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
    [국경을 넘어 함게 꾸는 꿈] 아서왕의 성배는 어디에?
        2012년 11월 08일 05: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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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윤주씨가 국제연대, 아니 국경을 넘어 함께 꾸는 이상을 위한 사람들의 이야기,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를 게재하기로 했다. 이윤주씨는 한국의 초창기 이주노동자운동에 함께 하면서 국제연대의 필요성을 체감했고, 공공연맹의 활동가로 일하면서 현장투쟁과 국제연대의 깊은 연관성을 느끼고 또 그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다. 이후 영국과 스페인 등지에서 노동운동, 공공정책, 국제연대에 대해 공부했다. 물론 끝내지는 못한 공부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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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세기의 어느 해, 지구 전체가 사회주의 단일정부로 통일된 세계국가 ‘아디스(가상국가명)’의 한 문헌 학자는 어니스트 에버하드라는 700년전 혁명가의 생애와 투쟁에 대한 기록을 발굴해내었다. 그는 이제는 소멸되고 없어 교과서에서나 배울 수 있는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맞서 얼마나 수많은 혁명가들이 뜨겁게 투쟁했으며 어떻게 참담하게 아스라져 갔는지를 세상에 알린다. 그러면서, 그는 일갈한다. 명실상부하게 헌신적인 혁명가였으며 20세기 초반에 노동계급의 철학을 확립, 해석하는 업적을 남긴 어니스트조차도 ‘편협한 지역주의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지만 그 문헌학자는 이렇게 위로를 보낸다. 그것은 결점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시대상에 기인하는 것이고 그 시대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혹 오다가다 윗 글을 보신 독자 중에서는 레디앙 칼럼이 어쩌다 이 지경의 엉토당토 않은 환타지 소설란이 되었는가 하는 분도 있을 것이고, 뭉근한 향수에 미소를 띄우실 분도 있을 것이다.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잭 런던의 수작(秀作) 소설 “강철군화”(1989, 한울)는 이렇게 시작한다. 책은 가상인물 어니스트의 일생과 투쟁을 통해 혁명과 반혁명의 기록을 밝혀내는 형식을 취하지만, 실상 (역자의 말마따나) 잭 런던의 ‘묵시록’이다.

    1906년 이 소설을 쓰고 1916년에 생을 마감한 잭 런던은, 짜르체제를 뒤엎은 1917년의 프롤레타이아트 혁명을 보지 못했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로 무장한 파시스트들의 무서운 성장 속에 발발한 제 1차, 2차 세계대전을 보지 못했다. 또한 그 와중에 그리고 그 이후로도 지속되고 있는 소위 ‘프롤레타리아트’ 진영 내의 분열과 배신, 타락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이라도 한 듯이 근현대사의 그러한 단면들이 담겨져 있다. 정치권력과 이를 수호하기 위한 비밀경찰이 얼마나 야만스러워질 수 있는지, 국가기관이 얼마나 민족우월주의와 국가주의의 외피를 입고 타자(他者)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기관과 정치권력을 움직이는 자본의 전략은 21세기의 지금 현실이라 해도 수긍이 갈만큼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혁명 세력의 분화와 배신에 대해서도 작가는 예리한 예지력을 가지고 있다. 잭 런던의 날카로운 펜 끝은 자본주의를 겨냥하고 있었지만, 이 소설은 공산주의국가를 자처한 구소련의 정치권력으로부터도 대접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강철군화 속의 군국주의 관료들과 별반 다른 모습이 아니었던 구소련 관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는 이유에서 찾아진다. 또한 그가 소설 속에서 생생하게 그린 자본가와 노동귀족의 야합은 당시에는 너무도 불경스런 상상이라고 치부되었을 수도 있겠다.

    이 글이 서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설 강철군화에 대한 이야기로 서설이 길어지는 것은, 간만에 꺼내든 잭 런던의 묵시록에 아마도 내 스스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저하게 나누고 구분하는 자본주의 본질(출처 www.revleft.com)

    이 책은 이십수년전에 내 가슴을 뛰게 했고, 그리고 내 뇌리속에 내내 박혀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하지 못해도 어쩌면 난 그 때 내 인생길의 큰 방향을 찾았었다. ‘국가가 소멸된 하나의 세상’에 살고 싶다며… 흔히 나의 바람은 ‘공산주의’로 직역되었으며, 나보다 몇 권 더 읽은 학생운동 선배들은 ‘사회주의’부터 쟁취해야 한다며 내 뇌에 모내기를 시도했다. 그들은 왜 그랬는가? 레닌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가는 사다리’라고 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유행어처럼 운운되던 것도 벌써 한세대 전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건재하여 잭 런던이 그려낸 1912년부터 1931년경까지의 사회상과 지금의 현실이 별반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노동분할 전략에 지배 방식이 그러하다. 자본과 정치권력이 밑바닥 노동자와 실업자들을 도시 중심부에 몰아두고 방치하여 비참한 게토를 형성하는 한편, 도시 근교엔 학식있고 돈있는 노동자층을 자기 편으로 현혹하기 위해 멋지고 안락한 집들을 세워줄 것이라고 잭 런던은 예언(?)했다. 이는 안과 밖이 바뀌었을 뿐 요즘 대세인 정치지리학자 사스키아 사센(Saskia Sassen)이 내세운 국제적 대도시론과 사뭇 일치한다.

