 순순히 인정할 수만은 없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바람직한 정치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공산당 정부가 외부의 힘에 의해 해산된 후 1960년대에 인도공산당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독립 후 인도공산당은 전통적으로 회의당에 우호적이었으나 당내 일부에서 네루의 공산당에 대한 태도 때문에 그에 대해 반감이 생기면서 회의당에 대한 입장 차이가 생기면서 분열의 씨가 싹텄다.

    당내 보수파는 회의당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종교공동체주의를 주장하는 힌두 근본주의 세력과 같은 극우 파시스트 세력을 막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일부에서는 더 선명한 계급 정당으로서의 길을 천명하면서 회의당과 단절하기를 주장했다. 일부에서는 친소와 친중 노선으로 서로 간의 반목 때문에 나뉘었다고 하나 전적으로 맞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 중국이 인도의 국경을 넘어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공산당 지도자들은 국제 공산주의 입장에서 공산주의 국가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그러한 행위를 국가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하였다. 양자 간의 갈등은 상당한 수준으로 커졌으나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인도공산당(M)이 갈라져 나온 것은 아니다. 인도공산당(M)에는 국제주의자와 민족주의자 모두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인도공산당(M)의 창당 멤버들(사진=CPI(M)홈페이지)

    분당은 회의당에 대한 태도의 차이 즉 우파의 입장과 좌파의 입장으로 발생하였다. 1964년에 당 내 좌파가 회의당과의 연정을 반대하고, 또 일부에서는 당의 친소 노선에 반대하면서 탈당하여 인도공산당(마르크스주의자)(이하 인도공산당M)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1964년 네루가 갑자기 죽고 난 후 치러진 1967년 총선에서 인도공산당(M)은 께랄라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 재집권에 성공하여 남부디리빠드를 수상으로 하는 두 번째의 공산당 정권을 이루어냈다.

    그 후 연방 정부 수준에서는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가 수상이 되었다. 인디라 간디는 1975년에 자신의 지역구 선거에서 선거 부정 행위가 빌미가 되어 의원직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인도 현대사에서 유일하게 독재 정치를 하였는데, 인도공산당은 이 비상사태 시기에서도 께랄라에서 회의당과 연정을 하는 등의 정치를 하다가 주민들의 매서운 비판을 받아 지지자를 많이 잃었다. 하지만 인도공산당(M)은 반회의당 노선을 취하면서 지지자를 확보하고 이것이 대중 정당으로서 입지 구축에 큰 역할을 하였다.

    확고한 지지 기반을 다진 인도공산당(M)과 그 정부는 토지 개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냈다. 이제 지주제는 상당 부분 철폐되고 소작인들이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으나, 농업 생산량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이에 공산당 정부는 자신들과 동지적 관계에 있는 시민 사회 세력과 함께 효율적 토지 이용과 과학적 영농을 위한 교육을 현장에 들어가서 주민들과 함께 전개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 바탕이 되는 문맹자 퇴치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시민 운동 방식은 그 효과가 나타나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한계가 있긴 하나 기본적으로 시민 공동체의 신뢰를 높여 사회적 자본 형성이 쉽고 그 위에서 지방 분권화가 잘 이루어질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소위 께랄라식 발전 모델은 바로 이 시민 참여를 통한 사회적 자본 축적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께랄라에서 인도공산당(M)은 1980-81년과 1987-91 그리고 1996년과 2004년에 연정을 통해 집권을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성과를 거두고, 한국의 진보진영 입장에서 참조할 만한 부분이 많으면서 가장 최근의 선거인 2004년 총선을 중심으로 께랄라 공산당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회의당과 인도국민당, 그 사이에서 공산당의 전략

    2004년 총선은 원래 예정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인도국민당(Bharatiya Janata Party)이 주도하는 집권 세력인 민족민주연합(National Democratic Alliance)이 의회를 조기에 해산하고 실시한 조기 총선이었다.

    인도는 1990년 이전까지는 회의당의 일당 독주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부터 이슬람과 무슬림을 적으로 만들어 종교공동체 간의 갈등을 야기시키는 인도국민당의 힌두근본주의 세력이 급속하게 확장되면서 실질적인 양당제가 세워졌다.

    회의당은 국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 인도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력으로, 쉬운 이해를 위해 굳이 비교하자면, 그 진보적 척도가 한국의 민주당과 비슷한 위치라 할 수 있겠고, 인도국민당은 반(反)무슬림이면서 경제 개방을 신조로 삼는, 그 보수적 척도로 보면, 한국의 새누리당 및 그 전신들과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인도국민당은 집권 기간 동안 내내 ‘빛나는 인도’라는 구호 아래 시장 개방과 민영화를 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하게 시도했고, 그 사이에 물가, 실업 등에서 심각한 문제를 만들면서 많은 서민층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2004년 총선에서 인도국민당은 패배를 했고, 회의당 연정은 승리를 해 다시 집권당이 되었다. 하지만 두 정당 모두 득표율에서는 1.6%를 잃어 사실상은 접전이면서 양당 모두의 패배였다. 그리고 그 실질적 승리는 여럿으로 분열되어 있던 공산당 계열의 좌익 정당에게 돌아갔다. 전체 543석에서 좌익 정당은 61석을 차지했다. 그 의석수는 ‘고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수가 차지하는 정치 지형에서의 위치를 볼 때 ‘막강’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께랄라에서는 인도공산당(M)이 주도하는 좌파민주전선(Left Democratic Front)이 이전 1999년 8석에서 15석으로 7석을 늘려 전체 20석의 3/4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2006년 께랄라 주 의회 선거에서도 전체 140석에서 99석을 차지하면서 이전에 비해 56석을 늘려 명실상부한 지역의 집권 여당이 되었다.

    이렇게 좌익 정당이 께랄라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은 무엇보다도 인도국민당 정권이 밀어붙인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 정책에 대해 5년 내내 꾸준히 반대의 목소리를 냈고, 선거 과정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세를 취한 전략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께랄라가 아닌 주, 즉 공산당 세력이 강하게 뿌리내리지 못한 곳에서는 회의당이 그 신자유주의 반대 목소리의 주인공이었고, 그래서 반신자유주의의 성과를 그들이 취해갔다. 인도공산당(M)이 선거가 끝난 후 바로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경제 운용을 주도하는 민영화 추진 관계 부처를 모두 폐지하도록 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은 그들의 성공이 얼마나 신자유주의 반대와 깊은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도공산당(M)은 연방 정부 차원에서 회의당과의 연정을 통해 집권 여당의 일부를 이룬다. 그렇지만 원래부터 회의당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인도국민당과 그 정도가 다를 뿐 그들도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경제의 옹호자였다. 신자유주의 경제를 반대한 것은 공산당 계열의 좌익 정당 뿐이었다.

    하지만 회의당은 2004년 선거에서 인도국민당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정국 운용을 반대하면서 공산당 계열의 좌익 정당들과의 연대를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좌익 정당은 현실에 기반한 정치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회의당의 신자유주의 정치에 대한 사과와 책임, 그런 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인도국민당이 ‘빛나는 인도’라는 이름 아래 사회 양극화를 부추기고, 회의당은 그렇지 않는다 라고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인도 국민당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힌두 근본주의가 힘을 받으면 양극화, 인권, 복지 등 민생과 관련한 모든 아젠다가 그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도국민당을 버리고 회의당을 택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략은 인도와 같은 의회 민주주의 상황에서 적절하게 구사할 수 있는 전략일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은 비록 정치 체제는 다르지만 한국의 진보 진영이 그들의 궤적에 눈을 박고 귀를 열어 신중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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