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비의 마음치유 이야기⑧
    "나는 달콤한 늦잠에서 왔다."
        2012년 11월 08일 10: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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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피정을 다녀왔다. 사람을 만나고 마음을 만나는 나는 내 안에 쌓인 또 다른 편견을 벗기 위해 부지런히 상담을 받는다. 이번 상담은 가을 안에서 다시 나를 바라보는 가을 피정을 선택했다. 가을 피정에서 건진 내 시 한편을 부끄럽지만 옮겨 적는다.

    나는 달콤한 늦잠에서 왔다.
    – 봄비

    나는 내 책상 위 탁상달력, 꽉 짜여진 일상에서 왔다.
    빠꼼하게 빈 날이면 빈둥거리는 게으름에서 왔다.
    빈둥빈둥 거리다 ‘놀 일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호기심에서 왔다.
    터럭 나이를 먹어버린 가을 같은 쓸쓸함에서 왔다.

    나는 필요한 뭔가가 생기면 ‘엄마~’를 찾는 여우같은 아들에게서 왔다.
    그 아들을 함께 만든 꼬릿한 담배냄새, 남편에게서 왔다.
    까까머리 19살, 교련복 차림으로 내 가슴에 들어온 그 첫사랑에게서 왔다.

    나는 1980년도 광주에서 왔다.
    서울역 가득 찼던 데모대, 그 아우성에서 왔다.
    영등포 산선과 남대문 경찰서, 페다고지와 김민기 노래에서 왔다.

    나는 백합제 시화전, 시인이 될 줄 알았던 단발머리 여고생에게서 왔다.
    ‘엄마 돈 줘~’ 그러면 ‘나, 니 엄마 아니야’ 못 본 척 하는 엄마 뒤를 따라다니며
    ‘그럼 아줌마 돈 줘~’ 물러서지 않았던 지구력에서 왔다.

    끼고 살았던 빨간 머리 앤, 앤을 사랑하는 멋진 길버트에게서 왔다.
    같이 놀던 친구네, 장롱 밑 종이인형상자 그 안에 들어 있던 친구의 천 생리대,
    그 놀라움에서 왔다.

    초등학교 1학년 첫 소풍 전날,
    아빠와 싸우고 집나가는 엄마의 가방에서 왔다.
    울다 잠든 새벽, 똑딱똑딱 김밥 써는 엄마의 칼소리에서 왔다.
    맘 놓고 다시 잠들었던 그 날의 달콤한 늦잠에서 왔다.

    어느 늦가을의 풍경

    우리는 다 어디에서 왔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내 삶을 온통 주관하는 가족에게서 왔고 어린 시절 호기심에서 왔다.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질 지 알 수 없었던 미지의 소년에게서 왔고 선택할 수 있는 거라곤 투쟁밖에 없는 지금의 현실에게서 왔다.

    곱상하게 생긴 사람이 있었다. 큰 키에 항상 웃는 얼굴, 그 입에서 나오는 개그 콘서트 같은 이야기 때문에 과정을 시작하기 전 항상 기다려지던 사람이었다.

    딸 셋의 아빠였던 그는 딸 피아노 학원 데려다 주고 온다고, 아이들 라면 끓여 먹이고 온다고 항상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곤 했다.

    바닷가가 고향인 그는 방학만 시작되면 가방을 집안에 던져놓고 바다로 나갔단다. 떨어져 있는 세 곳의 해수욕장을 돌며 여름 내내 바다에서 까맣게 태우고 살았단다. 맨 처음엔 바닷가에 뒹굴어 다니는 슬리퍼들을 주워 다른 해수욕장에서 팔며 살았고 시간이 지나면 코펠, 옷가지, 게다가 펼쳐져 있는 텐트도 걷어 팔면서 여름을 즐겼단다.

    나중에 더 이상 훔쳐 팔게 없어지면 빨간 모자를 쓰고 해수욕장 관리인 보다 먼저 일어나 텐트마다 사용료를 미리 걷어 들이기도 했다는 악동, 그는 유쾌함에서 온 사람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땐 아이들이 무서워하며 곁에도 못가는 체육선생님, 그 분의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여학생을 만나러 가기도 했단다. 한 밤 중 여학생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고장나 버린 오토바이를 외딴 동네에 버려두고 되돌아와 편안한 늦잠을 자기도 했단다. 학교에서는 오토바이가 없어졌다고 발칵 뒤집혔는데 심증은 확실하나 물증을 잡지 못해 씩씩거리던 체육선생님을 무던히 바라보았다던 그, 그는 아무도 건들이지 못하는 뚝심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 무서웠던 체육 선생님, 지금은 고향 땅에서 팬션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 가끔 고향에 내려가 선생님을 뵈러 가면 오히려 선생님이 자신을 피하시곤 한다며 껄껄 웃는 그, 그는 든든한 배짱에서 온 사람이었다.

    과정을 하다 너무 힘들어 펑펑 우는 동료를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앉던 사람.

    휴업 후 가사노동을 하도 했더니 손에 주부 습진이 걸렸다고 두 손을 보여주던 사람.

    아이들이 모두 수두에 걸려 일주일 내내 아이들에게 보모가 되었다가 선생님이 되었다가 친구도 되었다가 많이 놀아주었다며 돌보는 모습, 가르치는 모습, 같이 노는 모습을 온 몸으로 표현하며 환하게 웃던 사람.

    다른 동지가 아들과 힘겹게 만나는 과정을 바라보며 당장 집에게 큰 애랑 둘이서 데이트를 해야겠다고, 단 둘이서 영화라도 한 편 봐야겠다며 곧바로 자신의 몫으로 과정을 챙겨 안던 사람.

    과정을 끝내며 ‘내가 얼마나 일상적인 말만 하고 살았는지 알겠다.’는 고백을 한 사람

    ‘우리 만남이 일기장 같았어. 같이 쓰는 일기장’ 이란 명언을 남겨주었던 사람.

    순수함에서 온 그 사람. 이 가을 어디에 있을까?
    쓸쓸해 보이는 가을바람 안에 새 봄의 생명 씨앗이 뿌리내리는 걸 알고 있을까?
    그 씨앗 한 톨이 가을바람에 움직여 빛으로 성장하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래서 이 가을, 스산함 속에 다시 태어남의 기적이 숨어있다는 걸 그는 느끼고 있을까?

    필자소개
    홀트아동복지회 노조위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아리랑풀이연구소 그룹 상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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