    그녀는 전 세계 잘나가는 대도시들을 연구해보니, 도시 중심부에는 상층 노동자들이 살고, 도시 외곽엔 도시 중심부를 청소해주고, 먹여주고, 뒷치닥거리 해주는 하층 노동자들이 살고 있더라는 사실을 통계적으로 밝혀내었다. 출퇴근 시간도 더 걸리고 차비도 더 들지만 하층 노동자일수록 도시 중심부에서 점점 더 먼 곳에 둥지들 틀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도 피부로 느끼는 지점이다.

    살인적인 물가에도 불구하고 시골에서 혹은 저개발 국가에서 세계적 대도시(Global city)로 몰려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센은 자본이 모이는 곳에 노동이 모인다고 말한다. 금융이나 정보산업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전략은 그 세계적 대도시로 고차원적인 서비스와 이를 제공하는 노동자들을 집중시켜 놓았지만, 역시 이들의 노동은 하층 노동자의 뒷바라지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층노동자의 자리를 채울 이주노동자들을 유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기보다는 국가의 노동력 분할 정책들과 제도들로 실행된다. 한국 정부가 단순노동력을 급조하기 위해 저개발 출신 입국자에게 관광비자(!)를 남발하다가, 그렇게 들어온 노동자들이 정착할 것 같으니까 ‘고용허가제’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만들어서는 기존에 들어온 “불법”인간들은 다 나가라며 인간사냥을 벌이고 있는 것도 한 예다.

    바르셀로나의 한 은행. 금융자본주의 반대 낙서가 아직도 남아있다(사진=이윤주)

    다른 선진국들도 ‘미등록노동’ 심지어 인신매매까지도 눈감다가 국가의 통제력이 위협받을 때 즈음이라고 느끼면 수갑과 총을 꺼내든다. 잭이 그린 20세기 초반과 지금의 모습에서 국가의 편파성과 잔인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밑바닥 노동자에 대한 막연한 경멸과 차별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

    자국 출신 노동자들이라고 국가는 관대할까? 잭은 자본가가 초과 이윤을 확대하기 위해서 불공정한 노동(생산)계약을 강요하며 ‘받아들이든지 나가 굶어 죽어라’한다고 했다. 잭의 예언은 적어도 유럽에서 노동집약적 산업의 고성장을 발판으로 노사가 평화협약을 유지하던 때만 해도 틀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자본 축적의 위기가 닥쳐오자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노동유연화라는 구호로 진행된 지난 2-30년간 진행된 신자유주의 노동분할 정책의 결과로 노동자간 생존경쟁은 심각해져 있고, 노동조합도 힘을 잃게 되었다. 불공정한 계약을 강요하기 위해 전세계적으로 노동법 개악이 이루어졌으며, 노동조합에 대해선 무자비한 폭력과 비열한 공작도 자행되었다.

    결과적으로 한때 고성장과 노사협조주의를 기반으로 상대적으로 높은 복지서비스를 받았던 유럽의 고령 노동자들도 연금 삭감과 의료 서비스 사유화로 ‘나가 죽게 생겼다’. 유럽의 젊은이들은 ‘취업’조차가 어렵기 때문에 그나마의 달콤한 기회도 없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나가서 굶어 죽게 생긴 한국의 백만 실업자들뿐만 아니라 반값노동 사슬에 묶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금 21세기의 하층 노동자층을 메우고 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십년전 읽던 감회가 지금의 책장을 죽 훑는 감회와 사뭇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책 속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의 현실이 다르지 않은데, 소설속의 투쟁하는 인민들에게는 있었던 이상(理想)이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있는지는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어쩌면 서로의 존재조차 모른 채 투쟁하고 있던 소설 속의 인민들은 하나의 공산주의 실현이라는 이상이 있었다. 그 책의 밑바닥 노동자들은 그 이상 아래 가장 편견없고 의심없는 투쟁을 전개한다. 그러나 현재, 소설 속의 이상이었던 ‘공산주의’는 파시스트 독재라는 제목을 달고 박물관에 표구되어 있다. 잭 런던의 예언이 이 지점만큼은 틀린 것인가라는 자문을 해 본다.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바움은 1989년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나서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남긴 유산은 썰물이 빠진 바닷가의 고래처럼 덩그마니 남았다”고 서술했다. 사실 이 서술은 그의 여운과 회한을 담는다. 1932년, 열다섯살의 나이에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작심을 하고 열아홉에 영국공산당 당원이 된 이래, 50여년동안 스탈린주의자라는 비난에도 당적을 버리지 않았던 그가 그 무렵 공산당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노학자는 미래를 꿈꾸는 하고 많은 열정들 중에 공산주의는 과학적 사회주의와 노동자 국제주의, 그리고 당 구성원들의 헌신이 있었다고 정리한다.

