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께랄라, 공산당 정부 세우다①
    [현대 인도 인민의 역사]그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것들
        2012년 11월 12일 11: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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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외국어대의 이광수 교수가 현대 인도 인민들의 역사라는 주제로 <레디앙>에 연재를 시작한다. 유럽과 북미로 우리의 시야가 좁아져서는 안된다는 생각, 아시아라는 공간과 그 아시아 인민들의 역사와 투쟁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모른다는 생각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동기이다. 동시에 그들과 우리는 공유해야 할 과거도 많을 뿐더러 함께 해야 할 현재의 연대와 교류의 과제도 많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인도 인민들의 역사가 그들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되기를 바란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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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은 한국의 좌파가 너무나 큰 시련을 당한 해다. 진보 진영은 갈기갈기 찢기고 대선을 눈앞에 두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어떤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국민들에게 잊혀진 그리고 외면당하는 그 시련은 언젠가는 와야만 할 것이었고, 당연히 맞아야 할 예방주사다. 한국 땅에서 비록 형식적일지라도 민주주의가 시작한 지 이제 30년이 갓 지났고, 지금의 진보정당 체계가 시작된 지는 고작 십 수 년이 지났을 뿐이다. 뿐만 아니다. 그 진보진영 사람들은 마르크스와 그람시는 잘 알지만, 비교적 우리와 가까운데다 여러 가지 비슷한 상황을 공유하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서 일어난 인민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선 너무나 알지 못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진보진영의 역사가 순탄하게 나갈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비극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 점에 있다. 그 둘을 묶으면 인도라는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근대의 인민들이 어떤 역사를 전개해 왔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한국에서의 인민의 역사를 생각해보고 그 위에서 위기에 처한 진보세력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지혜를 얻어 보고자 해서다. 이렇듯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쓰는 – 어떻게 보면 위험할 수도 있을 정도의 목적론적 진보사관에 입각한 – 역사이기에 교과서나 개론서에서 기술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그 방식이란 시간의 흐름을 보통의 것과 반대로 즉 최근의 시점에서 시작하여 과거의 시점으로 향하는 방식을 택하고자 한다. 그 하한선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는 지점이다. 하한선을 그렇게 잡은 것은 현대 인도의 역사가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2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영국의 식민지를 벗어나 정치적 독립을 했다. 파키스탄과의 분단을 안은 채 쟁취한 상처가 큰 영광이지만, 절반의 성공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도라는 나라가 200년 동안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 영국의 지배를 정당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하나의 근대적 국민국가로 만들어지기에는 너무나 큰 이질적 실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필연적 사실보다는 인도가 독립 이후 이뤄 가고 있는 민주주의의 진전이 있었기에 더 높은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민주주의의 진전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군사 쿠데타나 독재 시기가 (1975년 당시 인디라 간디 수상이 시도한 비상계엄 선포라는 잠깐의 시기를 제외하고) 없었다는 사실과 선거를 통해 공산당이 집권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인도는 두루 알다시피 여전히 사회 구조가 매우 봉건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다. 카스트에 따른 차별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그것은 법이 아닌 실제의 일상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다. 투표장을 높은 카스트들이 거주하는 곳에 설치하여 낮은 카스트가 원천적으로 투표를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고, 브라만 지주에게 저항하면 밤에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엄마와 딸을 동시에 강간하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낫으로 찍어 죽여 버리는 끔찍한 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진다. 결혼 후 지참금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거나 적게 가져온다고 – 결혼 지참금은 통상 세 차례 즉 결혼 계약할 때, 결혼식장에서 그리고 결혼 후에 가져온다 – 부엌에 집어넣고 불태워 죽이는 일은 인도를 아는 사람들에겐 별로 놀랄만한 뉴스가 아니다. 또 부패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나라이기도 하면서 문맹자가 전체 인구의 35%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다.

    이런 상태에서 한 편으로는 하느님과 버금갈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마하뜨마 간디가 민족운동 시절 때부터 이끌고 그의 정치적 제자인 초대 수상 네루가 세운 인도공화국의 집권 여당을 40년 동안 해 온 인도국민회의 (이하 회의당)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고 또 다른 편으로는 파키스탄과 이슬람을 악마로 만들어 전체 국민을 힌두교로 묶어 전국을 종교 근본주의의 광풍으로 휘몰아 친 인도국민당이 무섭게 몰아닥치고 있다. 이 뿐인가 연방 수준이 아닌 주(州)와 그 이하 단위의 수준으로 가면 카스트주의에 따라 무조건 자신이 속한 카스트에 몰표를 주는 정치 행태가 벌어지는 나라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은 이런 인도의 민주주의를 무늬만 민주주의라고 혹평하면서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라고 떠벌이는 것도 일방적이고, 그렇다고 무늬만 민주주의라고 혹평하는 것도 일방적이다. 그것은 이런 참담한 사회 정치적 환경 속에서 연방 수준은 물론이고 주 수준에서도 지속적으로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더라도 가벼이 넘길만한 것은 아니다.

