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자와 남종석 논란,
    욕망의 정치적 구조를 살펴야
    강남스타일, 한류가 소비되고 환대받는 구조와 이유
    By 토리
        2012년 11월 16일 11: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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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의 ‘강남스타일 비판’이 페이스북에서 600명 이상이나 ‘좋아요’를 누를지는 아무도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소재가 강하고 논지가 단순과격하여 화제를 낳았을 거라 추정할 뿐이다. 많은 한국 좌파들에게 지젝이 유행하는 상황에서, 박노자의 논리가 먹힐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글로 돌아가서, 나는 박노자 글을 읽고 글에서 반복되는 ‘천박함’이란 단어가 실제로는 도덕적 위계를 반복하고 좌파의 미덕을 서구 부르주아 중산층 도덕 윤리로 연결짓는 것처럼 여겨져 불편했다.

    그러나 남종석 글은 그 광범위한 미학에 관한 지식과 주장의 올바름과는 별개로, 갈등하는 공간에 대한 고민보다는 ‘유쾌함의 미덕’에 대한 찬양만이 보여져서 또 다른 고민을 안겨주었다.

    우선 박노자는 ‘강남스타일’을 한류와 동일시하면서 한류 비판을 무조건적으로 대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수많은 한류 작품들이 도시적이고 세련된 남녀를 소재로 하고 이에 대한 욕망을 목표로 삼는다면 ‘강남스타일’의 뮤직비디오는 키치적 장면 위에 이러한 욕망의 주체로 싸이로 놓고서 기존 한류의 욕망을 패러디한다. 사실 ‘강남스타일’이 던지는 메시지는 ‘우앙 강남언니들 멋져~근데 우리는 B급이야~푸하하 우리 웃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대로 놀고 먹는 것으로 안전했던 B급 문화가 소위 유행을 타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해외 시장에서 빌보드 상위권에 링크되는 등 국제적 현상이 된 부분이다. 한국에서는 B급 남자였던 싸이가 소위 국제 정상에 오른 점은 패러디에 불과했던 ‘강남스타일’의 욕망 구도를 뒤집어 놓았다. B급의 욕망이 세계적인 것, 보편적인 것, 올바른 것이 될 자격이 있는가 아닌가의 논란이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서 김기덕 영화를 둘러싼 논쟁도 떠올릴 법 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김기덕 영화는 한국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해외에서도 영화제에서나 호평받고 있다는 점이지만, 한국 밖에서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 혐오하는’ 동양 남자의 B급 표현과 상상력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이다.

    박노자의 비판은 한국의 B급 문화가 동양의 ‘이색성’과 ‘창의성’으로 서구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구조에 대한 지적보다 도덕적 비판으로 일관한다.

    ‘천박하고 뻔한 세뇌제’라고 박노자가 비판한다면 나는 그저 박노자가 속한 서구가 그런 ‘천박함과 뻔함’을 동양의 것으로 여기고 선호하고 히트시킨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박노자는 강남스타일이 북한의 주체사상탑만큼 뻔하다고 말하지만, 북한의 면면을 주체사상탑으로 뻔하게 희화화하고 끊임없이 혐오 감정을 일으키면서 소비하는 것은 서구 미디어들이다.

    자신의 위치성을 고민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박노자와 ‘B급 한국’과의 연대 가능성은 점점 더 적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와 한편으로 남종석이 논쟁 글에서 ‘갈등하는 공간’에 천착해야 한다면서 실제 내용에서는 ‘대중이 패러디와 유희로 위안을 얻음’ 만을 길게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우려스럽다.

    남종석의 글을 읽으면 ‘강남스타일’ 내 어떤 정치성들이 갈등을 빚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변혁의 주체로서의 대중과 욕망의 주체로서의 대중이 같다는 지적에는 당연히 동의하나 ‘어떤 욕망’ ‘어떻게 욕망’을 묻지 않음으로써 욕망의 정치성을 탈각시키고 있다.

    남종석의 글에 이어가다보면, 대중은 언제나 자본주의의 힘겨움 속에서 자연화된 욕망을 갖고 있는 주체로만 표현되고, 욕망의 구조는 사라지고 만다. 또한 글 속에서 언급하는 자율주의가 어떤 극좌파인지 알 수 없지만, 자율주의는 언제나 대중의 욕망을 긍정했으며, 자유주의가 박노자식의 비판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강남스타일’ 과 그 히트의 구조를 보아야

    사실 강남스타일 혹은 강남스타일 히트를 소비하고 도덕적으로 옳다/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은 필자의 관심사도 아니고 좌파가 견지해야 할 태도나 입장과도 거리가 멀다. 필자보다 더 잘 설명할 사람이 있겠지만, ‘강남스타일’에서 드러난 구조나 현상을 일견 향유하면서 비판적 거리두기를 하는 방법이 더 적절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거기서 누가 욕망의 주체이며 소비자인지, 혹은 어떤 욕망을 비판하면서 어떤 욕망에 주목할 지를 면밀하게 살펴 보아야 한다. 또 욕망의 정치성을 탈각시키는 구조가 무엇인지 드러내야 한다.

    이를테면 한류에 대해 한국산 자본주의의 무비판적 확장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한류라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이 되지 못한다.

    이에 관해서 필자는 외국 필자의 글에 힌트를 구한 바 있다. 빌보드와 할리우드 리포터의 한국 특파원이었던 마크 러셀씨는 ‘강남 현상’이란 글에서 한류가 ‘상업성과 화려함, 야함’을 무기로 하면서도 오히려 안전한 가족, 순결한 사랑, 도덕 등에 뿌리를 두고 성인이 보기에 ‘문제적이지 않은’ 연예인들을 홍보함으로써 국제 사회에서 폭넓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진단한다. 즉 한류가 아시아권, 그리고 일부 서구의 안전한 중산층 욕망에 호소하면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의 노골적이고 위험한 성산업과 달리 여성을 ‘위험하고도 안전하게’ 성적 대상화하면서 오히려 안전한 가족 등 중산층 가족의 가치를 홍보하는 점에서 ‘욕망하면서 금지하는’ 구조가 소위 한류의 미덕인 셈이다. 한류가 확산되는 세계 시장의 소비 구조가 씁쓸해지는 이유이다. 이러한 구조를 두고도 ‘상업성과 화려함’만을 질타하는 것이나 ‘일상의 유쾌함’만을 찬양하는 것은 둘 다 욕망의 정치적 구조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필자소개
    LGBT 인권운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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