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쟁을 피하지 않겠다”
    [아빠의 현대사43] 2000년 전국노동자대회 그 때에는...
        2012년 11월 15일 05: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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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죽이고 나를 버리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전태일 유서 중에서)

    마침 이 글을 쓰는 오늘이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신지 42년이나 지난 그 날이다. 매년 11월 13일을 전후하여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후 98년부터 계속되어 온 행사다. 11월 13일은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신 날이다. 올해에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평회시장앞에서부터 서울역까지 행진을 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비바람이 몰아 쳤지만 올해도 수만명이 대회에 참가하여 “비정규직 철폐”등을 외쳤다.

    지난 글에서도 썼듯이 90년대에는 이 대회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전투였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새로운 천년을 여는 해의 전국노동자대회를 맞으면서 우리는 경찰폭력과 김대중 정부의 노동자 탄압에 대해 강력한 저항의 몸짓을 보여야 했다.

    너희들은 “왜 경찰들하고 싸우지?”라며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촛불집회 때에도 한편으로는 경찰의 폭력을 무서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경찰하고 싸우지 말자고도 했던 너희들을 기억한다. 그 얘기는 조금 미루자.

    2000년 11월 12일이었다. 전태일 열사 분신 30주기를 맞아 전국노동자대회가 대학로에서 열렸다. 전체 2만여 노동자들이 참가한 이날 집회에서 우리는 “제2의 실업대란 일으키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중단, 월차·생리휴가 폐지 등 제2의 노동법 개악 음모 중단,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 근무제 도입,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차별철폐”를 요구했다.

    2000년 노동자대회 포스터

    집회를 앞두고 “전국노동자대회가 다가오는데 집회와 투쟁이 너무 무기력하다.” “구조조정과 근로기준법 개악 등을 목전에 두고 열리는 노동자대회에서는 DJ 정권에게 분명한 선을 긋는 게 필요하며, 우리 노동자가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위력적인 가두투쟁이다.”는 등의 의견이 많았다.

    당시 나와 조직쟁의실의 의견은 이랬다. “최근 우리는 계속 맞고 깨지기만 했을 뿐 막상 싸우려할 때 실천대오가 없는 게 현실이다. 여태껏 학생들에게 의존해 왔다면 이제는 ‘선봉대’를 꾸려서라도 노동자의 몫으로 가져올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1천여명의 [부활하는 전태일 선봉대]였다. 그 날 우리는 작심을 했다. “때리지 마!”라고 쓴 공사용 모자도 특별히 만들었다. 경찰이 던진 돌에 머리를 깨지고 다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이전에는 가두행진은 경찰의 폭력 앞에 좌절되기 일쑤였다. 경찰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거리행진을 막거나, 지하도로 들어가게 하거나, 참가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로만 행진을 허용해서 시민들의 불편을 사게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는 집회가 열릴 만한 도심 곳곳에 공원을 핑계로 나무 등을 많이 심는 등의 방법으로 원천봉쇄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곳이 종묘공원이다. 이전에는 집회를 많이 했지만 지금은 할 수가 없다. 물론 시민들의 휴식처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공간도 중요하다.

    오늘 신문에 난 칼럼을 보니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라는 프랑스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다고 한다. 막 집에 돌아 온 딸이 엄마에게 “데모 때문에 차가 막히고 난리가 났어요.”라고 하자 엄마가 “불쌍한 간호사들이 파업도 못하냐? 여긴 미국이 아냐?”라고 대답하는 장면말이다. 그런 대답이 상식이 되는 날이 언제나 올까? 요즘도 경찰은 집회가 열리면 경찰차량으로 도로를 가득 메운다. 통행에 불편을 끼치는 것은 물론 집회 참가자 탓도 있지만 거리 곳곳을 메운 경찰차량 때문이기도 하다.

    에피소드 1.

    두 남자가 무대 옆에 세워둔 트럭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번호판을 외우는 것 같았다. 암만 보아도 사복경찰이 틀림없었다. 마침 옆에 있던 당시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박상윤 조직부장에게 눈짓을 했다.

    한 번에 알아차린 상윤이는 동료들과 함께 그들을 에워쌓았다. 그리고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들은 신분을 증명할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있었다. 지갑도 없었다. 틀림없었다. 상윤이는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도망가려던 그 중 하나의 머리를 쳤다. 피가 나고,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에 눈짓으로 보내주라고 했다. 그런데 막 집회 사회를 보려고 준비하는 데 그 둘 중의 하나가 윗옷을 훌렁 벗고 무대 계단 밑에서 소리소리 지르는 거였다.

    “민주노총이면 다냐? 왜 무고한 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냐?”
    “당신 직업이 뭐냐?”
    “연대 앞에서 복사가게를 한다.”
    “연락처 좀 줘봐라. 확인하자”
    “오늘은 다 노는 날이다. 일요일 아니냐? 여기 내 친구도 있다. 지나가는 길에 구경하는 데 다짜고짜로 사람을 때리는 게 민주노총이냐?”

    순간 멈칫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년을 노동운동을 하다 보니 경찰도 우리를 알아보고, 우리도 경찰을 한 번에 알아 볼 수 있다. 만약 잘못 판단한 것이라면 큰일이겠다 싶어 바로 근처 서울대병원으로 데려가 다친 머리를 꿰매주고, 명함을 주었다. 찝찝했지만 말이다.