    회의당이 네루의 후광을 업고 그의 딸 인디라 간디, 인디라 간디의 아들 라지브 간디가 연이어 연방 정부의 수상으로 집권을 하고, 라지브 간디의 부인 소냐 간디가 집권 여당의 당수로 현재 활약하고 있고 차기 수상으로 가장 유력한 이가 네루의 증손자이자 인디라 간디의 손자인 라훌 간디라는 사실은 투표를 통해 이룬 것이지만 실제로는 네루 왕조와 전혀 다름없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또 인도국민당이 1990년대에 들어와 거대 야당으로 성장해 양당제가 이루어지고, 40년 만에 정권 교체까지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국민들에게 인도-파키스탄의 분단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힌두교와 이슬람 사이의 종교 갈등을 부추기고, 폭력을 사용하면서까지 세력을 규합하여 이룬 것이라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전이라 평가할 수 없다는 비판 또한 충분히 수용할 만하다.

    인도공산당(M)의 거리 행진 모습

    하지만 서벵갈과 께랄라에서 공산당이 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했다고 하는 사실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가절하 할 수 없다. 설사 집권 정당으로서 공산당이 갖는 한계가 분명할지라도 그 사실마저도 폄훼해서는 되지 않을 일이다.

    이제 께랄라에서 공산당이 투표를 통해 어떻게 정부를 수립했는지, 그 전략은 어떠했고, 그 한계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인도에서 공산당이 첫 출발을 한 것은 1920년대 초반의 일이다. 영국이 1934년 공산당을 불법으로 규정하여 초기에는 그 당세가 매우 미약했지만 1943년에 합법화를 한 이후로는 당세가 크게 성장하였다.

    1947년 인도가 독립을 한 후 인도공산당은 러시아식 혁명 노선을 택하여 전국 총파업을 통한 정부 전복을 꾀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에 들어와서는 중국의 마오주의 혁명 방식인 게릴라 무장 투쟁 방식을 택했으나 마찬가지로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당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과거 영국 식민 지배 당시에는 주로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저항 운동에 몰두하면서는 세를 점진적으로 확보하였으나 독립 후 러시아와 중국의 체제 전복 혁명 방식을 전개하면서는 대중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간디의 비폭력에 기반한 민족주의나 네루의 국가 중심의 사회주의에 인민이 속거나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1930년대 이후로 종교공동체주의가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갈등이 확산되고 그것이 블랙홀처럼 계급이나 사회 변혁에 관한 문제를 모두 빨아들여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카스트 중심의 봉건적 구조가 워낙에 강고하여서 인민 유혈 혁명이 불가하였을 수도 있다. 그 다양한 이유 위에서 인민들은 무장 투쟁을 통한 체제 전복을 꾀한 공산당을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1951년 인도공산당은 소련과 중국의 무장 혁명 방식을 폐기하고, 인민민주주의(People’s Democracy)를 당의 새로운 노선으로 천명한다. 이는 당을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권력을 잡는 제도권 정당으로 위치시킨다는 의미이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은 의회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서 선거를 통해 지역 수준이든 연방 수준이든 다른 보수 정당과 연정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고, 권력을 획득한 후 사회 변혁에 나서겠다는 것을 당의 제1 강령으로 채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1957년 께랄라에서 공산당이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공산당 정권을 수립했다는 획기적인 일대 사건을 접한다. 인도공산당이 께랄라 주에서 공산당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부터 이곳의 공산주의자들이 문맹 퇴치 교육운동에 헌신하였고, 그 결과 께랄라가 다른 곳에 비해 주민들의 문자 해득율이 높아 특정 교육에 대한 수용 토대가 잘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초대 수상 남부디리빠드(E.M.S.Namboodiripad)를 중심으로 한 인도공산당은 주민 교육 운동을 토대로 하여 카스트 개혁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등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이와 더불어 향후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 변혁에 더 강고한 주민 조직화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선거가 그렇듯 1957년 선거 지형이 께랄라에서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공산당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도 연방정부를 구성하는 첫 선거인 1952년에 집권 여당이 될 것으로 모든 사람이 예상하고 있던 회의당은 전국적인 엄청난 조직과 힘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두 가지의 치명적인 결함 또한 갖고 있었다. 우선,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민족운동을 이끌어 온 덕에 독립 국민국가에서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 방대한 조직이 부패의 유산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또 하나는 회의당은 원래 간디를 중심으로 하는 탈중앙, 탈근대, 농촌 중심의 ‘건설적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집단과 네루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 자본 엘리트 부르주아 중심의 강력한 국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전자는 간디가 암살당한 1948년 이래로 정치에서 손을 떼고 농촌으로 하방 하여 농촌 개발에 힘을 쏟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1956년 께랄라 주가 기존에 속해 있던 안드라 주로부터 독립하여 같은 언어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독립된 주를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께랄라는 38,863 km2 즉 남한의 1/3보다 조금 더 큰 면적을 가진 주가 되었다. 2011년 현재 인구는 3천 3백만 명 정도 된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이 컸고,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곳 주민들의 언어 민족주의의 지지를 크게 받았다. 이때까지 공산당은 사회주의적 국가 자본주의를 당의 강령으로 삼은 회의당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전국적인 강력한 힘을 간접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1957년 선거가 올 무렵 이 지역에서 회의당은 지역 당원들의 부패 독직 사건이 잇달아 터지고, 농촌으로 돌아간 간디식 사회주의자들이 친공산당의 입장을 표명하면서 인도공산당에게 매우 우호적인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반회의당이면서 반공산당인 다른 야당은 주로 종교공동체에 의존하는 힌두나 무슬림 정당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종교공동체 갈등이 심각하지 않은 이곳에서는 그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1957년 4월 5일 세계 최초의 투표를 통한 공산당 정부가 께랄라에서 탄생하였다.

    필자소개
    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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