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종석 비판에 대한 반론
    진보적 대중문화는 자본 중심의 '문화'와 거리두기 필요
        2012년 11월 15일 10: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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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전혀 다른 주제에 대해 글을 쓰려 하다가 돌연히 방금 <레디앙>에서 저의 지난번 글, 즉 “강남스타일” 관련 비판에 대한 저희 진보신당의 당원이신 남종석 선생의 반론 을 접하여 아무래도 남종석 선생에게의 답을 써드리는 게 예의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예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는 남종석 선생이 그렇지 않아도 분명히 공개적 논쟁의 주제가 돼야 할 매우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셨기 때문에 그 분의 논지에 대해서 몇 마디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적으로 밝혀두어야 할 부분은, 아주 거시적인 大義 차원에서는 저는 남종석 선생과 의견을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진보좌파 정당의 문화노선은 대중노선이어야 하고, 당연히 대중들이 실제로 향유하는 문화를 중시해야 하고, 당연히 대중들이 실제로 향유하는 문화, 그리고 잠재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문화의 각종의 전복적인, 반체제적인 가능성들도 중시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아무런 이견은 없는데, 현금 “대중문화”의 현주소 진단, 그리고 저항적 대중문화의 건설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을 다소 달리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미리 밝혀두어야 할 부분은, 저의 이 글은 완성된 논문 내지 평론이라기보다는, 시간 부족 (오늘 오후에 양육노동을 해야 합니다. 내일 특강차 외유해야 하고요)의 상황에서 쓴 다소 간단한 “답변”이라는 점입니다. 이 답변의 논지를 살려 나중에 보다 보완하여 상론하려고 합니다.

    남종석 선생의 비판의 논점은 두 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는 제가 “강남스타일”의 패러디적, 풍자적 성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과연 (자본주의적, 상업적)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과 적대성만으로 좌파적 문화운동이 가능하느냐, 대중들이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그 “대중문화”와 대화를 하면서 그 안에서의 전복적 가능성들을 모색해야 하지 않느냐, 과연 아도르노적인 대중문화비판론만이 능사냐, 이렇습니다.

    저는 “특수 문제”인 전자에 대해서 간단하게 답변을 드리고, “보편적 문제”인 후자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논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끝에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말씀 몇 마디 드리겠습니다.

    일단 전자의 “특수 문제”부터 이야기하자면, 남종석 선생의 말씀은 일면 당연히 맞습니다. 물론 “강남스타일”은 패러디 맞죠. “강남”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그런데 그러면서도 은근히 강남을 부러워하는), 그리고 지속적 불황으로 가면 갈수록 피폐해지는 사회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비디오를 만들지 않고서는 과연 대중적으로 유통시킬 수 있을까요?

    풍자하면서도 다이어트와 헬스로 단련 (?)되어진 수많은 반나의 여체들을 과시시킴으로써 특히 남성 시청자들의 “야한 상상력” (?)을 은근히 부추기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저는 대중문화 비평의 전문가도 아니고 제 분야도 아닌데, 저의 극도로 일반적인 육안으로 본다면 바로 이와 같은 풍자와 향유의 절묘한 “혼합”이야말로 해당 업계에서 성공의 비결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상업성이 좋은 패러디가 나왔다고 해서, 강남특별시가 과연 위기의식을 많이 느낄까요? 이런 패러디는 강남특별시 피해자들에게 무기가 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위안이라도 될까요? 대마초나 모르핀과 같은 위안이 아니고서 말씀입니다.

    그러면, 인제 “보편적 문제”로 이동해봅시다. 당연하게도, 좌파는 대중문화라는 현상 자체를 무조건 적대시할 필요야 없죠. 좌파의 근본이라는 것은, 남종석 선생의 말씀대로 바로 이성, 즉 대중들이 왜 이런 문화를 향유하게끔 돼 있느냐 라는 상황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입니다.

    예컨대 고된 장시간 노동과 미래 전망의 절대적 부재로 매일 저녁마다 소주를 마시면서 텔레비전으로 축구를 좀 보는 것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는 노동자를 우리가 당연히 “저질 문화 소비자”라고 멸시할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가 왜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사실상 강요 당했는지를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적어도 가능한 한 설명해야 하지 않습니까? 소주라는 게 심신에 절대적으로 유해하다는 점과 텔레비전 축구는 비록 유해하지 않아도 적어도 전혀 좋지 않다는 점을 말씀입니다.

    우리가 만약 소주, 축구와 타협한다면 이는 소주와 축구로 돈을 벌면서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의 개인적 시간까지도 식민화한 자본과의 타협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걸 남종석 선생께서도 전혀 하려 하시지 않는다고, 전 확신합니다.

    최건의 '일무소유'

    그 다음 대안의 문제입니다. 남종석 선생께서도 저 이상으로 익히 아시고 계실 바이지만, “근로대중들의 대안적 문화”의 건설 시도들은 19세기말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지역,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다 있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대안적인 문화는 충분한 대중성을 늘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남종석 선생께서도 예컨대 노찾사를 꽤나 좋아하시지 않으실까, 싶어요. 우리가 이와 같은 시도들을 계속 하고, 지속적으로 상품성이 없어도 인간 고통에 대한 동감과 연대의 메시지가 담겨진, 이런 진짜 문화를 만들고 대중화시키면 안될까요?

    남종석 선생께서 사시는 (그리고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바닷가 도시 부산과 가까이 있는 나라는 일본인데, 거기 같은 경우에는 1948년 2월달에 중앙합창단이라는 민중음악 단체가 창립되고 “우타고에” (노랫소리) 운동이 펼쳐진 뒤에는 국내 민요부터 외국의 운동가요까지 다 새로운 저항적인 음악문화의 소재로 전유해보려는 너무나 재미있는 시도들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면 예컨대 “우타고에”의 팬들이 민중이 아니고 귀족인가요? 사실 인접 국가들에서의 이와 같은 시도들에 대해서 잘 연구하지 않고 대중적으로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저를 포함한) 국내 지식분자들의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아니면, 예컨대 1980년대 이후의 중국의 대중 가요 문화를 한 번 보시죠. “一無所有” 등 최건 선생 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국가 사회주의” 틀을 벗어나 진정한 인간 중심의 “나은 사회”를 찾으려는 엄청난 열정이 느껴집니다. 이것도 “저항적 대중 문화”가 한 가지 중요한 전례로 삼을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아, 지금 시간 부족으로는 보다 상론하지 못하고 다음 기회에 미루지만, 좌우간 제 논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진보적 대중 문화”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도들의 출발점은 바로 기존의 상업적인, 자본 중심의 “문화”와의 거리두기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끝으로 덧붙일 개인적 이야기지만, 남종석 선생의 생각과 달리 오슬로대는 “성지”는 아닙니다. 비정규직의 비율이 인제 약 25%나 달하는, 가면 갈수록 사민주의적 틀을 벗어나 일반적인 자본주의적 착취공장으로 변모돼가는 매우 평범한 자본주의적 “교육/지식 공장”입니다. 자본주의적 세게에서는 “성지”는 없어요. 그 자본주의의 본질은 아무리 사민주의적 표피로 덮여져 있어도요.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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