    그 날 집회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마구 쌍욕을 해댔다. 나는 다음날 보자고 했다, 만일 후유증이 있다면 치료비도 준다고 했지만 내심 경찰이 확실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당한 셈이다. 그처럼 용감한(?) 사복경찰도 있었다. 그 날 한 번에 사복경찰들을 제압한 박상윤도 지금은 전태일 열사가 묻혀있는 마석모란 공원에 있다.

    집회는 처음부터 전투였다. 경찰은 대학로 입구를 완전 봉쇄하고, 일체의 집회 물품의 반입을 저지했다. 집회전부터 곳곳에서 가로수를 받치는 나무를 뽑고, 깃대를 가지고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졌다. 짧은 집회를 마치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이날 경찰은 1만여명이나 동원되었다. 2백여명이 부상당하고, 25명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경찰들은 심지어 방송차량의 유리창을 깨고 차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다. 방송차량 10대이상이 파손될 정도로 격한 투쟁이 계속 되었다.

    에피소드 2

    당시 조직쟁의실장이었던 나와 네 학교 후배인 주협이 아빠인 신언직 조직국장은 전체 대오의 선두에 있었다. 방송차량에 올라타서 한참 방송을 하다가 탑골공원 근처에서 행진을 막는 경찰들과 대치를 하게 되었다. “폭력경찰 물러가라” “평화시위 보장하라”며 대오를 정비하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오는 뒤로 빠지기 시작하고, 방송차량은 완전 포위가 되었다. 우리 주위는 모두 시꺼멓게 무장한 경찰들뿐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우리 방송차량을 지나 그냥 뛰어 갔다.

    온 몸에 소름이 쫙 퍼졌다. 방송차는 완전히 경찰대오 가운데 서 있었다. 언제 마음이 변해 두들겨 맞을지도 모르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 장소에서 경찰이 던진 벽돌에 머리를 맞아 당시 민주노총 부위원장이었던 김영대가 병원으로 실려가기도 했다. 거의 머리 전체를 들어낼 정도의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던 그는 후에 국민참여당에 들어가 국회의원을 했었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외면하고 말이다. 내가 속한 연맹 방송차도 경찰에 의해 파손되고, 운전하던 현광훈 교육국장이 코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심지어는 일본에서 노동자대회에 참가한 일본 철도노조인 JR동노조 사또라는 선전부장도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다치기도 했다. 우리는 현장에서 바로 경찰의 과잉 폭력진압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집회 이후 검찰은 지난 98년 6월 조폐공사 파업유도 취중폭로 사건 이후 중단됐던 ‘공안대책협의회’라는 걸 부활시키고, 사진 판독으로 신원이 드러난 시위 참가 노동자에 대해 연행에 나서기 시작했다. 대구 델파이노조 조합원 3명, 한통계약직노조 부산본부 2명과 대전본부 1명 등 모두 6명이 강제연행 해 서울로 이송되기도 했다.

    이런 경찰과 검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 내부는 평가가 좋았다. “그동안 억눌리고 쌓여왔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우리는 민주노조운동의 침체와 판에 박힌 투쟁에 경종을 울리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가는 획기적인 가두 투쟁을 벌여냈다.” “민주노총의 전투력 복원에 큰 의미가 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분노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라는 등의 의견이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왜 경찰과 싸우는 지를 잠시 얘기하자. 우리가 흔히 “공권력”이라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경찰들은 지배 권력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잔재가 청산되지 않는 과정에서 경찰 역시 ‘민중의 지팡이’라기 보다는 ‘민중의 몽둥이’가 되곤 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백골단이라는 무시무시한 체포조가 있었고, 그 이후에는 별도로 훈련받는 진압부대가 있어 집회에 투입되었다. 그들이 바로 롯데호텔에 들어가 여성노동자들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가했었다. 이런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대우자동차에서는 평화시위를 상징하기 위해 윗옷을 벗은 노동자들에게 무차별한 폭력을 가하기고 했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진압시에는 대 테러무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백주 대낮에 집회를 하다가 노동자 한명과 농민 두 명이 경찰에게 맞아 죽기도 했다. 가장 가까이는 용산참사를 기억하면 되겠다.

    순수한 마음으로 경찰에 들어간 대부분의 사람들로서는 억울하겠지만 결국 민중들의 손에 권력이 쥐어지지 않는 한 경찰은 공공의 이익보다 자본의 이익을 지킨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 네가 읽은 한나 아렌트의 책을 생각하면 더 쉽겠다. 그들 역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평범한 사람들이다. 최근 개봉된 돌아가신 김근태 형을 경찰들이 고문한 내용을 담은 ‘남영동 1985’는 그 과거에 대한 기록이다. 아프지만 기억할 내용들이 너무 많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2000에 대한 기억을 마치기 전에 하나만 더 남겨두자. 그해 6월 15일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역사적인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한다. 우리 민족끼리 통일을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내용이 중심된 것으로 남북간의 갈등을 푸는 중요한 전기를 만든 것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며 맨땅 단식농성을 진행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저버렸다.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구속한 국가보안법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필자소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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