    젊은 시절 ‘노동자에게 국가는 없다’며 ‘국가’의 자본주의성을 비판하는가 하면,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 1991년 구 소비에트 몰락까지 인류의 근현대사를 꼼꼼히 기록해 온 공산주의자 노학자는 지난 달 초(2012, 10.1)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당시 그의 부음기사를 보면서, 그의 대단한 학문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꼼꼼한 기록 속에서 특별한 열외를 받은 스탈린은 대체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그의 자서전 어느 부분에서 나의 질문에 답을 하는 듯했다. 그는 “원탁의 기사가 바보, 멍충이, 범죄자가 되어 버리고 아무도 그의 정의와 꿈을 더이상 믿지 않게 되어도, 성배(聖杯)를 포기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성배가 아니라 성배를 찾아나서는 것이라는 아서왕의 말을 인용한다. 필시 그의 원탁의 기사는 스탈린이 아니라 그가 열다섯살에 마음에 품었던 공산주의였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상(理想), “자기 본위를 넘어서고 예외없이 온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이상(理想).”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만평 그림(출처 www.revleft.com)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땐 잭 런던을 불러오려던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나는 왜 노동자 국제연대에 관심이 많고 그것이 왜 투쟁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를 적어볼 요량이었다. 그러던 중 책장 맨 밑칸 구석에서 우연히 내 눈길에 걸린 그는 무엇이 달라졌길래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하며 말을 붙인다. 우리 투쟁의 구호는 20년 전에는 나라를 바꾸겠다고 했지만, 요즘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한다. 20년 전에는 비민주 독재정권을 적으로 규정했지만, 이제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라고 공공연히 이야기 한다.

    하지만 담대해진 스케일에 비해 비전은 어떠한가. 조금은 복고풍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거창한 용어인 이상(理想)을 들먹였지만, 실상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상을 바꾸는데 함께하고자 하고 또한 꼭 필요한 그 사람들과 같은 꿈을 꾸고 있는가. 한국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고 그리스에도 있고, 그야말로 여기저기 없는데가 없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말이다. 한반도 땅덩어리 안 곳곳에도 없는데가 없는 그 사람들. 거리에도, 철탑에도 덕수궁 앞에도, 그리고 보일러실같은 휴게실에도, 출입국관리소 담벼락에도, 뿐만 아니라 편의점에도, 햇빛 한 점 없는 쪽방에도…

    나는 아서왕의 성배에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란 딱지가 붙어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 속의 밑바닥 노동자들이 염원하던 것도 무슨무슨 주의라는 단어 그 자체보다도 ‘오늘’을 괴롭히는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목적의식이었다고 해석하고자 한다.

    그들은 현실에 발 붙이고 투쟁하되 발 끝에 머물지 않는 눈을 가졌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은 오늘날의 투쟁하는 노동자·민중들에게 면면히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괴롭히는 문제의 근원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전략에서 찾아진다면, 그리고 그러한 문제가 나와 내 주변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면 그에 응당한 대응전략을 가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것이 ‘국제연대’라는 운동의 한 전략을 바라보는 나의 접근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계화 추세 속에 양적으로 늘어난 국제연대 사업 혹은 국제 교류가 함께 꾸는 꿈에 근접한 것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한 것도 현실이다. 앞으로 주어질 몇 번의 기회를 통해 세계 각지의 노동자 민중 투쟁 속에 내재된 공동체적 숙명과 함께 꾸는 꿈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필자소개
    막연히 국제연대를 위한 일을 하려고 뭣도 모르고 이주노동자 운동으로부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노동조합의 주체가 되는 과정에 함께 했던 것이나, 타국의 투쟁을 직간접적으로 접할 기회도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은 개인 운동사에서 행운이었다. 이후 공공연맹에서 일을 하면서 현장 투쟁과 국제연대의 긴밀한 연관성을 절감하기도 했고, 한계에 고심키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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